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납치
재혁의 말이 공기 중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나의 침묵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없어 재혁이 몸을 일으켰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야?”
이나는 당연한 걸 아니라는 듯 묻는 재혁이 미웠다.
이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재혁에게 말했다.
“네.” 라고.
내심 자신이 찬의 아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재혁으로서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확실한가?”
“아니요.”
“그럼?”
“사실, 그때.”
재혁이 이나의 말을 끊었다.
“아니, 이건 듣지 않는 게 좋겠어.”
“….”
“찬이 아빠가 누구든지, 변하는 건 없어.”
이나는 입가에 머물던 말을 삼켰다.
당신이 아빠일 수도 있다는 말.
“왜요?”
이나가 되묻자, 재혁은 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 아이여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니까.”
장담하는 그의 말이 오히려 이나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왔다.
‘정말 당신 아이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요?’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이나가 말했다.
“너무 쉽게 얘기하지 말아요.”
“쉬워 보이나?”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어떻게 증명하면 되지?”
그의 진심 어린 눈빛에 이나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는 마치 열쇠 같았다. 마음을 아무리 굳게 닫아도 여는 방법을 어떻게 아는지 너무나 쉽게 풀어 버렸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찬이 재혁의 아이가 아니라면? 결국, 상처는 자신과 찬만 받게 될 터였다.
이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고쳐 잡으며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증명하지 않아도 돼요. 1년 후면 끝날 사랑이니까.”
차가운 말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재혁의 마음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그녀의 차가움은 오히려 그의 마음을 강철처럼 강하게 만들었다.
“1년은 내 여자지. 1년 후에도 내 여자일 테고. 아닌가?”
흔들림 없는 강렬한 눈빛에 이나는 하마터면 “맞아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약속했잖아요.”
어두운 방 안.
희미한 불빛 가운데 마주친 두 눈 사이로, 한 걸음 물러나려는 이나와 그런 그녀를 잡으려는 재혁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흔들림 없는 재혁과 다르게 이나는 동요하고 있었다.
그때, 그 팽팽한 긴장을 끊어 버리며 이나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엄마예요.”
재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나가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근처야 곧 들어… 뭐? 찬이가 없어졌다고?”
“!!”
“기다려. 금방 갈게.”
이나가 몸을 일으키자 재혁이 그녀를 잡았다.
“무슨 일이야? 찬이가 없어졌다니?”
“모르겠어요. 가 봐야 해요.”
“같이 가.”
“저 혼자 갈게요.”
“없어졌다며, 찾는 데는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좋아.”
“상황 파악부터 하고요. 연락할게요. 기다려줘요.”
“이나야!”
이나가 다급하게 집을 나갔다.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키던 재혁은 핑 도는 머리에 몸을 벽에 기댔다.
재혁의 집을 나왔을 때, 그녀의 집 문은 열려 있었다.
엄마는 초조한 표정으로 거실에 서 있었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난 그냥 잠깐 나갔다 왔는데. 문이… 내가 안 닫았나?”
엄마가 횡설수설하자 이나가 엄마를 다그쳤다.
“엄마! 당황하지 말고 차분하게 말해 봐.”
엄마는 이마를 쥐며 바닥에 무너졌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문을 열고 나간 거 같아.”
이나는 엄마를 두고 찬이의 방으로 뛰어갔다.
찬이 누워 있어야 하는 텅 빈 이부자리를 보자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엄마가 문을 열고 나갔다는 사실보다, 이 새벽에 자신이 재혁의 집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나는 견딜 수 없었다.
이나가 집 밖으로 뛰어나가자 엄마가 소리쳤다.
“이나야!”
때마침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릴 때, 재혁이 집에서 나왔다.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말했다.
“찬이는?”
“모르겠어요.”
“차분하게 설명해 봐.”
재혁이 1층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엄마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열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는 내려갔다.
“그니까. 내가 나간 사이 엄마가 나갔고, 문이 열려 있었고. 찬이가…. 하. 다 나 때문이에요. 애를 두고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이나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재혁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깨를 감싸 안아 주며 말했다.
“괜찮아. 근처에 있을 거야.”
“누가 납치라도 했으면….”
“그럴 리 없어. 걱정하지 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재혁은 이나를 데리고 아파트 관리실로 향했다.
“아이가 없어졌습니다. CCTV 확인을 해야겠어요.”
재혁은 당황한 이나 대신 침착하게 찬의 행방을 찾았다.
무턱대고 찾아다니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이었다.
CCTV를 재생하자, 1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찬의 모습이 보였다.
아파트에서 나가는 찬은 어떤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찬아!”
떨리는 이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재혁은 다른 화면을 확인했다.
납치가 분명해 보였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재혁의 표정 역시 빠르게 굳었다.
그는 빠르게 CCTV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55분. 약 10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멀리 가지 않았을 거야.”
“차… 찬아. 찬아!”
이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찬의 이름을 부르며 관리실을 뛰어나갔다.
“이나야!”
재혁은 이나의 뒤를 쫓으며 관리실 직원에게 소리쳤다.
“경찰에 신고 좀 부탁드립니다.”
이나는 찬을 찾아 정신없이 뛰어갔다.
“찬아!! 찬아!!”
찬의 이름을 부르는 이나의 두 눈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찬을 잃어버린 것이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져 가만히 앉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파트 문을 막 나갈 때, 재혁이 그녀를 따라잡았다.
