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은재는 못 들은 체하며 무릎을 구부려 희성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희성아, 인제 엄마라고 안 불러도 돼.”
“왜? 저 아저씨 나쁜 아저씨 아니야? 이모 안 잡아가?”
잡혀가.
“이모 손님이야.”
은재는 ‘나쁜 아저씨’라고, ‘희성이가 아야 해주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를 어렵사리 눌렀다.
“아! 이모 안 잡아가서 다행이다.”
한시름 놓았다는 듯 희성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귀여운 아이의 안도에 엄마 미소를 짓는데, 희성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면 이모, 이모 손님이랑 같이 밥 먹으러 올 꼬야?”
절대 같이 안 가지!
“아니. 이모가 오늘은 희성이랑 밥 못 먹겠네? 이모가 어디 가야 해서….”
“어. 손님 있어서 안 된다고 말할게. 이모, 안녕! 아저씨도 빠빠.”
말을 끝내기도 전에 희성이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강윤의 한쪽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탐나는 인재야.”
“…….”
분별력 있는 남자의 말엔 동의하지만, 은재는 무관심하게 가방만 챙겼다.
그때.
“엄마! 이모한테 아저씨 손님 왔쪄!”
옆집 담벼락 너머에서 희성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잇따라 괄괄한 전경의 고성도.
“뭐! 아저씨? 어떤 아저씨!”
“이모 남자!”
이모 남자 아니야!
반박하기도 전에 극성맞은 기척이 접근했다.
‘망했다.’
은재는 향후 벌어질 일로 암담해졌다.
저 큰 남자를 어디에다 구겨 넣을 수도 없고.
“언니! 민서 언니!”
쾅!
배가 산만큼 솟은 만삭 임산부 정경이 산적처럼 들이닥쳤다.
“언니, 대체……. 우아! 저 남자….”
이윽고 그녀의 레이더에 강윤이 잡혔고, 은재는 절망했다.
도망치긴 틀려먹었다.
***
“이게 웬 횡재야. 언니, 나 저렇게 잘생긴 남자 처음 봐.”
어영부영 강윤과 인사를 끝낸 정경은 은재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안채로 들어왔다. 그러고선 문틈으로 그를 훔쳐봤다.
“그래서? 저 남자는 누군데? 희성 아빠가 어제 부둣가에서 만났다는 남자 맞지?”
“…아는 지인이야.”
전남편이란다.
은재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진실을 삼켰다.
“저 남자랑 외박한 거야?”
“외박이라니! 일 때문에 서울 다녀온 거야.”
외박(外泊)이 틀린 답은 아니었으나 은재는 극구 부인했다.
심리가 초조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이 섬을 빠져나가야 했다.
“정경아, 언니 일이 있어서 당분간 서울에 있어야 해.”
“며칠이나?”
“정해진 기한은 없고, 조만간 올게.”
“언제 가려고? 오늘 바로 가?”
“응.”
그제야 마당의 캐리어를 발견한 정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언니, 의리 없게 말도 안 하고 가려고 했지? 이 섬에 왔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지려는 거야?”
“사라지긴. 내가 외국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시간 내서 온다니까.”
“진짜지?”
“어.”
확언하자 그제야 정경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여장부답게 툭툭, 무릎을 펴고 일어난 그녀가 암팡지게 물었다.
“짐 싸느라 밥도 안 먹었지? 기다려, 밥 차려올 테니까.”
“괜찮아, 정경아. 목포 가서 먹으면 돼.”
“밥은 먹여서 보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굶기 일쑤면서!”
욱하는 성깔을 드러낸 그녀가 마당으로 나갔다. 그러곤 뒤뚱뒤뚱 대문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
“희성아! 잘생긴 아저씨랑 놀고 있어!”
“어!”
도강윤이 아이랑 논다고?
은재는 정경의 말을 모나게 들었다. 그런데 강윤은 정말 아이와 놀고(?) 있었다.
아이를 들어 돌담에 앉혀놓고, 작은 몸체를 안전히 감고서 쫑알거리는 희성의 말소리에 집중했다.
영락없이 다정한 아빠 같았다.
표정도 색달랐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하였던, 추호도 상상한 적 없던.
온전한 온화함.
‘아이를 좋아했나?’
만일 아기가 태어났더라면 당신은 좋은 아빠가 되었을까?
문득.
그러면 안 되는데….
6년 전 뱃속에서 잃어버린 아기가, 태어났더라면 희성이만 했을 그 아기가 떠올랐다.
“우리 아기 살려주세요, 제발!”
응급 침대에 실려 가면서도 처절하게 사정했던 그 아기가.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미쳤나 봐.’
은재는 얼른 안채로 들어가서 제 몸을 감췄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저릿저릿한 복부를 부여잡고 부들부들한 입술을 악물고 견뎠다.
***
“어서 식사하세요. 시장하시죠?”
큰손 이정경 여사는 지혁까지 대동하여 재등장했다. 커다란 상을 가져온 그녀의 남편이 평상에다 깔았고, 그녀는 한 무더기의 반찬을 놓았다.
“왜 밥이 두 개뿐이야? 너희는 먹었어?”
“진즉 먹었지, 이 언니야. 벌써 2시가 넘었어.”
