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14화 (15/84)

14.

“저녁 먹으러 가자.”

“라면 있어? 집에 가서 라면이나 먹을래.”

“라면?”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은재는 1층 로비로 앞서 나갔다.

성큼 뒤따르던 강윤이 다소 엉큼하게 실눈을 떴다.

“라면 먹고 갈래? 같은 유인가? 기대해도 되나?”

“뭔 기대?”

“몰라?”

“알아야 해?”

다소 냉소적으로 반문에 강윤은 떨떠름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면이 없다는 소리야.”

“사 가야겠네.”

은재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아무렴, 전 국민의 유혹 언어 ‘라면 먹고 갈래?’를 모를까.

강윤의 얄궂은 ‘기대한다’에 반항한 것뿐이지.

‘라면은 편의점 가서 먹으면 될걸.’

은연중 뉘우치며 병원 회전문으로 다다른 참이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든 채 돌아 나오던 남자가 발을 헛디뎠다.

“앗!”

“서은재!”

기민한 강윤이 은재의 어깨를 당겼다. 폭포수 같은 커피 세례는 가까스로 피했으나 손과 상의에 몇 방울이 튀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금세 진한 원두 냄새가 진동했다. 흰색 상의에도 얼룩이 번졌다.

“화장실에 다녀올게. 차로 먼저 가 있어.”

“기다릴게.”

“응.”

은재는 색다른 기분을 만끽했다.

화장실에 간 자신을 기다리는 도강윤이라니.

천지가 개벽해도 있을 수 없던 일이었는데…….

“피식.”

무의식중 은재는 웃었다.

용의주도한 남자가 체계적으로 깔아놓은 유혹의 함정에 종아리는 물론 허벅지까지 빠졌음은 지각하지 못한 채 줄곧 실실거리며 로비로 돌아갔다.

그때.

“강윤아!”

회전문을 통과한 여자가 강윤의 목덜미를 스스럼없이 끌어안았다.

“어?”

은재는 반동하듯 모퉁이에 제 몸을 감추었다. 뒷덜미가 뻣뻣해지고, 가슴골 아래가 저릿저릿했다.

임현서다.

도강윤의 연인, 임현서.

“까르르.”

로비 저편에서 들려오는 말간 웃음소리에 초점이 뭉개진 듯 시야가 뿌옜다.

‘왜 숨니?’

은재는 자조적으로 조소했다.

임현서의 존재를 망각했던 자신도, 죄인처럼 숨어버린 행동도 용서되지 않았다.

‘가자.’

발길을 반대로 돌리며, 그녀는 후문을 통해 병원에서 빠져나왔다. 지분거리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었다.

***

‘결국 또 도망이네. 못났다, 서은재.’

반갑지 않은 사람 순으로 치면, 민경애와 1순위를 앞 다투는 임현서였다. 더불어 임현서와 함께 있는 도강윤은 절대적으로 싫었다.

돌이켜보면.

그녀가 낀 게 아니라.

‘내가 그들 사이에 낀 건데…….’

임현서는 도강윤의 fix 같은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들을 처음 대면했을 때도, 대학생이던 스물두 살에 그들을 훔쳐보았을 때도, 그들은 당연지사처럼 늘 짝이었다.

지레짐작이었을 뿐인 그들의 관계를 확신한 것은 스물두 살 때였다.

“아빠.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파릇파릇하게 대학 생활을 만끽하던 은재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날이기도 했고.

“결혼이라뇨?”

“나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구나. 삼현그룹에서 혼처가 들어오다니…….”

아버지 서정탁은 몹시 들떠 있었다.

“건우건설과 혼담이 오간다고 소문이 있었는데 말이지.”

서정탁의 바람은 한결같이 재벌이었다.

어렵사리 벤처사업으로 성공하고, 알만한 중소기업으로 성장시킨 아버지의 희망이었고, 삼현그룹의 하청기업으로 선정되면서 그 야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컸다.

그 소원 성취를 위해선 은재와 재력가의 정략결혼이 절실하여, 딸이 대학생이 되자마자 중매 시장에 내놨는데, 드디어 그 꿈이 실현될 참이었다.

“하지만 저 이제 2학년인데…….”

“어차피 결혼은 해야 하는 걸, 학교가 대수라고. 더구나 사돈이 삼현인데.”

“여보, 삼현그룹 3세라면, 경영수업 받느라 유학 갔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었을 텐데요?”

“그쪽이 워낙 손이 귀하잖은가. 후계자 경영에 돌입하기 전 혼사를 서두르려는 게지.”

“삼현이 우리와 혼사를 한다니…….”

엄마도 한껏 들떴다.

“삼현 3세라면 인물이며 두뇌며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던데… 중매 시장에서도 탑 1위인 자제라고요. 정말 삼현 맞아요?”

“삼현그룹 회장님께서 친히 제안하셨대도. 그러니 틀림없지.”

“세상에나. 우리 은재 복 받았네.”

은재는 부모의 대화가 귓가에서 떠도는 느낌이었다. 한 대 크게 맞은 양 어안이 벙벙하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빠, 제가 결혼할 상대가 삼현그룹 자제 맞아요?”

“넌 여태 뭘 들은 게냐? 그렇대도.”

어릴 적부터 세뇌당하듯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고 들었고,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라 했으니 누구와 결혼해도 별반 상관없었다.

하지만 삼현그룹은 결단코 그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에베레스트 같은 최고봉 상류층인데다……

“너와 도형호 부회장 아들이 결혼한다니까.”

