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대리모라니…. 전 이제 스물두 살이고, 학교도 다니고 있는데…….”
“그까짓 사진 전공 해서 뭐 하게?”
“하지만…….”
“얘가 왜 이리 말이 기니? 네 아버지하고도 진즉 논의가 된 사안이야. 삼현의 대를 잇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 있다고.”
아버지라는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어머니.”
“그래, 그래. 마음껏 어머니라고 부르렴, 아가.”
은재는 그때 도망갔어야 했다.
잔혹한 가시나무에 갇힌 하찮은 미물에 불과한 자신에게 자유를 주었어야 했지만…….
스물두 살의 어린 신부는 아무리 당차더라도 그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신부대기실에서 ‘후손 잉태의 도구’로 취급하는 시어머니의 내밀한 엄명을 들은 후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은재의 아버지 서정탁의 청탁 같은 강요도 있었다.
“무조건 잘해라.”
“아빠…….”
“네 덕분에 삼현과 연이 닿으면서 아빠가 훨훨 날게 생겼으니. 이 연이 끊기지 않도록 애쓰거라. 기필코 명심해!”
도망가자.
그때, 결심했다.
오롯이 삼현그룹의 눈치를 살피며 엄포 놓듯 신신당부하는 아버지의 말을 과감히 저버릴 작정이었다.
스물네 살 도강윤이 신부대기실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서은재. 결혼식장엔 나타났네?”
하객들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근사한 턱시도를 입은 신랑의 기세등등한 조롱 같은 말에 은재는 분했고, 이가 갈렸다.
이 시궁창에서 버티리라.
저 남자한테 복수하며.
어쭙잖은 복수심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 데는 만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애무하지 마.”
나약한 자존심으로 도강윤을 극렬히 거부했지만.
“기대해.”
그럴수록 도강윤은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무자비한 야수처럼 맹렬히 파고들었다.
“결단코 멈추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격정적인 도강윤과 결합하며 은재는 처절히 깨달았다.
억지 결혼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이 남자와의 결혼을 깨고 싶지 않았음을.
그래서 지독히 아픔을.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겼고, 차가운 가면을 썼다.
강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가해자로 느꼈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냈던 첫날밤은 그에게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으리라.
그래서인지 그는 은재를 완벽히 도외시했다.
한파처럼 냉랭했고, 대외적인 행사 외엔 어린 신부와의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꽉 찬 일정으로 바쁘다는 구실로 둘만의 식사도 한 적 없었다.
그리고 매달 한 번.
도형호 부회장이나 민경애 여사가 원하는 손주를 위하여, 배란일에 맞춰서만 남은 숙제하듯 잠자리를 가졌다.
그 또한 은재의 제안이었다.
“안 해.”
“싫어도 할 수 없어. 난 임신해야 해.”
“나는 동물이 아니야.”
“도강윤 씨.”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신랄한 격식체에 강윤의 눈빛도 서느레졌다. 그러나 은재는 냉소적으로 조롱했다.
“하도 이기적이라서요.”
“내가?”
“이 사막 같은 집안에서 내 숨통을 조금이나마 트이게 해줄 순 없어?”
“…….”
“모르겠어? 내게 아기라는 보호막을 만들어달라고!”
극구 저항하던 도강윤이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은 며칠 후였다.
무엇이 그의 심기 변화에 작용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합의된 매달 한 번의 거사는 잉태를 위한 결합에 불과했다.
은재는 견디고, 그는 수컷의 야성만 드러내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은재는 더하게 아팠다.
둘의 관계가 극도로 첨예해질수록, 자신이 도강윤을 원하는 걸 깨달아가며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런데도 내보이지 않았다.
미련한 자존심으로 벌벌 떨면서도.
둘의 관계를 망친 장본인이 자신임을, 자신의 선택이 우둔한지 알면서도.
“지독히 미련해.”
제 마음속에 꼭꼭 숨겼던 감정을 되새기며, 은재는 털썩 인근의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등신.”
푸, 거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지금도 등신이잖아.”
결혼식장에서 자행했어야 할 도망을 이제야 하고선, 막상 갈 데가 없어 버스정류장에나 있다.
빵―!
“멍청한 서은재!”
때마침 차도에서 들리는 클랙슨 소리에 맞춰 은재는 자신을 향해 욕설을 내질렀다. 그나마 소리라도 질러서 속은 후련하다며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저벅저벅.
조금은 성급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서은재.”
불쑥 도강윤이 나타났다.
깜짝 놀랄 새도 없이, 그가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강한 팔뚝으로 옭아매듯.
“널 또 잃어버린 줄 알았어.”
은재는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어떻게…….’
밀착한 가슴팍 너머 도강윤의 쿵쾅거리는 심박수가 고스란히 전해져서.
‘어떻게 도강윤이…….’
마치 애탄 고백처럼 들려서.
쿵쾅. 쿵쾅.
***
“강윤아!”