그러곤 은재는 타박하더니 뭍 남자에게는 입안의 솜사탕처럼 굴었다.
“차린 게 변변치 않지만, 두 분이 오붓하게 드세요.”
“여보, 목소리가 괴상해.”
“닥쳐.”
눈치 없는 지혁이 끔벅끔벅 물었지만, 터무니없이 당당하게 제압했다.
“언니! 집은 염려 말고, 얼른 먹고 가.”
그러곤 은재에게 곰살맞게 인사했다. 돌아올 거란 믿음이 있어서였다.
“서울 가서 연락할게.”
“핸드폰도 없으면서. 하나 개통해! 뭐 그리 고고하다고, 세상하고 단절하고 살아?”
“알았어. 잔소리 그만해.”
은재는 집요한 정경을 돌려세우고, ‘이모, 안녕’ 하고 손 흔드는 희성을 꼭 안아줬다.
가족 같은 옆집 식구들이 떠나자, 강윤이 담담하게 입술을 뗐다.
“좋은 이웃을 뒀네.”
“응.”
“외롭진 않았겠어. 편했겠고.”
흑막처럼 깊은 강윤의 눈동자가 여릿하게 일렁였다. 잔잔히 파도치는 그의 눈길을 피하듯 은재는 고개를 숙이며 수저를 들었다.
“제일 편했어.”
정경의 정성 가득한 밥은 여느 때처럼 단맛이 났다. 이 섬에 머물기 전까진 맛보지 못했던, 이 섬의 신이 은재에게 선사해 준 선물 같은 맛이었다.
***
“오셨어요?”
“차 한잔하지.”
“내갈게요.”
삼현그룹 현 회장이며 강윤의 아버지인 도형호가 골프 모임이 끝나고 귀가했다.
차 한잔, 이란 소리는 긴요한 얘기가 있다는 뜻이다.
“앉지.”
차를 든 민경애가 서재로 들어서자, 묵묵하던 도형호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컨디션이 나빠지셨다는 보고가 들어오던데?”
“금요일 저녁에 연락 와서 저도 어찌나 놀랐던지…. 한달음에 달려갔지요.”
“원 교수는 뭐래?”
“하필 원 교수는 세미나 일정으로 부산에 있다네요. 통화만 했는데, 월요일에 재검사해 본다고 했어요.”
“어디가 안 좋으신데?”
“아버님께서 기운 달리고 어지럽다면서 수액을 요청하셨다네요.”
“수액을? 어떤 수액?”
“영양제를 맞으셨다고.”
“음?”
도형호는 어리둥절했다.
선단공포증이 심한 부친은 수술 후에도 제 팔에 박힌 링거로 인해 의료진을 애먹인 양반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영양제 투여를 요구하시다니….
“당신께서 지각하실 정도로 증세가 나쁘신가?”
“염려 마세요. 백 살은 너끈히 장수하실 거예요.”
“그래.”
효자인 도형호의 잇새에서 무지근한 한숨이 나왔다. 내리까는 민경애의 속눈썹에 스산함이 맺혔다.
“강윤인?”
“…휴일이니 집에서 쉬겠지요.”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들리라 해.”
“왜요?”
민경애는 긴장했다.
‘혹, 서은재에 대해서 안 건가?’
도형호는 감성적이며 사랑이 충만한 도성만 회장과 달리 지극히 이성적이며 잔인할 정도로 냉철했다.
더불어 아들에겐 유독 냉혹한 잣대를 세웠으며, 제 뜻의 거역을 털끝만큼도 포용하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일로…?”
그렇기에 민경애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트집 잡히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업무적으로 나눌 얘기야.”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있는 건가요?”
“별일 아니야.”
도형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지만, 민경애는 불안증이 발현했다.
다신 엮이고 싶지 않던 서은재가 버젓이 강윤과 함께 나타났고, 그 빌미로 아들이 제 아버지에게 압제를 받을 건 불 보듯 뻔했다.
‘우리 도 상무가 피해 당하기 전에 어떻게든 내쫓아야 하는데…….’
서은재와는 이제 법적으로 완벽한 타인이었다. 예전처럼 속박할 수도, 감독할 수도 없는 처지인 민경애는 골치가 아팠다.
***
뚝.
식사를 끝내고 치우려던 찰나, 정수리에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응?”
의아해서 얼굴을 하늘 높이 든 찰나.
후드득―
성급한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맑고 청청했던 하늘을 시커먼 먹구름이 두툼한 이불처럼 덮었고, 사위는 삽시간에 밤처럼 어둑해졌다.
“앗.”
은재는 상을 치우려고 우왕좌왕했다.
순간, 강윤이 기민하게 슈트 재킷을 벗어 던지더니, 상을 통째로 들고서 무리 없이 성큼성큼 나아가 안채의 주방으로 옮겼다.
‘와우, 힘이 장사네.’
은재는 무심코 감탄하다가, 괜히 모난 심리에 아랫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때.
우르르, 쾅쾅!
느닷없이 번쩍하는 낙뢰와 뇌성이 천지를 뒤흔들었고, 은재의 눈앞에 테라스에서 추락하는 형상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아악!”
은재는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다.
털썩, 쭈그려 앉아 질끈 눈을 감고서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