소설리스트

18화 (18/254)

새로운 영력이 그녀의 몸을 감싸자, 몸 안에 들어찬 그의 영력도 점차 차분해졌다.

식은땀이 맺혔던 이마는 정상 체온으로 회복되었고, 근육의 경련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 빛 안에서는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괴롭히던 이전 생의 모든 고통스러운 환청과 환상들이 멀어져가는 듯했다.

‘……사실 나도.’

그리고 너무 어이없게도.

‘나도 당신을…….’

왜 자꾸 과거의 그가 보였는지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이 환영들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밀실에 갇혀 있는 동안, 그녀는 내도록 그의 환영을 보곤 했었다.

아마도 가장 외로울 때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겠지. 아무것도 아닌 그녀에게 늘 진심으로 다가와 주었던 그였으니까.

그런 이를 계속 밀어내기만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을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내 보답인걸.’

그녀의 앞엔 어렵고 길고 험한 길이 놓여 있었다.

그녀 때문에 불로불사의 자격을 포기한 이에게 그것마저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지 마. 난 당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세화의 주먹이 안으로 말려들었다.

‘내 가족을 살리는 게 무엇보다 먼저야. 그 외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이 충만한 영력과 다시 돌아온 시간에 대해서는 지극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까.

차마 제 몸을 감싼 영력들을 바라볼 수 없던 그녀가 눈을 감았다.

노을이 가득한 방 안에서. 붉은 파도 같은 빛의 파편들에 휘감긴 채 눈을 감고 있는 주세화의 모습은 마치 빛과 불의 지배자처럼 지극히 오연하고 아름다웠다.

신의 권역에서 추방된 채 고향을 잊어 가고 있던 최덕문은,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아득한 신의 이름을 꺼내 놓았다.

모두가 말을 잊은 채 한낮의 석양과 그 안에서 별처럼 부서지는 빛무리를.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의 중심에 선 그녀를 언제까지고 침묵에 감싸인 채 경이에 젖어 바라보았다.

* * *

최덕문은 더 이상 아무 조건도 내걸지 않은 채 그녀의 요구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계약의 세부 사항과 일정을 세심하게 조율했다.

이윽고 완성된 계약서에 서명한 후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올 때와 똑같이 창백한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아들은 그를 배웅하러 나갔고, 그 뒤에서 홀로 남은 최덕문은 멀쩡해진 제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며 몸 상태를 가늠했다.

그는 오늘 대단히 몸이 좋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뒤로, 주에 한 번은 억지로 잡아 놓은 기혈들이 뒤틀려 고통으로 애를 먹었던 것이다.

허나 이 작은 주가의 여식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마치 먼지라도 털어 내듯 그의 어깨를 몇 번 가볍게 툭툭 치고 지나갔다. 그것만으로 틀어진 기혈들을 바로잡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이 뒤틀림은 그가 고향에서 영력을 안정시켜야만 낫는 것이었으니.

그리하여 어린것의 행동은 당분간 그의 고통을 잠시 눌러 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최덕문에겐 이 작은 환족을 따를 이유가 충분했다.

‘탈피하기 전, 성체도 되지 못한 몸의 영력이 그 정도라니. 그걸 알아보지 못한 내 눈이야말로 잘못됐었구나.’

게다가 제 아들마저도 권속으로 삼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녀의 영력을 본 최덕문에게 그 약속 하나면 이제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눈을 감은 중년인의 얼굴에 안도의 감정이 퍼져 갔다.

지금껏 자신보다 먼저 아들이 죽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걱정이 많았던가.

‘이젠 됐다. 이젠 됐어.’

아들을 살릴 방법을 찾은 이상 그에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람을 부른 그는 제가 가진 환석 중 가장 최상급의 것들만 분류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아들의 은인은 그의 주인이었다.

그는 이제 저 어린 환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주가의 원로, 주명윤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신영의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잘게 이는 통증에 결국 머리를 짚었다.

그의 옆을 함께 걷던 사단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백가 가주의 접객을 맡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어찌하겠나. 신영께서 이미 내게 일임하신 것을.”

“그런 건 소가주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 아닙니까.”

“나이가 아직 어려서, 주가와 필적하게 기세가 오른 백가의 수장을 맡기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군.”

“그게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껏 다른 일에는 모두 소가주님을 앞세워 놓고, 이번 일에는 나이가 어리다고요?”

