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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대본 리딩 (46/72)

46. 대본 리딩

“뭐 하는 짓이죠?”

굳어진 이나의 표정에도 재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본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했잖아. 리딩 할 거라고, 앉아 시간 없으니까.”

“배우는 안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지.”

“그런데 이러는 이유가 뭐죠?”

“내 리딩이야.”

“네?”

“서브 남주 자리가 공석이야. 나에게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어.”

“정말요?”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앉지, 시간도 없는데.”

이나는 손에 들린 대본집을 바라보았다.

대본집을 펼치면 그녀의 안에 잠들어 있던 배우를 향한 욕망이 튀어나와 그녀를 잠식할 것만 같았다.

“죄송하지만, 그냥 혼자 하세요.”

“비서를 두고 굳이 혼자 할 필요 없잖아?”

이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치사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재혁의 시선에 이나는 한숨을 쉬고 그의 앞에 앉았다.

“어떤 역할이죠?”

“내 역할은 호텔 사장. 이나가 해 줘야 하는 역할은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고 성공을 택한 여자.”

“서브 여주 역할이네요.”

이나가 미간을 좁히며 재혁을 바라보았다. 

이나가 오디션을 봤다면 그녀에게 주어졌을 역할이었다.

“맞아. 무슨 문제라도?”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이는 것 같아서요.”

“글세. 나는 모르겠는데?”

그는 모호한 말과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나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자꾸 잊고 있던 아픔을 끄집어내려는 걸까?

적막한 가운데 시간이 가고 있었다. 재혁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신데렐라.”

이나는 하는 수 없이 대본을 펼치며 말했다.

“알았어요.”

재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며 대본을 펼쳤다.

“진짜처럼 해 보는 거야. 배우라고 생각하고. 극 중 역할은 우리 이름으로 일단 대체하지.”

“….”

그는 이나의 대답을 듣지 않고 리딩을 시작했다.

“7화 신 넘버 15. 재혁의 집무실. 이나가 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온다.”

지문을 읽었음에도 이나가 계속 앉아 있자, 재혁은 뭐 하고 있냐는 듯 고개를 움직였다.

이나는 내키지 않는 듯 한숨을 짧게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기를 시작했다.

재혁이 계속 대본을 읽었다.

“방 안에 들어선 이나의 표정은 무언가 결심한 듯 비장하다. 느릿한 시선으로 재혁이 그녀를 바라보면, 이나가 한 발 그의 앞으로 다가선다. 두 사람의 위치는 무릎을 맞닿을 정도로 가깝다.”

지문에 맞게 이나가 재혁에게 다가섰다.

재혁이 이나를 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무릎이 맞닿게 가까이 다가온 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결심했나?”

재혁이 대사를 뱉었다.

이나는 그다음 지문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꼭 이 장면으로 해야 하나요?”

“응.”

단호한 재혁의 대답에 이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이나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이나는 말없이 입고 있던 첫 번째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톡-

그랬다. 그가 고른 것은 베드 신을 앞둔 장면이었다.

재혁의 눈빛이 욕망으로 물들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몸이 달라붙는 순간, 이나의 손이 그의 가슴을 슬며시 막았다.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라, 들어 보지.”

이나는 다음 대사가 생각 안 나는지 고개를 돌려 대본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지배인으로 승진. 약속할 수 있나요?”

“안 해 주면?”

“나를 가질 수 없을 거예요. 영원히.”

“그런 협박이 통할 거라 생각했나? 너 같은 여자는 세상에 많아.”

“그럼, 멍청하게 대가 없이 몸이나 내주는 여자나 찾아요. 난 아니니까.”

이나가 그의 가슴팍을 밀치자, 재혁이 멀어지는 그녀의 몸을 잡아당겼다.

“이게 너의 매력이지, 아무것도 없으면서 굳히지 않는 자존심. 쉽지 않아서 좋아.”

“….”

“그 남자는 정리했나?”

재혁의 말에 이나는 갈등했다.

흔들리던 눈빛은 이내 잠잠해지더니, 선함을 포기한 악녀처럼 독하게 변했다.

“아니요. 정리할 남자도 애초에 없어요.”

“좋군.”

5신의 대사는 여기까지였다.

이후는 격렬한 키스를 하며 장면이 전환된다.

장면을 마무리 하며 이나가 한 발 물러나자 재혁이 그녀를 다시 잡아 당겼다.

재혁은 놀란 표정의 이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 더 묻자. 정이나, 정말 꿈을 포기한 거야?”

연기의 연속처럼 보였지만, 현실의 재혁이 묻고 있었다.

“네.”

“왜지?”

“꿈을 꾸기에는 현실이 버거우니까요.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우니까요.”

“그럼 짐이 가벼워지면 할 수 있겠군?”

“그럴 리 없잖아요.”

“그 짐, 내가 짊어져 줄게. 너는 앞만 보고 가.”

“대표님이 뭔데요.”

“네 남자.”

재혁의 말이 무거운 돌처럼 이나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어두운 방 안, 고요한 가운데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요란하게 귀를 두드리고 있었다.

재혁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15신 끝났어요.”

이나가 말하자, 재혁은 욕망에 짓눌려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대본은 아직 안 끝났어.”

이나는 15신의 마지막 지문을 떠올렸다.

‘격렬한 키스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테이블 위로 기울어진다.’

천천히 다가온 재혁의 입술이 이나의 입술 위에 포개어지며 두 사람의 몸은 소파 위로 기울어졌다.

“잠깐만요. 대표님.”

“연기에 집중해.”

