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8화 (9/84)

8.

은재는 흡사 쫓기는 자와 같은 심정이었다.

‘갈 거야.’

미친 듯이 옷가지를 꺼내고, 캐리어가 터질 정도로 꾸역꾸역 넣고, 긴요한 물품을 정신없이 담았다.

‘기필코 가야 해.’

한시라도 도강윤과 이 섬에 머물 수 없다는 오기와 어두워지기 전에 무조건 떠나야 한다는 집념이 있었다.

“아! 사진.”

그러다 긴요한 일거릴 놓쳤음을 깨달았다.

은재는 이 마을에 머무는 동안 재능기부로 섬마을 홍보 책자에 실릴 사진을 작업 중이었는데, 내달 발행 예정이라 그 사진들을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회장님께서 잔소리하겠네.”

당분간 섬에 올 수 없을 테니 자료 전달이 시급했다. 은재는 서둘러 카메라 메모리카드를 분리하고 노트북을 챙겼다.

“늦으면 안 되는데…….”

지체할 시간이 없어 부랴부랴 마당으로 나왔다.

무심결에 시선을 돌리다가, 낮은 돌담에 기댄 채 유유자적 바다를 구경하는 도강윤을 발견했다.

‘하, 젠장맞을, 진짜.’

홀리듯 일시 정지해 버린 자신도 자각했고.

‘도강윤 자체가 절대적인 문제야.’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자신의 분위기로 압도하는 남자는 섬과도 괴리가 없다.

섬은커녕 시골조차 다닌 적 없을 텐데.

‘저 남자는 왜 촌구석에서조차 멋질까.’

일반화의 멋짐일 터이니 자신의 동태눈은 잘못 없다고 스스로 두둔하며, 은재는 헛기침 소리를 냈다.

강윤이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어디 가려고?”

“잠깐 좀 다녀올게.”

“같이 가지.”

같이.

대수롭지 않은 언사였으나 은재는 불끈한 감정이 치솟았다.

그와 ‘같이’한 것이 있었나?

우린 상관했을 뿐, 상종한 적 없는데.

어쩔 수 없는 몇 번의 정사만이 같이한 행위에 불과했다. 공유가 아닌 견디는 것이었고, 죽을 정도의 버팀이었다.

“도강윤.”

은재의 입에서 탁한 한숨이 새었다.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뭐가?”

“공사다망한 도강윤 상무님이 왜 자신의 일과를 이런 섬에서 허비하는지. 이런 적 없잖아?”

“주말이야. 상무도 쉬어야지.”

비딱한 공격을 그는 능통한 방어로 대처했다. 태평히 웃으며.

“나는 서은재한테 노력하는 중이야.”

“이것도 일종의 노력이야?”

은재는 그의 말을 일깨우며 대놓고 조롱했다.

“무리하지 마, 몸 상할라. 신경도 거슬리고.”

“좋은 징조야.”

그러나 능란한 강윤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네가 내 언행에 일일이 신경 쓰는 건.”

적확한 지적이었다.

일체 무관심하다면 자잘한 언행마다 동요하진 않을 터.

“도통 적응 불가라서 그래.”

은재는 회피했다. 분주하게 카메라 가방을 고쳐 메며 서늘하게 쏘아붙였다.

“시간 많이 걸릴 거야. 저 배 타고 먼저 가.”

“기다리지.”

퇴장을 재촉했지만, 그는 의연히 반격했다.

2차 공격을 하려다가 어차피 휘말리는 건 자신일 거란 판단에 은재는 그대로 대문을 나섰다.

“서은재.”

그때, 그가 불렀다.

“기다릴게.”

깊은 안광으로 오롯이 은재를 내려다보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유혹 같은 눈짓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은재는 목구멍에 힘주며 인내했다.

“…응.”

그리고 돌아섰다.

그와 간격을 둔 자리에서 벗어나며, 그의 시선을 등으로 감지했다.

도강윤이 없었던 곳에서 도강윤이 기다린다.

기다린다고 했다.

이상한 뜨거움이 가슴골에서 몽글거렸다.

***

“아따, 작가님 안 계시면 책자는 어쩐대?”

섬마을 청년회장은 걱정이 가득했다.

“조만간 다시 올 거예요. 일단 책자에 실린 사진만 선정하세요.”

“알았소.”

은재는 그를 안심시키며, 노트북을 열어 꼼꼼하게 폴더별로 나눠놓은 사진을 내보였다.

“사진들이 죄 좋구먼. 우리 마을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 이 중 어찌 고를까.”

“마음에 드세요?”

“아무렴. 참, 먼젓번에 목포 시장님이 식사 자리에서 제안한 일은 어쩌나? 영, 물 건너간 거요? 많이 챙겨주실 거라잖소.”

“당분간은 여력이 없어요.”

“하긴, 서울로 일하러 간다는 사람인데…….”

일이라는 구실을 댔기에 청년회장은 집요하게 캐묻지 않았다. 다만 불안한 듯 재차 물었다.

“영영 안 올 건 아니지?”

“그럼요.”

“하면 되었소. 작가님이 떠나버리면 서운타 할 사람이 숱하니.”

“가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작가님.”

청년회장이 가려던 은재의 발을 붙잡았다.

“작가님은 우리 섬마을의 선물 같은 사람이요.”

“제가요?”

“처음 우리 마을에 왔을 땐 그저 흔한 여행객 같더니, 우리 마을에 숨을 불어넣지 않았소.”