“이나야, 침착해!”
“이거 놔요! 찬아!”
“정이나!”
“이거 놔요!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찬이가 사라진 거라고요.”
재혁이 이나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찬이부터 찾아야지. 너까지 정신이 없으면 누가 찬이를 찾겠어?”
“….”
“자책할 거면 나중에 해. 지금은 침착하게 찬이를 찾아보는 거야.”
“알았어요.”
이나가 울먹이며 대답하자 재혁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경찰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찾아보자.”
이나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왼쪽으로 갈 테니까, 이나가 오른쪽으로 가 봐. 유괴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놀이터나 과자 가게 위주로 찾아보고.”
“알았어요.”
“찬이, 괜찮을 거야. 알았지?”
“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알았어요.”
맞잡은 손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일별하고 반대 방향으로 흩어졌다.
재혁은 대로 건너편 주택가로 향했다.
그런데, 길을 건너자마자 찬의 모습이 보였다.
찬은 카페 창가에 앉아 무언가 먹고 있었다.
재혁은 자리에서 멈춰 찬이가 맞는지 확인했다.
“이나! 찬이 찾았어!”
재혁은 벼락처럼 외치고 찬이가 있는 카페로 뛰어 들어갔다.
깜짝 놀란 이나가 뒤돌아봤을 때, 재혁은 이미 카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나는 다급한 마음에 무작정 대로를 건너갔다.
달려오던 차들이 경적을 울려 댔지만, 이나의 머릿속은 오직 찬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카페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마침 재혁이 찬이를 번쩍 안아 입구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찬아!”
“엄마!”
찬이가 재혁의 품을 나와 이나에게 안겼다.
재혁은 고개를 돌려 찬을 데리고 있던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당신들 뭐야.”
남자들은 두 손을 흔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워워. 애 혼자 나와 있길래 올 때까지 좀 봐 줬더니, 누굴 유괴범 취급하네?”
“아파트 안까지 들어와서 아이를 데려갔는데 유괴범이 아니라고?”
“아니, 내가 억지로 데려왔나? 얘가 따라왔지?”
“이봐!”
재혁의 벼락같은 외침에도 남자들은 겁먹은 표정 하나 없이 낄낄댔다.
“그러게, 전화를 받으셨으면 이런 일 없잖아. 왜 사람을 피하고 그래.”
“전화?”
“그래! 김영자 여사님 손자 아니야! 그치? 찬이?”
“응!”
찬이가 해맑게 대답하자, 이나가 놀라 물었다.
“찬아, 아는 사람이야?”
“응! 서울 집에 왔었던 아저씨야.”
“어구 착하네, 찬이. 아저씨도 다 기억하고. 봐, 아저씨 잘 보면 생각난다고 했지?”
“네! 처음에는 기억 안 났는데, 나중에 기억났어!”
“엄마랑은 어떻게 아시죠?”
“아, 따님이셨어? 정말 반가워 버리네. 어떻게 아시냐면.”
남자가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햇살…론?”
“채권자여. 내가.”
“….”
남자는 쇼윈도 너머를 보더니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고, 저기 오시네. 우리 고객님.”
잠시 후, 엄마가 헐레벌떡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왜 전화를 안 받으셔?”
“너희들 뭐 하는 짓이야?!”
“하도 전화를 안 받으시길래 얼굴이나 뵈러 찾아왔지. 그래. 김만재 씨는 아직도 연락 없고?”
“없어.”
“아고야~ 이를 어째? 그럼 가게 넘어가게 생겼네? 상환이 이번 주까진데. 얼른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알아서 해. 가.”
“가라면 가야지 또~ 그 가게 문서 잘~ 갖고 계쇼? 가자, 얘들아.”
“예.”
남자들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폭풍이 몰아친 후 폐허가 된 마을처럼, 이나와 엄마 그리고 재혁은 아무 말없이 허탈하게 서 있었다.
“찬이는 괜찮아?”
엄마가 찬에게 다가오려 하자, 이나가 엄마의 손을 탁! 치며 노려보았다.
“뭐야?”
“집에 가서 얘기해. 도와줘서 고마워요.”
엄마는 재혁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카페를 나갔다.
엄마가 나가자 이나가 민망한 듯 재혁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래, 어서 들어가서 쉬어. 찬이도 놀랐겠다.”
“전 안 놀랐어요!”
찬이의 씩씩한 대답에 이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이나가 밖으로 나가고 재혁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마침 남자들이 탄 차가 출발하고 있었다.
재혁은 차 번호판을 유심히 바라보며 읊조렸다.
“나 5837….”
이나가 아파트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그는 남자들의 차가 향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남자들의 차는 횡단보도 앞에 정차해 있었다.
신호가 바뀌기 전 차를 따라잡은 재혁은 무작정 뒷문을 열었다.
“뭐야!”
그는 놀라는 남자의 옆좌석에 몸을 밀어 넣었다.
***
이나는 찬이를 재운 후 거실로 나왔다. 놀란 탓에 몸과 마음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엄마는 거실에 죄인처럼 앉아 있었다.
이나가 표정을 굳히며 엄마에게 다가갔다.
“대체 뭐야? 무슨 일이길래 애가 납치까지 당하게 둬? 엄마, 빚졌어?”
“내가 진 거 아니고.”
“그럼?”
“보증 섰어.”
이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 누구…. 혹시?!”
엄마는 차마 이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