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찬이의 아빠 (2)
만나서는 안 되는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나와 찬, 그리고 찬의 아빠일지도 모르는 두 남자.
우연이 만들어 낸 이 운명적인 장면에 이나는 당황한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재혁이 차에서 내렸다.
“몸은 어떻습니까? 김인하 씨.”
재혁의 말에 영인의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나는 인상을 구기며 대답했다.
“네. 별 이상 없어요.”
“다행이군요. 장영인 씨도 같이 있었군요?”
“우연히 지나다가 만났습니다. 운명인가 봐요. 이나랑.”
재혁이 이나를 보자, 이나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재혁이 영인에게 다가갔다.
“고생 많으셨군요. 제 비서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요, 뭘. 윽.”
손을 잡자마자 영인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세어 나왔다. 재혁이 손을 놓아주자 그는 붉게 물든 손을 부여잡았다.
재혁은 영인을 두고 이나를 향해 돌아섰다.
“이만 들어가시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아, 집에 가자.”
찬은 내리기 싫은지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싫어! 붕붕이 타고 집까지 갈 거야~”
“동료 아저씨도 집에 가셔야지.”
“치! 싫은데.”
찬이가 투덜대며 차에서 내리자 이나가 재혁을 향해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내일 뵐게요.”
“그래요. 내일 봅시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배우님도요.”
이나는 서둘러 아파트 입구로 사라졌다.
재혁이 영인을 향해 말했다.
“안 갑니까?”
“가야죠. 그런데 대표님 왜 이름을 숨기신 건가요?”
은근히 떠보는 영인의 말에 재혁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장영인 씨를 싫어하더군요. 아주 많이.”
영인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혁에게 인사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네.”
재혁이 먼저 무심하게 돌아서 차에 올라탔다.
재혁의 차가 아파트 입구를 돌아 반대 도로로 사라졌다.
영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빠졌다.
“강재혁과 정이나는 연인 사이인 거 같은데, 그럼 아이는 누구 아이지?”
***
집에 들어가니 엄마가 앉아 있었다. 엄마를 보자 이나는 불쑥 화가 났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엄마처럼 느껴졌다.
“찬아, 집에 왔으면 뭐부터 해야지?”
“손 닦기!”
“그래. 어서 닦고 와~”
“응!”
찬이가 화장실로 보낸 후 이나는 화난 표정으로 엄마에게 다가갔다.
“왜 전화 안 받아?”
“무음.”
“그럼 확인하고 연락을 해야지!”
“미안.”
엄마는 넋이 나간 듯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오히려 이나의 기세가 꺾였다.
이나가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없어.”
“그래? 좀 안 좋아 보이는데?”
“피곤한가 봐. 나 좀 누워야겠다.”
“엄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별다른 대답 없이 엄마의 방문이 닫혔다.
이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
한편, 재혁은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다가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린 재혁의 미간은 잔뜩 좁아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재혁에게는 너무나 낯선 일들이었다.
여자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것도, 그것을 위해 거짓말을 하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리고 사랑의 라이벌이 생긴 것까지.
영인과 엮인 것이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아침은 우연이었다 쳐도,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다분히 영인의 의도처럼 보여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는 이나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집에 들어갔다.
때마침 이나에게 문자가 왔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에, 쌓아 두었던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지금 치미는 화가 이나에게 난 것인지 아님 영인에게 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너그럽지 못한 자신에게 난 것인지 재혁은 알 수 없었다.
그는 휴대 전화를 던져 두고 소파에 앉았다.
달빛이 은은히 거실을 비추는 가운데 시간이 지나자, 들끓던 분노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발끝에 걸린 달빛의 몽환적인 기운에 그는 서서히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평생 잊지 못할 장소에 서 있었다.
도로 위, 완전히 뒤집힌 채 불타고 있는 자동차가 보였다.
그 속에 눈을 감고 쓰러져 있는 어머니의 모습, 자신을 구출하고 엄마를 향해 뛰어가는 아버지의 모습.
흐르는 눈물에 불타는 자동차가 젖어 있었다.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문을 잡아당기다가, 여의찮았는지 창문을 있는 힘껏 발로 찼다.
잠시 후 보조석 쪽으로 아빠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순간.
펑!
“헉!”
재혁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너무나 생생한 꿈에 온몸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딩동- 딩동-
희미한 정신 너머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이 소리 때문에 깬 모양이었다.
잠시 후, 인터폰이 켜지더니 이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재혁은 아직 꿈속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들어갈게요!”
이상함을 느낀 이나가 비밀번호를 눌러 보았지만, 문은 이중으로 잠겨 있어 열리지 않았다.
재혁은 있는 힘을 짜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이나가 보였다.
재혁을 본 이나는 놀라며 소리쳤다.
“어디 아파요?”
“아니.”라는 말과 동시에 재혁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대표님!”
놀란 이나가 뛰어 들어와 재혁을 부축했다.
재혁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대표님!”
재혁의 입에서 실낱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약….”
“약이요? 어디요?”
“옷.”
