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오디션
출근하는 길 현준에게 전화가 왔다. 유리는 휴대 전화 위에 뜬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전화는 맥없이 울리다 끊어졌다.
식지 않은 분노가 그녀의 마음에 들끓고 있었다.
출근을 마치고 집무실에 앉아 있을 때, 현준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사무실 전화로 걸려 온 연락이었다.
“부대표님, 강현준 본부장님이십니다.”
전화를 끊어 버리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불화를 외부에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돌려요.”
수화기 너머로 현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야. 잘 지내지?”
유리의 눈치를 보는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다시 속에서 무언가 울컥했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려던 생각은 싹 사라지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무슨 일 있어?”
“없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전화도 안 되고 문자도 안 보고, 걱정돼서 전화했지.”
“바빴어.”
“바쁘지? 난 또 무슨 일 있나 해서….”
“할 말 다 했으면 끊을게.”
“자, 잠깐만 유리야!”
“왜?”
“아, 요즘 촬영장 분위기는 어때?”
조심스럽게 묻는 현준의 물음에, 유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떠냐니?”
“아니 그냥, 궁금해서. 잘되고 있나.”
“알다시피 잘되고 있어.”
유리는 ‘알다시피’에 힘을 주어 말했다. 묘한 뉘앙스에 현준은 움찔했다.
“그렇지? 잘되고 있다더라고.”
“누가 말해 줬나 보지?”
“어… 어? 아니 뭐. 그냥 궁금해서.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식이. 하하. 아 치료받을 시간이다. 또 연락할게.”
뚝-
전화는 끊겼지만,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처음에 차가웠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이 소식이 재혁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기에 그녀는 티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는데, 이번에는 이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부대표님. 연락받으셨습니까?”
“무슨 연락 말씀이죠?”
“강재혁 대표님이 배역 맡으신다고 하셨대요.”
“정말이에요?”
“네. 그럼요. 그래서 저도 촬영장 도착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저도 들르죠.”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의아한 일이었다. 천하의 똥고집 강재혁이 고집을 꺾다니.
“가서 물어봐야겠네. 연기하는 것도 좀 보고.”
유리는 머리나 식히자는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촬영장에 발을 들여놓자 제법 엄숙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리고 들려온 것은 이나의 목소리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촬영을 위해 꾸며 놓은 세트장에 재혁과 이나가 마주 서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주변을 둘러보니, 박 감독을 비롯한 연출부 스태프들이 두 사람의 연기를 진지한 표정으로 체크하고 있었다.
오디션 현장이었다.
상황을 파악하자 유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설마. 정이나랑 연기하려고 캐스팅을 받아들인 거야?”
재혁과 이나의 연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조건이라, 들어 보지.”
“지배인으로 승진. 약속할 수 있나요?”
“안 해 주면?”
“나를 가질 수 없을 거예요. 영원히.”
“그런 협박이 통할 거라 생각했나? 너 같은 여자는 세상에 많아.”
“그럼, 멍청하게 대가 없이 몸이나 내주는 여자나 찾아요. 난 아니니까.”
“이게 너의 매력이지, 아무것도 없으면서 굳히지 않는 자존심. 쉽지 않아서 좋아.”
“….”
“그 남자는 정리했나?”
“아니요. 정리할 남자도 애초에 없어요.”
“좋군.”
재혁의 팔이 이나의 허리를 감싸 잡아당기자,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가까이 다가섰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유리는 예상하지 못한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은 갖지 못했던 남자가, 자신보다 한참 못한 여자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유리에게 견딜 수 없는 질투와 모욕감을 불러일으켰다.
저 입술이 닿는다면 그녀는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박 감독의 ‘컷’ 소리가 들렸다.
“잘 봤어요.”
컷 소리와 함께 이나가 재혁의 손아귀에서 한발 빠져나왔다.
재혁은 아쉬운 듯 미묘한 여운을 남기며 정면을 바라보고 섰다.
연출팀은 얼굴을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오디션 결과를 기다렸다.
잠시 후, 감독이 이나를 향해 물었다.
“정이나 씨. 몇 가지 질문 좀 할까요?”
“네.”
“드라마 속에서 인하가 성공에 목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박 감독의 질문에 이나는 골똘하게 생각했다.
같은 대본이라도 배우가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180도 다른 인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만약 박 감독이 생각하는 인물의 모습과 이나가 해석한 인물의 모습이 다르다면 함께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몰랐다.
이나는 고민하는 듯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생각 안 해 봤어요?”
박 감독이 다시 물을 때, 이나가 대답했다.
“사랑입니다.”
“사랑?”
이나의 대답에 스태프들이 수군댔다.
박 감독 역시 의아하다는 듯 이나에게 물었다.
“극 중 인하는 성공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인물인 건 알고 있겠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답이 사랑이라구요?”
“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인하가 외로워 보였어요. 어려서부터 사랑받지 못한 불우한 가정이었고,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며 자라 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은 성공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거 같아요. 제가 인하라면 말이죠.”
“불우한 가정? 대본에는 그런 장면이 안 나오는데?”