“…….”

말이야 저렇게 했지만 사실 주명윤이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저 명령 이면에 담긴 신영의 속마음을 말이다.

‘가주께서 나를 경계하고 계시다.’

그 명에 백가 가주와 자신을 한데 엮어 처리하고 싶은 그의 열망이 담겨 있다는 걸.

“거기다 백가 가주를 위한 연회에 세화 아가씨께서도 참석하라고 따로 이르셨다면서요.”

“…….”

“지난번 언급한 혼인 동맹을 아직 포기하지 않으신 걸까요?”

주명윤도 그 부분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종전을 했다고는 하나, 십 년간 지난하게 서로의 혈족들을 죽여 왔던 사이가 아닌가.

그런 그를 위한 연회를 벌써부터 계획하고, 아직 외부 활동조차 하지 않은 제 딸까지 참석하라 강요하다니.

“혼사 동맹을 맺으려 하는데 네가 해 줄 수 있겠느냐.”

“아니야. 안 돼. 내 사위는 문무에 모두 뛰어나고, 악기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심성도 착해야 하고, 무엇보다 내 집 가까운 곳에 사는 이가 아니면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

“절대 안 돼!”

“……신영께서 아가씨를 백가 가주에게 보내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니야. 그럴 리 없다. 신영이 그렇게까지 잔인하실 리 없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주명윤의 얼굴엔 짙은 분노와 피로감이 사무치게 스며들어 있었다.

가문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고향인 환계가 어떻게 소멸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연회에나 관심 있는 한심한 혈족들.

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만을 걱정하며 여섯 가문에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분쟁을 해결하길 원하는 자들.

그런 상황에서도 자존심만 세우는 가주의 면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거기다 다른 원로들까지 내 딸을 공녀 취급하고 있으니. 공녀라니. 그게 우리 지배자의 일족에서 나올 법한 단어인가?’

“…….”

뜻이 있는 혈족들 몇몇이 그와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강의 흐름은 몇 개의 돌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가문을 위해 살며 가주에게 충심을 다해야 한다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점점 신영의 명에 냉담해져 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조금 후면 딸을 생사조차 장담할 수 없는 곳으로 홀로 떠나보내기까지 해야 하니.

‘아낌없이 귀애해 온 내 딸을.’

부인인 천수아는 종전의 후처리에 바쁜 남편 대신 변경에서 병사들을 도우며 의료진으로서 활약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청천벽력 같은 딸의 소식을 전해 듣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변경에 남은 두 아들들도 길길이 날뛰고 있었고 말이다.

주명윤이 곧 도착할 제 부인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참담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한 가지 안심되는 건 백가 가주에 대한 것이겠지.’

그가 이곳으로 오는 이유가 무엇이든 나쁜 속내를 가지진 않았을 거라는 기묘한 신뢰.

적에게 그런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이상한 일일 수 있으나 주명윤은 전시 중 이미 여러 차례 백기하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적이지만 과연 대단한 사내였다.

입은 좀 걸었으나 전쟁 중엔 그렇지 않은 이를 찾는 것이 더 힘들 테고.

지략과 행동력, 인내심. 넓은 포용력. 적군에게도 보이던 인의와 신수로 변용했을 때의 위엄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불세출의 사내였지. ……차라리 그가 우리의 가주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가 깜짝 놀라 제 머리를 털어냈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십 년간 서로의 친구와 가족을 그리 많이 죽여 놓고는 이게 무슨.

혈족은커녕 앞으로는 어떤 자리에서 만나더라도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불의 관계가 될 텐데 말이다.

‘게다가 가주께서 내 딸을 연회에 참석시키시려는 이유가, 정말로 그 혼사 동맹을 다시 언급하시기 위함인 걸까?’

다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얘기다.

물론 백기하가 제 딸의 짝으로 부족한 이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백가에 이를 가는 주가의 혈족들이 이렇게 많은데, 겁 없이 혼인 동맹을 맺었다가는 딸은 절대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가주께서 어찌 내 딸과 내게 이러실 수 있는지.’

종전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 누가 알았을까.

‘이럴 바에야 차라리 전장을 누비던 때가 더 나았다.’

무거운 발걸음은, 그럼에도 앞으로 디딜 수밖에 없었다.

주명윤은 끊임없이 저를 괴롭히는 상념들에서 벗어나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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