“아들이 몇 명인데요?”

“웬 얼빠진 소리냐? 삼현엔 독자뿐이지 않냐. 3대 독자라 했던가.”

그러니까.

독자뿐이니까.

“이름이 도강윤이라고 했던가요?”

엄마의 입에서 명확한 이름이 나왔다.

도강윤.

이름 석 자와 함께 이명이 울리듯 귀가 벙했다.

그는 은재의 첫사랑 같은 존재였고, 자신의 첫 키스를 앗아간 상대였다.

충돌 같던 키스이긴 했지만…

어쨌건, 짧은 인연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에 고등학교 3학년인 도강윤을 처음 봤고, 그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당시엔 서로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이 싹텄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몇 번의 짧은 만남은 그의 거대한 배경에 맞물려 깊은 상처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와의 마지막은 12월 31일의 충동 같은 첫 키스였다.

이후, 다시 볼 수 없었던 도강윤이었고, 한 달여 후에야 알음알음한 소식으로 유학을 떠났다고만 들었다.

그런데.

5년 만에 제게 날아온 소식은.

‘내가 도강윤하고 결혼한다고?’

마귀할멈의 저주 같았다.

은재는 잔뜩 들뜬 부모님에게서 벗어나, 그 길로 도강윤을 수소문했다.

도강윤은 친구 채종훈의 주최로 삼현 프라이빗 하우스에서 귀국 축하 파티 중이었고, 삼현재단의 삼현고등학교 출신인 은재는 무난히 진입하여 바글바글한 인파 사이에서 그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야, 최윤석. 강윤이 못 봤어?”

“2층에 있던데.”

인피니티풀 너머에서 채종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뚝, 정지한 은재는 등 돌리고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이 새끼, 파티 싫어서 거기 박혀 있는 거야?”

“아까 억지로 맥주 한 잔 마셔주곤 위로 가버리더라.”

“그래? 데려와야겠네.”

“야, 가지 마.”

하우스로 가려는 채종훈을 최윤석이 가로막았다.

“임현서랑 있어.”

“뭐 하는데?”

“뭘 하겠냐?”

심드렁한 질문에 윤석은 엉큼하게 쿡쿡거렸다. 그러곤 채종훈에게 귓속말했다.

“정말?”

교류하는 남자들의 눈빛엔 은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2층에 있다고?’

은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로 작정했다. 2층은 거미줄 같은 복도와 연결된 각각의 객실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주한 결론은…….

슬쩍 열린 방문 틈새로 내보이는 남녀의 반나체였고, 풍만한 가슴골을 이불로 가린 임현서와 촘촘한 근육질의 상반신을 벗은 채 누워있는 도강윤이었다.

“아.”

은재는 그대로 파티장에서 벗어났다.

도리어 자신이 범죄를 지른 기분이었다.

폭발 직전의 심장박동 때문에 숨도 넘어갈 지경이었다.

“하. 멍청이.”

일련의 상념들을 곱씹는 은재의 목구멍에서 격한 날숨이 터졌다.

스물두 살에 받았던 충격이 스물아홉 살인 현재까지 생생했다.

‘그런 놈하고 결혼한 건 난데…….’

거역할 수 없었던, 고압적인 어른들이 정해 버린 결혼은 급조한 프로젝트처럼 숨 가쁘게 이뤄졌다.

어린 예비 신부의 권한은 없었고, 옛날 옛적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시집가는 색시처럼 예비 신랑과도 마주하지 못했다.

‘나도 피했지.’

사실대로 말하면, 도강윤의 연락을 몇 차례 받았고, 만나자는 메시지도 왔었지만 은재 스스로 그를 차단했다.

뇌리에 박힌 영상을 본능적으로 묻어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

민경애는 메두사 같은 사람이었다.

은재야, 은재야, 하며 세상 살가운 예비 시어머니 노릇을 하던 민경애 여사의 양면성을 마주한 것은 결혼식 당일이었다.

“아기를 가져라.”

신부대기실의 모든 이를 내보낸 후 본성을 드러낸 그녀였다.

“보잘것없는 네가 우리 집안에 득(得) 될 일은 고작 그것밖에 없지 않겠니?”

“절 왜 며느리로 받아들이셨어요?”

“받아들이다니. 난 결단코, 단 한 번도 널 며느리로 용인한 적 없어.”

“없다고요?”

“당연하지 않겠니? 너희 집안과 엮이는 걸 내가 반기겠어?”

은재의 아버지 서정탁은 삼현그룹과의 혼사를 언론에 유포했다. 세간의 이목을 제 뒷배로 만들어 이 결혼을 기필코 성사되도록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민경애 여사는 그 과정을 원망하는 거였다.

“세간의 이목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이 결혼을 엎고 싶은 게 나다.”

“그럼, 엎어주세요.”

아버지의 야욕으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기에 은재는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잖아요.”

“no, no. 네가 철딱서니가 없구나. 이미 돌이킬 수 없지 않니. 더구나 너희 아버지가 챙긴 실속이 얼마인데…….”

“아버지가 어떤…….”

“앙큼하게도 모른 척 내숭 떠는 거니?”

“어머니.”

“됐다, 됐어. 어쨌거나 우리 측 손해는 감수하기로 한 대신, 난 아주 긍정적인 결론을 내었단다.”

그녀의 미소는 소름 끼치도록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넌 그저 우리 집안에 후손을 이을 대리모 같은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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