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뜻밖의 방문
처참한 사고 현장, 차 한 대가 뒤집혀 불타고 있었다.
그 안에는 한 여인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불타는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울고 있었다.
‘엄마! 엄마.’
‘꼼짝하지 말고 여기 있어라!’
다급한 아버지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아직 차 안에 남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불길을 향해 달려갔다.
아이는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울부짖었다.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인 것 같았다.
내가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텐데….
그는 간절히 빌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차에 다가간 아버지가 문고리를 잡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사고로 찌그러진 문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 순간.
펑!
***
“헉!”
불길이 아버지를 덮치는 순간에서 재혁은 눈을 떴다.
비 오듯 흘린 땀 때문에 침대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오랜만에 꾸는 그때의 꿈,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한참을 앉아 있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는 달빛 아래 단잠을 자는 이나를 바라보았다.
“후우.”
그는 손을 뻗어 이나의 팔을 어루만졌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나의 살결이 이것이 현실임을 알게 했다.
‘뭐가 불안한 거지?’
그는 자문해 보았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 이나를 끌어안았다.
불편한지 이나가 뒤척였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놓으면 그녀를 영영 놓칠 것처럼 불안했으니까.
***
여수에서 돌아오는 길, 재혁은 아쉬운 마음에 먼 길로 돌아갔다.
이나는 이틀의 일정에 지쳤는지 보조석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관으로 향하던 날, 긴장해서 잔뜩 굳어 있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이제 좀 편해졌나 보군.”
그녀를 향해 미소 짓던 재혁은 문득 드는 생각에 표정을 굳혔다.
‘계약 연애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1년 동안은 그녀와 함께할 수 있으니,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끝이 있는 연애였다.
그녀와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 사고가 날 뻔한 이후부터, 사라졌던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갑자기 불안감에 휩쌓여 심장이 빨리 뛰거고 호흡이 가빠졌다.
좋지 못한 징조들이었다.
그리고 지난밤, 한동안 안 꾸던 꿈까지 꾸었다.
계속해서 심해진다면 그때처럼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생길지도 모른다.
재혁은 곤히 자는 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녀 때문인가? 그녀가 떠날까 봐?’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그런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나를 사랑하게 됐다.
이나에게 불안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에게 자신의 상태를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나가 알게 된다면 먼저 떠날지도 모르니까.
***
여수에서 돌아온 후의 일상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이틀이나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쌓여 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해운대구 구청장과의 미팅, 협력 업체 사장들과의 마케팅 회의, 객실 상태 점검 및 인테리어 회의, 개장 행사 준비, 공사 마무리 점검 등….
이나는 밀려 있는 일들의 순서를 정리하느라 바빴고, 재혁은 이나가 정리해 준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엘리베이터 앞에 선 재혁은 언제나 머뭇거리며 이나의 손을 잡았다.
“오늘 밤, 같이 있을까?”
매일 저녁 찾아오는 유혹이 이나는 시험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재혁을 집에 잘 들여보낼 수 있을까? 가 문제인 시험.
“오늘은 안되요.”
“어차피 내 일인데, 조금 미뤄도 돼.”
“하루 밀리면 내일 더 힘들 거예요.”
“비서로 두지 말 걸 그랬군.”
재혁의 볼멘소리에 이나가 귀엽다는 듯 말했다.
“전 이 일이 좋아요.”
이나의 말에 재혁이 아쉬운 듯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대신 주말은 시간 비워 놔.”
재혁의 말에 이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 올라가 봐야 해요. 찬이가 찾아서.”
“흠, 할 수 없지.”
“개장 끝날 때까지만 참아 줘요.”
“너무 바쁘지 마, 화나면 일 안 시킬 거니까.”
“알았어요. 내일 봐요.”
“그래, 잘 자.”
“대표님두요.”
두 사람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재혁은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현관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는 적막함이 서늘하게 깔려 있었다. 그는 한참을 자리에 서서 고민하다가, 안 되겠다는 듯 돌아섰다.
문을 나선 재혁이 이나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이나가 문을 열자마자 재혁은 다짜고짜 이나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할 말이 있어.”
재혁의 뻔한 수작에 이나가 토끼 눈을 뜨고 재혁을 바라보았다.
“뭔데요?”
“들어가서 할 말이야.”
재혁이 신발을 벗으려 하자, 이나가 그를 막았다.
“여기서 하세요.”
“신발만 벗을 거 아니야.”
“뭐라구요?”
재혁이 이나의 어깨를 잡고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주말에 못 보면 너무 오래 못 보잖아.”
“매일 보잖아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텐데.”
무언가를 원하는 그의 눈빛이 이나는 싫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한 번만.”
재혁의 애교에 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허락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혁은 성공했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자, 애교는 여기까지.”
갑자기 돌변한 목소리에 서서히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이나는 눈을 감으며 그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글쎄요….”
