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피는 못 속인다. (29/72)

29. 피는 못 속인다.

“아저씨 여기 왜 있어요?”

“….”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 짧은 순간, 재혁은 열려 있는 방문을 바라보았다. 문밖으로 이나의 엄마와 이나가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 집 얼마나 할까? 한 10억 하려나?”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빨리 수습하고 들어가야 했다.

그는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비밀 작전 중이야.”

“비밀 작전?”

“엄마랑 할머니한테 들키지 않고 숨어 있는 거야.”

“왜요?”

“이기면 장난감을 주거든.”

“어떤 장난감이요?”

“그게….”

“옥토넛 주면 좋겠다.”

“찬이 옥토넛 좋아하니?”

“네!”

“잘됐다. 이기면 옥토넛 주거든.”

“정말요?”

“그래.”

“우와!”

찬이 소리치자, 재혁이 쉿 모양을 하며 입술을 가렸다.

“쉿~”

“쉿!”

찬이 재혁을 따라 쉿- 소리를 내는데, 밖에서 이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찬아~ 나가자~”

재혁은 다급하게 밖을 바라보며 찬에게 말했다.

“찬이가 아저씨 도와줄래? 그럼 찬이도 옥토넛 준데.”

“우와! 쫌 있으면 찬이 생일인데 생일 선물이에요?”

찬의 질문에 잠시 움찔한 재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맞아. 생일 선물. 그럼 아무한테도 아저씨 여기서 봤다는 얘기 하면 안 돼. 알았지?”

“네!”

“좋아. 약속.”

재혁이 찬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찬은 밝게 웃으며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그 순간, 재혁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 아이의 손가락이 왜 이리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손가락을 거는 찬의 모습에, 재혁은 자신의 어렸을 적 모습을 떠올렸다.

“….”

이나 엄마가 다시 찬이를 불렀다.

“정찬~ 나와야지~”

재혁은 다림판과 함께 북밭이장안으로 몸을 숨기며 말했다.

“찬아, 약속 잊지마.”

“쉿!”

재혁이 붙박이장 문을 닫자마자 엄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찬아! 여기서 뭐 하니?”

찬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비밀이야.”

“비밀?”

“응!”

그 사이, 헐레벌떡 나타난 이나가 찬이를 번쩍 안았다.

“우리 찬이~ 엄마 오랜만에 봤는데 뽀뽀도 안 해 줘?”

찬에게 뽀뽀를 받은 이나는 두 사람을 서둘러 방에서 몰아냈다.

“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찬아.”

“응!”

이나의 가족들이 집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나가 나가고도, 10분이 더 지나서야 붙박이장의 문이 열렸다.

재혁은 곧장 이나의 집을 나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의 머릿속은 찬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오래된 서랍을 뒤적였다.

서랍의 마지막 칸 안에 두꺼운 사진첩이 보였다.

세월의 흔적인 쌓인 오래된 사진첩이었다. 

첫장을 열자 그의 어린시절 사진들이 보였다. 그는 게일 위에 있는 사진을 들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짙고 거친 눈썹과 움푹 팬 눈 안에 담긴 강렬한 눈빛.

어린시절 자신과 찬이는 너무나 닮은 모습이었다.

지금은 어려서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찬의 얼굴에는 분명 그의 집안 특유의 느낌이 물씬 묻어났다.

‘찬이는 팀장님의 아이가 아니에요.’

그녀의 말이 이명처럼 귓가에 울렸다.

그 말이 진실일까?

생각에 빠져 있던 그 순간, 재혁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이나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미안해요….]

[괜찮아.]

간단한 답장을 보내고 그는 다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찬의 생일과 이나와의 첫날밤 사이의 간격을 계산하고 있었다.

두 시간 사이에는 10개월이 간격이 놓여 있었다.

의심의 씨앗이 재혁의 마음 안에서 싹을 틔웠다.

***

“맛있네! 우리 찬이 많이 먹으렴~”

“응! 할머니!”

찬의 밥그릇에 고기를 얹어준 엄마가 이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얘, 넌 뭘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어?”

“어? 어….”

“빨리 먹어, 맛있다.”

“어, 엄마.”

이나의 신경은 온통 집에 두고 나온 재혁에게로 향해 있었다.

‘잘 빠져나갔을까?’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안되겠는지, 그녀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재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해요.]

[괜찮아.]

그녀가 밥도 먹지 않고 휴대 전화만 만지작거리자 엄마가 물었다.

“누구 연락인데 밥도 안 먹고 휴대 전화만 만지작거려?”

“어?”

“남자 친구?”

은근히 떠보는 엄마의 질문에 이나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남자친구는 무슨. 아니야.”

찬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나에게 물었다.

“엄마~ 남자 친구 있엉?”

그냥 하는 찬의 질문에 이나는 도둑질이라도 한 사람처럼 마음이 철렁했다.

“아니야. 찬아, 엄마 남자 친구 없어…!”

이나의 과하게 반응을 보며 엄마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얘 왜 이래? 뭐가 있는데?”

“엄마가 쓸데없는 거 물어보니까 그렇지!”

“그럼 누구랑 연락했는데?”

“상사.”

“너 모시는 그, 회사 대표?”

“으응.”

엄마는 상사가 재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 그 앞집 살던 그 팀장이라는 사람 참 잘생겼었는데. 난 그 사람 맘에 들더라.”

무심코 내뱉은 엄마의 말에 이나는 다시 뜨끔하여 젓가락질을 멈췄다.