“그냥, 그랬을 거 같았어요.”
짝-짝-짝-
촬영장 구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 중년 여성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신인이라더니, 제법이네?”
이나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이번 드라마의 작가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드라마 작가이기도 한 김인숙이었다.
“어때, 김 작가? 마음에 들어?”
“신인이라면서 제법이네? 딱 내가 생각하고 있던 말을 하네. 이름이 정이나고 했나요?”
“네.”
“마음에 들어요. 인하랑 이름도 비슷하네.”
모두의 궁금증을 풀어 주려는 듯, 한쪽에 서 있던 이 대표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우리 작가님, 캐스팅 때문에 걱정돼서 부산까지 오셨는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김 작가가 이나에게 다가섰다.
“연기 인상 깊게 잘 봤어. 우리 인하, 잘 부탁해.”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잘생긴 사람이 강 대표님인가 보네요? 그동안 왜 그렇게 튕겼어요? 이렇게 할 거면서.”
“몸값을 올리는 방법이라고 해 두죠.”
“어머, 밀고 당기기를 하셨다? 어쨌든, 이렇게 왔으니까 열심히 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이건 무슨 분위기?”
오디션이 종료되자 유리가 다가왔다.
“부대표님 오셨습니까?!”
아부를 떨며 인사하는 이 대표를 무시하고 유리는 곧장 재혁에게 말을 걸었다.
“강 대표님. 배역 맡기로 하신 건가?”
“그래.”
“뭔 바람이 불어서?”
재혁은 주변을 쓱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지. 오전 스케줄이 바빠서. 촬영 관련 스케줄은 비서실로 보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먼저 올라가죠.”
재혁은 박 감독에게 말하고는 유리를 지나쳐 갔다.
그의 거침 없는 모습에 김 작가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쩜. 내가 만든 캐릭터랑 똑~같네!”
유리가 재혁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그녀의 옆으로 이나가 스쳐 지나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리의 마음은 질투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
이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재혁의 뒤를 쫓아갔다.
이 모든 일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배우를 꿈꾸던 시절, 그녀의 목표는 김인숙 작가의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토록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던 일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찾아와 버린 것이다.
“뭘 그렇게 생각해?”
재혁이 불쑥 물었다.
“아니요. 좀 믿기지가 않아서요.”
“잘하던데?”
“….”
재혁의 칭찬에 이나는 얼굴을 붉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모습에, 재혁은 그만 심장이 덜컹거려 버렸다.
맙소사. 저렇게 수줍은 표정의 이나라니….
“몰라요.”
그녀는 창피한 듯 재혁을 두고 복도를 뛰어갔다.
그는 정말 큰일 났다는 듯 가슴을 쥐며 말했다.
“정말이지 심장에 해로운 여자야.”
***
6시, 공식적인 업무가 끝났지만, 재혁은 근처 골프장의 주인과 저녁 스케줄이 있었다.
골프장과 연계한 시즌 상품을 협의하는 자리였다.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그러지.”
전화기 너머로 재혁이 대답하자 이나도 나갈 준비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박 감독에게 연락이 왔다.
[작품 때문에 할 얘기가 있는데 오늘 저녁 시간 됩니까?]
갑작스러운 연락에 이나는 미간을 좁혔다.
[아니요.] 라고 답장을 보내려고 할 때 재혁이 문을 열고 나왔다.
“박 감독 연락받았나?”
“네.”
“이나는 가 보도록해.”
“못 간다고 연락하려구요.”
“아니야. 이번 주에 촬영 들어가려면 준비할 게 많을 거야.”
“대표님 미팅이 더 중요합니다.”
“알아. 그러니 내가 너 신경 쓰게 하지 말고 갔다 와. 운전은 기사가 해 줄 거고, 협상은 내가 하는 거니까.”
“그래도.”
“이나가 내 얘기까지 듣고 와야지. 나도 출연하니까.”
“….”
이나가 주저하자, 재혁이 쐐기를 박았다.
“같은 비서의 업무야.”
“그렇게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가지.”
재혁과는 로비에서 헤어졌다.
이나는 곧장 촬영장으로 향했다.
직장인들에게는 퇴근 시간이었지만, 드라마 촬영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이나가 도착하자 그녀를 알아본 조감독이 달려와 말을 걸었다.
“오셨네요.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네. 알겠습니다.”
이나는 구석에 앉아 세트장을 바라보았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영인과 인혜의 촬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현장을 가까이에서 보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도 저기에 있을 수 있어.’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큐 사인이 떨어졌다.
“신 15. 테이크 3. 스탠바이~ 큐!”
박 감독의 외침에 카메라가 돌아가자, 여유롭게 서 있던 배우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번 신은 사랑이 이 세상에 전부인 풋풋한 청년과 사랑에 상처를 입은 여자의 첫 만남을 그리는 장면이었다.
그 설레는 순간이, 영인과 인혜를 통해 눈앞에 실현되고 있었다.
배우를 꿈꿨지만, 현장은 처음이기에 이나는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