대본에는 더 이상 쓰여 있지 않은 테이블 위의 상황이, 재혁의 손에 의해 쓰여졌다.

이 순간 재혁은 작가이자 배우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의 육체는 머리의 생각을 따라 주지 않았다.

능수능란한 손길에 사로잡힌 이나는 더 이상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그를 밀어내야겠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두 팔과 입술은 그를 바짝 끌어안았다.

쓰윽- 살갗을 미끄러져 나가는 소리에 이나의 옷이 한 꺼풀 벗겨졌다.

보드라운 이나의 살결을 마음껏 쓰다듬으며 재혁은 흥분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19금인데. 준비됐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죠?”

“응.”

“머릿속에 그거밖에 없군요?”

“맞아. 내 머릿속에는 이나 생각밖에 없어서, 너를 떠올리면 이런 생각부터 하게 돼.”

“이런 남자인 줄 몰랐어요.”

“쉿. 대사에 없는 말은 하지 마. NG 나면 한 번 더 찍어야 하니까.”

“일부러 NG 내지 말아…. 아!”

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것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번개에 맞은 듯, 통증과 함께 찌릿한 쾌감이 온몸에 퍼져 갔다.

낮에는 재혁을 있는 힘껏 밀어내는 이나였지만, 잠자리에서만큼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쾌락이 조금 익숙해질 때쯤이면 그의 변주가 시작되었다.

예상한 듯 예상하지 못하게,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그의 움직임에 이나는 육체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이나.”

“네….”

“연기 해.”

“싫어요! 아!”

싫다는 이나의 말에 재혁은 그녀를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해.”

“싫다구…요. 대표님!”

“해.”

“잠깐…만요. 잠깐 나와서 얘기….”

“대답해. 하겠다고.”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아….”

애절하게 외치는 이나의 신음에도 재혁은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온몸을 수놓은 쾌락 속에서 15신은 밤늦도록 끝이 날 줄을 몰랐다.

***

격렬한 사랑의 시간이 지나고, 이나는 녹초가 되어 재혁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이나와 다르게 재혁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가 봐야겠어요.”

이나가 지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재혁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 품에 안았다.

“조금만 더 있다 가.”

“찬이가 깰 수도 있어요.”

“안 깨.”

이나는 다시 몸을 일으킬 힘이 없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직 해갈되지 않은 욕망이 허공에 남아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방 안은 적막했고 재혁의 체온은 따뜻했다.

고민으로 가득하던 이나의 머릿속은 하얗게 텅 비어 있었다.

모든 체력이 방전되어 걱정할 기운도 없었다.

그렇게 평온한 시간 속에 재혁이 이나에게 말했다.

“내일 바로 촬영장으로 가자.”

“후…. 그건….”

“말 돌릴 생각하지마. 아까 한 말은 뭐지?”

“그거야. 한다고 안 하면 안 놔줄 테니까.”

이나의 말을 들은 재혁이 몸을 돌려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다시 말해봐 정말 안할거야?”

“대표님! 자… 잠깐만요. 왜 시키려는 거에요?”

“정이나는 이대로 썩기 아까운 사람이니까.”

“연기 안 한 지 오래됐어요.”

“계속 준비하고 있었잖아.”

“….”

“이번만큼은 너에게 집중했으면 해. 찬이나 내가 아닌 정이나, 너 자신에게 말이야.”

“거기 장영인도 있어요….”

“알아.”

“걱정되지 않아요?”

“물론 싫어. 그만큼 널 사랑하니까 보내는 거야. 네가 장영인과 연기하는 모습을 그냥 볼 만큼.”

“….”

자신을 생각하는 재혁의 마음에 이나는 감동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재혁이 장난스레 말했다.

“감동한 표정이네?”

“아니거든요.”

눈이 마주치자 재혁의 입술이 다가왔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눈만 마주치면 입술을 들이미는 재혁이었다.

이나는 슬며시 그의 입술을 손으로 막고는 말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지?”

“대표님도 캐스팅 제안 받아들이세요.”

“?!”

“사실 안 할 생각인 거 다 알아요. 대표님이 제 상대역이면 생각해 볼게요.”

“….”

“나만 밀어 넣고 혼자 쏙 빠질 생각은 아니겠죠?”

“외통수에 걸렸네.”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래. 이나 뜻대로 하지.”

재혁은 입술을 막고 있는 손을 치워 그녀에게 키스했다.

***

다음 날 아침, 재혁과 이나는 촬영장을 찾았다.

촬영을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였다.

말이 오디션이지, 재혁이 출연을 결정했다는 얘기를 들은 이 대표는 바로 이나의 출연을 승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박 감독의 마음에 드는 것뿐.

모든 것이 정해졌다고는 하나, 이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나가 대본을 보고 있을 때, 영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왔네?”

이나는 고개를 돌려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고 대본을 바라보았다.

“잘해 봐. 파이팅.”

영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이나는 이 대표와 대화 중인 재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배우를 하고 싶은 욕심과, 배우를 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절대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나가 재혁을 바라보고 있을 때, 조감독이 이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준비되셨나요?”

“네.”

“그럼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조감독이 스테이지 쪽으로 뛰어가자 멀리서 재혁이 걸어왔다.

“어때?”

“글쎄요”

“잘할 거야.”

“그래야죠.”

“가자.”

재혁이 이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나는 물끄러미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나와 재혁이 함께 세트장에 오르자, 조감독이 스탠바이를 외쳤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스탠바이! 큐!”

큐 사인이 떨어지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이나의 표정이 일순 돌변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이나가 연기를 시작하자, 의심으로 가득 차 있던 스태프들의 표정은 놀람과 수긍으로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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