그의 말마따나 처음엔 단순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이 섬이 좋았다. 이 섬마을 사람들도 좋았고.

그래서 현재의 집터를 임대하고 정착하였고, 마을 주민들의 일상을 사진으로 남겼다.

“오늘도 봐봐.”

청년회장이 멀거니 부둣가를 응시했다. 선착장으로 무수한 관광객들이 빠져나왔다.

“주말이랍시고 손님이 그득그득하잖소. 이 모두가 작가님 덕분이요.”

단순하고 투박하던 마을 홍보 책자에 은재의 재능기부로 인해 생동감 가득한 마을 사진이 실리면서, 관광객 수요가 곱절로 늘었다.

그래서 목포 시장까지 은재에게 목포 홍보 사진을 맡기고 싶어서 안달복달 중이었다.

“그러니 멀리 가지 마소. 금방 와요.”

“네.”

은재는 살갑게 인사했다. 청년회장의 아쉬운 손짓을 받으며 길을 나섰다.

돌담길을 따라가며 골목 모퉁이를 돌 때였다.

저 위의 계단에서 슈트 재킷을 우아하게 펄럭이며 내려오는 강윤을 포착했다.

“왔어?”

“어디 가?”

“내가 이 섬에서 어딜 가나. 서은재 마중 나왔지.”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지 뭐 하러.”

“애타서.”

퉁명스러운 은재의 태도에 강윤이 짐짓 흘리는 투로 읊조렸다.

“길도 모르면서 마중은.”

은재는 동요하지 않으려 꼿꼿한 태도로 응수했다.

시도 때도 없이 고백 비슷한 언사를 하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냉정한 도강윤보다 상대하기가 훨씬 까다로웠다.

“일은 잘 끝났어?”

“응, 대충.”

“무슨 일인데?”

“알 것 없어.”

“매정하군.”

외면하면 할수록 또렷이 인식되는 남자 때문에 은재는 발길을 서둘렀다.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서 계단을 투덕투덕 오르다가, 그만 계단 끄트머리를 밟고 말았다.

휘청.

은재의 발바닥이 미끄러지며 몸체가 고꾸라지려 했다. 순간 강윤이 민첩하게 그녀의 등허리를 단단한 팔뚝으로 감으며 제게로 당겼다.

“아.”

반동하듯 은재는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 푹 잠겼다.

도강윤, 영악한 남자는 아예 끌어안다시피 다른 팔로 은재의 어깨를 강하게 둘렀다.

철렁.

남자의 향이 물씬 풍겼다.

그의 품에서 배어 나오는 묵직하면서 그윽한 향은 후각을 자극했으며, 은재의 작은 몸을 조이는 단단한 몸체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조심해야지.”

정수리로 그의 저음이 내리깔렸다.

완전한 남자를 몸을 느낀 은재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머릿속의 이성 회로가 끊긴 듯 벙하며, 그 틈으로 감정이 비집고 들어왔다.

“서은재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숨소리처럼 허스키하고 유혹적으로 나직했다.

“…어.”

은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재빨리 바르게 서려고 상반신을 들려는데, 반대로 강윤의 팔뚝은 더하게 조였다.

“아,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은재는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강윤은 놓지 않았다. 도리어 손을 은재의 뒤통수로 올려 지그시 내리눌렀다.

“잠시만 이대로 있자.”

그렇게 포옹한 채 정지한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마치 은재의 존재를 각인하듯.

마치 자신을 은재에게 아로새기듯.

은재의 심장박동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더불어 밀착한 가슴에서 그의 심음도 여릿하게 전해졌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뱃속이 마구잡이로 떨렸다. 마음이 뒤숭숭하게 뒤틀려서,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놔.”

토해내듯 말하자, 비로소 강윤이 떨어졌다.

그는 침묵했지만, 은재는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눈빛에 담긴 묵직한 감정을 읽었다.

“…….”

일부러 자극하는 건지, 의도적인 건지, 그의 긴 침묵은 오히려 은재의 심장을 들끓게 했다.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은재는 화난 듯 저벅저벅 계단을 올라갔다.

도강윤의 언사가 경보음처럼 뇌리에서 울렸다.

“좋은 징조야. 네가 내 언행에 일일이 신경 쓰는 건.”

나쁜 징조다.

남자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열기를 감지하고 말았으니.

그 탓으로 데인 것처럼 은재의 전신이 화끈화끈했다.

***

“이모, 있나?”

출발 준비가 끝나려던 참인데, 낮은 대문의 틈새로 작은 머리통이 빠끔히 들이 밀어졌다.

다섯 살 희성이었다.

“어? 이모 있었꾸나?”

“희성이 왔네?”

“어. 엄마가 이모 집에 있나 없나, 보고 오라고 했쪄…….”

희성이 짧은 다리로 대문을 폴짝 뛰어넘었다. 그러곤 팔랑팔랑 뛰어오다가, 돌담의 거무죽죽한 존재를 인지했다.

“응?”

때마침 강윤이 돌아보았다. 그를 알아본 희성이 약간 혼란에 빠졌다.

‘저 아저씨랑 있을 때는…….’

하듯 또르르 눈알을 굴리더니, 종종 달려와서 은재의 허리춤에 폭 안겼다.

“엄마!”

“천재군.”

강윤이 무미건조하게 가짜 모자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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