“얘 왜 이래, 오늘? 너 이상해? 무슨 말만 하면 어색하게 행동하고?”

“뭐… 뭐가.”

“수상한데.”

“아니야. 그나저나 언제 가게?”

“아까 말했잖아. 주말 끝나고 갈 거라고.”

“집 오래 비우면 좀 그렇잖아.”

“뭐야? 너 혹시 엄마가 여기 있는 거 불편해? ”

“아니야! 그럴 리가.”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같이 올라가겠다는 말이었지…. 나도 집에 가고 싶으니까.”

“수상해~”

“밥 먹자. 찬아, 꼬기 맛있지?”

“응!”

이나가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지만, 엄마의 의심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다시 이나를 추궁했다.

“너, 솔직하게 얘기해 봐. 남자 있어?”

“아니야. 그런 거.”

“귀신을 속여라. 네가 언제 찬이한테 이렇게 대했던 적이 있든? 누구야?”

“아니라니까”

“정말 없어?”

“있으면 있다고 하지, 뭐 하러 거짓말하겠어. 정말이야. 엄마 나 좀 씻고 올게.”

이나는 석연치 않아 하는 엄마를 남기고 화장실로 향했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 무거운 죄책감이 마음에 자리 잡았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나는 손에 쥔 휴대 전화를 바라보았다.

통화 목록 제일 위로 재혁의 전화번호가 보였다.

‘기다리고 있으려나? 아까 문자 보니까 기분이 나쁜 거 같았는데….’

그녀는 재혁의 상태를 몰라 연락하는 것을 주저했다.

엄마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 얼마 없는 기회인 것 같아 이나는 용기를 내서 재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재혁은 조금 무뚝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저예요.”

“어. 어머님은?”

“쉬고 계세요.”

“저녁은 잘 먹었고?”

“네, 석쇠 구이 먹었어요. 대표님은?”

“나도 간단히.”

“잘 챙겨 드셔야죠.”

“생각해 주는 거 보니 많이 미안한가 보군?”

“미안해요.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괜찮아. 나름 재미있었으니까.”

“고마워요….”

이나는 미안함에 말끝을 흐렸다.

“주말 동안 계시겠지?”

“네.”

“그래.”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재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찬이가 날 봤어.”

“정말요?”

“숨어 있을 때 들켰어.”

“아….”

“비밀로 하는 대신 옥토넛을 사 주기로 약속했어.”

그녀의 머릿속에 아까 찬이가 보인 반응들이 생각났다.

연신 개구쟁이 웃음을 짓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그건 제가,”

“아니. 나랑 찬이랑 한 약속이니까 내가 사 줄게.”

“….”

“걱정하지 마. 직접 만나서 주지는 않을 거니까. 나가 있는 동안 사 왔으니 아침에 문 앞에 두지.”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이 목에 박힌 가시처럼 재혁의 마음에 걸렸다.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재혁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마.”

“네?”

“이 정도는 죄송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잖아, 우리.”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고민해 봤지만, 머릿속에는 한마디의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죄송….”

“또.”

“미안….”

“정말 못 말리겠어. 내가 졌어. 그만하지.”

“…알았어요.”

“난 아침 일찍 서울에 올라가 봐야 해. 주말 동안 편히 있어도 돼.”

“서울은 왜요?”

“현준이가 교통사고가 났다더군, 회장님이 급하게 부르시네. 조금 전에 연락 온 거야.”

“아….”

그런 일이었으면 이나의 업무용 핸드폰에도 연락이 와 있을 터였다.

비서라는 사람이 이런 사항도 파악하지 못했다니….

이나는 다시 목구멍까지 올라온 죄송하다는 말을 애써 삼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님 갈 때는 비행기로 모셔.”

“그렇게 안 해도,”

재혁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회사 복지야. 비행기 표까지 끊어 주고 싶지만, 그건 비서가 할 일이라서 참는 거야.”

“네… 알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고.”

“대표… 아니, 재혁 씨도요.”

“이나야.”

“네?”

“잘 자.”

“대표님두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이나는 끊긴 전화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와의 연애가 참 쉽지 않다고.

***

다음 날 아침, 문 앞에 재혁이 말한 옥토넛 장난감이 놓여 있었다.

“찬아~ 선물 왔네?”

“옥토넛!”

밤새 기대하고 있었는지, 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찬이가 달려왔다.

“우와! 엄청나게 커!”

찬은 신이 나서 장난감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찬이의 몸보다 커다란 장난감이 들어있었다.

“우와!!”

찬이 이전부터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모델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한 표정의 찬을 보니 이나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찬이 외친 소리에 나와 본 이나의 엄마는 커다란 장난감을 보고 물었다.

“웬 장난감?”

“비밀이야.”

“비밀?”

엄마는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이나는 모른 척 엄마의 눈길을 피해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 먹자. 아침~”

이나가 들어가자 엄마의 시선이 다시 찬에게 향했다.

“찬아~ 할머니한테 비밀이 어디 있어~ 누가 사 줬는데?”

은근한 할머니의 질문에 고개를 돌린 찬이 정색하며 말했다.

“할머니, 더 알려고 하지 마. 다쳐.”

그러고는 장난감을 양손으로 껴안고 뒤뚱뒤뚱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야. 쟤.”

엄마는 어이가 없어서 찬과 이나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만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

한편, 현준의 교통사고가 났던 날 밤.

“아흥….”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신음 소리가 어두운 침실 안에서 흘러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