그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이나는 다급하게 거실로 뛰어가 재혁의 옷을 뒤적였다.
낮에 입었던 옷에서 약 한 통과 처방전이 나왔다.
이나는 서둘러 뛰어가 물을 떠서 재혁 옆에 앉았다.
그녀는 재혁의 얼굴을 바로 눕힌 후, 볼을 눌러 입을 벌렸다.
그리고 약의 캡슐을 분리해 흰색 가루를 그의 입에 털어 넣었다.
이나는 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간절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요 재혁씨….”
***
‘엄마는 영원히 너랑 함께할 거야.’
따뜻한 엄마의 모습 위로, 성난 정수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이 내 재산을 가로챌 수 있을 것 같아!’
번쩍-
“헉.”
재혁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나가 그의 옆에 앉아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집이에요.”
그녀의 말에 재혁은 들었던 고개를 다시 누였다.
“후.”
이나가 재혁의 손을 잡아 주었다.
재혁은 눈을 감은 채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마. 얼굴 닳겠어.”
“왜 지병이 있다고 말 안 했어요?”
“지병이 있는 남자를 누가 만나나?”
“대표님.”
“지병 아니야.”
“그런데 약까지 가지고 있어요?”
“쇼크성 트라우마.”
“트라우마요?”
“그래. 특정 상황에서 트라우마가 올라오면 신경이 극도로 긴장하는 거지. 호흡이 가빠지고, 땀이 흐르고.”
“그런 건 나한테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난 당신 비서이자 여자 친구인데?”
“미안해. 최근 몇 년 동안 증상이 없어서 말 안 한 거였어.”
“공항에서도 그거 때문이었죠?”
“맞아.”
이나는 아픈 그를 더 몰아붙일 수 없어서 화를 내리눌렀다.
따지는 것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까.
“어떤 트라우마인데요?”
“….”
이나의 질문에 재혁은 잠시 고민했다.
말하기 힘든 내용인 듯 보였다.
그는 먼 과거를 생각하는 듯, 천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곳에, 사실 나도 있었어.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길이었고, 아버지는 가족 여행을 갈 때면 직접 운전을 하셨지. 너무 어릴 때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차가 뒤집혔고 불이 났어.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시다가 나를 먼저 구하셨지. 그리고 어머니를 구하러 달려갔을 때, 차가 폭발했어. 그때의 공포가 떠오를 만한 상황이 오면 발작을 일으키는 거야. 어렸을 때는 거의 매일 발작했지만, 지금은 극복한 상태지. 아니, 오늘 발작을 일으켰으니 극복했었다는 게 맞는 거겠군.”
“….”
“그렇게 불쌍하게 보지 마. 이제는 내가 화낼 차례니까. 장영인이 왜 거기 있던 거지?”
“….”
이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재혁이 말했다.
“질투나.”
“네?”
“아까 이나가 장영인과 함께 있는 걸 보고 질투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런 사이 아니예요.”
“알아. 알지만 그냥 같이 있는 것도 싫어.”
그의 투정 어린 말투에 이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건강 상태가 너무나 걱정되지만, 이 귀여운 모습에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으니까.
재혁이 이나의 손을 잡았다.
“빨리 대답해.”
“알았어. 걱정 안 하도록 할게요.”
“그래, 눈 좀 붙여야겠어. 여기 조금만 더 있어 줄 수 있어?”
이나는 집에 두고 나온 찬이가 걱정되어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는 재혁의 눈빛을 본 순간 안된다는 생각은 와르르 무너졌다.
‘무슨 일 있겠어? 깨기 전에 가자.’
이나가 대답했다.
“잠들 때까지만.”
“그래. 좋다.”
재혁이 이나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잡은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재혁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이나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재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재혁이 말했다.
“그런데 혹시. 찬이의 아빠가 장영인인가?”
***
한편, 이나의 집에서는 찬이 잠에서 깨어났다.
찬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엄마?”
이나의 방은 비어 있었다.
찬은 할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할머니, 엄마가 없어.”
할머니 방 역시 비어있자, 찬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할머니! 엄마!”
거실로 나와 보니 열려 있는 현관문에 찬은 엄마와 할머니를 찾기 위해 문을 나섰다.
“할머니! 엄마!”
찬은 귀신에 홀린 듯 두 사람을 부르며 현관문을 나갔다.
찬이가 문밖으로 나왔을 때, 딩동-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엄마?”
문 사이로 어떤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찬을 빤히 바라보더니 말을 걸었다.
“너 여기 사니?”
“네. 그런데 엄마랑 할머니가 없어요.”
“혹시 할머니 이름이 김영자야?”
“네. 아저씨, 우리 할머니 알아요?”
“그럼, 잘 알지. 아저씨가 할머니한테 데려다줄게. 같이 갈래?”
남자가 손을 내밀자 찬이 망설였다.
엄마가 귀에 못 박히도록 했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모르는 아저씨는 쫓아가면 안 돼!’
그때, 남자가 찬을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할머니, 아저씨랑 있어. 가자.”
고민하던 찬이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