그리고 들린 목소리에 이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나야~ 있어?”
엄마였다.
이나가 깜짝 놀라 굳어 버린 사이, 뒤이어 찬이 그녀를 불렀다.
“엄마!!”
비상사태!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머니신가?”
“네. 어떡하죠?”
이나의 시선이 빠르게 숨을 곳을 찾았다.
그사이, 다시 한번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시간이 없었다.
그때, 이나의 눈에 방 안 붙박이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숨어요!”
재혁은 이나에게 등 떠밀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 엄마, 나가!”
이나는 멀리 있는 척 대답하고는 그의 흔적이 남았나 살펴보았다.
현관에 나뒹구는 재혁의 구두를 신발장 안에 넣어두고는 재혁이 헝클어트린 머리를 매만졌다.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뭐 해! 문 열어!”
엄마의 성화에 이나는 급하게 달려가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엄마와 찬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찬은 이나를 보자마자 그녀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찬아!”
당황한 중에도 이나는 찬이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무슨 문을 이렇게 늦게 열어~”
“엄마,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찬이가 엄마 보고 싶다고 생떼를 써서 데려왔지!”
“그랬구나…. 연락하고 오지.”
“바쁜 사람한테 연락은 무슨.”
“가게는?”
“장사가 안돼. 시장에 똥파리 한 마리 없어서, 그냥 이번 주말은 닫을 거야.”
“그랬구나.”
“야~ 이 집을 회사에서 해 줬다고?”
엄마는 이나보다 집에 관심이 있는 듯,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 어….”
“너희 회사 엄청 괜찮다, 얘. 이렇게 넓은 집인 줄 알았으면 나랑 찬이도 내려올 걸 그랬네.”
엄마의 말에 이나는 괜히 마음이 뜨끔하는 것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렇지?”
엄마는 곧장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어머. 바다도 보이고 너무 좋다, 얘.”
이나는 엄마가 재혁이 숨은 방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엄마, 저녁 먹었어?”
“그럼. 시간이 몇 신데 저녁을 안 먹었겠어? 잠깐 나와 봐. 방 좀 구경하게.”
하지만 엄마는 앞을 막는 이나를 뿌리치고 계속해서 방을 구경했다.
엄마가 재혁이 있는 곳에서 가까워질수록 이나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결국 엄마가 재혁이 숨은 방문을 열자 이나가 소리쳤다.
“엄마!”“깜짝이야. 왜?”
고민하던 이나는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아이고 배야.”
“왜 그래 배 아파?”
“어. 나 응급실 좀.”
“화장실 갔다 와. 방 좀 보고 있을 테니까.”
엄마는 집에 정신이 팔려서 이나를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이나가 방으로 따라 들어갔을 때, 엄마는 재혁이 숨어있는 붙박이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붙박이도 좋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붙박이장 문을 불쑥 열었다.
“!!”
***
재혁은 붙박이장 안에 숨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유심히 귀 기울였다.
“어머. 바다도 보이고 너무 좋다 얘.”
소리가 점점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재혁은 휴대 전화를 꺼내 안쪽을 비춰 보았다.
그의 눈에 벽 한쪽에 기대어 있는 다림판의 모습이 보였다.
저걸로 몸을 가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 사이, 이나 엄마의 목소리는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가구도 싹 해 줬나 보네?”
엄마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자 재혁은 당황했다.
금방이라도 이나의 엄마가 붙박이장 문을 열어볼 것만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붙박이도 좋네.”
다가오는 엄마의 발소리가 들렸다.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옷 사이에 몸을 깊게 파묻고 드러나 있는 다리 앞쪽을 다림판으로 가렸다.
그 순간, 붙박이장 문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재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들키지 않는 것은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안에도 넓고 좋네~”
“엄마!”
급하게 다가온 이나는 엄마를 돌려세워 등을 떠밀었다.
“사실 나 저녁 안 먹었거든, 밥 먹으러 가자…!”
“밥? 내가 오랜만에 해 줄게.”
“아니, 요 앞에 숯불구이 맛있는 데 있어. 거기 가자. 한번 사 주고 싶었어.”
“알았어, 얘! 밀지 좀 말아 봐.”
“일단 나와 봐.”
“얘가 왜 이래? 남자라도 숨겨 둔 것처럼?”
엄마와 이나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재혁의 입에서 참았던 숨이 흘러나왔다.
엄마가 방을 나간 사이 재혁은 붙박이장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 그의 다리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던 다리미판이 앞으로 기울었다.
“!!”
재혁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고, 다행히 다리미 판이 손 끝에 잡혔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혁이 고개를 들자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찬이의 모습이 보였다.
재혁은 산속에서 호랑이라도 본 것처럼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그 순간, 찬이가 말했다.
“동료 아저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