스스럼없이 강윤의 목덜미를 양팔로 감은 여자는 임현서였다. 목에 매달린 채 아양 떠는 그녀는 흡사 앙큼한 여우 같았다.
“우리 강윤이 여전히 근사하네?”
“뭐 하는 짓이야?”
“까르르. 반가워서 그러지.”
경멸의 눈초리에도 주눅들 임현서가 아니었다. 되레 득의양양한 눈웃음을 쳤다. 병원 로비의 이목을 이끌려는 의도였다.
“떨어져.”
그러나 강윤은 무감각했다.
“밀쳐 버리기 전에.”
“아유, 무서워.”
서느런 경고가 있고 나서야 현서가 엄살 부리며 물러났다. 그러곤 뽀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1년 만에 귀국한 나한테 이러기야? 내 메시지도 맛있게 씹어먹더니……. 나 보고 싶지 않았어?”
“추호도.”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지?”
단호함조차 제멋대로 해석하는 현서로 인해 강윤은 눈살을 구겼다.
“멋대로 해석하는 건 여전하군.”
그러고서 화장실 방향을 일별했다. 그의 신경은 오롯이 저편의 은재였다.
“안 그래도 너 만나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되었다. 우리 저녁 먹으러 가자.”
임현서는 국내 최대 건설사인 건우건설의 임보성 회장이 불혹에 얻은 금지옥엽 외동딸로, 어화둥둥 예쁨만 받고 자란 탓에 매사가 자기 위주였고, 원하는 바는 쉽사리 성취했다.
현재 그녀가 대표로 있는 영화제작사 또한 건우건설의 임 회장이 별다른 재능 없는 외동딸의 든든한 뒷배를 봐주며 설립한, 실질적으론 껍데기만 그럴듯한 명함이었다.
그런 임현서가 유일하게 갖지 못한 건 도강윤뿐이었다.
“차라리 술을 마실까?”
“임현서.”
“응?”
돌연 강윤은 현서의 양어깨를 잡아서 돌려세웠다. 그런 후, 기대 만발하는 현서를 무턱대고 화장실 쪽으로 이끌었다.
“안에 들어가서 사람 있나 살펴봐.”
“뭐?”
“샅샅이.”
황당해하는 그녀를 여성 전용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잇따라 현서가 문을 발로 차는지 쾅, 쾅!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야? 아무도 없는데!”
영문 모르는 현서가 씩씩거리며 도로 나왔다.
강윤의 짐작대로 은재는 없었다. 정문에서의 반대편인 후문으로 빠져나간 거다.
‘또 잠적한 걸까?’
불길함이 뒷덜미로 엄습했다.
“도강윤, 날 이렇게 홀대하기야! 기껏 할아버지 편찮으시다는 얘기에 귀국하자마자 병문안 왔는데!”
“그럼, 할아버지 뵙고 가라.”
강윤은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곤 뛰다시피 후문으로 직행했다.
“야! 도강윤! 이 나쁜 놈아!”
뒤편에서 현서가 악다구니를 썼으나 강윤의 귀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서은재.’
오롯이 한 여자를 찾기 위한 걸음을 내디딜 뿐이었다. 다급한 반동으로 슈트 재킷이 팔딱거리고 넥타이가 휘날렸다.
문득.
6년 전 서은재와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붙잡고 싶어 공항으로 달려갔음에도, 그녀의 파리한 낯을 보자마자 제 욕심은 덮었던 강윤이었다. 그리고 무덤덤을 가장했다.
“어디로 가지?”
“일단은 핀란드로.”
“핀란드는 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해서.”
허튼 농담처럼 말한 후 은재는 웃었다.
웃는 입술이 추웠다.
가장 불행할 때, 가장 행복한 나라로 떠나는 그녀에게 강윤이 해줄 수 있는 배려는 ‘영영 미련 갖지 말라’고 냉담해지는 것뿐이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가.”
그는 감정 없이 응수하고서 먼저 돌아섰다. 등 뒤의 쓰디쓴 눈초리를 인식하며, 갈비뼈를 내리누르는 흉통을 등한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은 줄 알았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서은재가 떠나서 한편으로는 후련하다고 단정했다.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극렬히 반성하며 그녀의 종적을 뒤쫓은 주제에.
“은재야.”
거리의 어둠을 뚫고 강윤의 탁한 숨소리가 흩어졌다.
‘나는 너를…….’
또다시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끝이군.”
이혼이 확정되었을 때처럼.
“가.”
떠나는 너를 붙잡지 못했을 때처럼.
***
“널 또 잃어버린 줄 알았어.”
강윤의 허스키한 저음이 은재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멀리 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의 가파른 심박에 전염된 것처럼 은재의 심박도 요동쳤다. 신경도 팽팽히 긴장되었다.
“놔.”
꿀꺽.
은재는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평정심을 회복했다.
제 심장의 두근거림을 감추려 상반신도 꼿꼿이 세웠지만, 도강윤의 억센 팔뚝은 풀리지 않았다.
절실함 마저 배어든 저음이 목덜미의 여린 살결로 흩뿌려졌다.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