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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거친 숨소리 (13/72)

13. 거친 숨소리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낮고 작은 목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이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나는 이 밤의 설렘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문을 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철컥-

좁은 문틈 사이, 어둠 속에 서있는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 수풀에 숨어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의 눈빛처럼 그의 두 눈은 이나를 향해 강렬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가 방 안으로 들어올 것 같은 긴장감 속에 이나가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재혁의 발이 방 안쪽으로 들어왔다.

놀란 이나가 문을 닫으려고 하자, 그가 멈춰 섰다.

“거기서! 얘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방이 지저분해서….”

그러자 방안에 들어왔던 발이 뒤로 쑥 빠지며, 대신 상자 하나가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받아요.”

뭐냐는 듯 이나가 바라보자 재혁이 말했다.

“찬이 선물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점심을 먹은 후, 재혁이 잠깐 외출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찬의 선물을 산 모양이었다.

이나가 조심스레 선물을 받아 들자 재혁이 돌아섰다.

“그럼.”

‘그럼’이라는 짧은 말 한마디가 여운으로 남아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팀장님!”

재혁은 자리에 멈췄을 뿐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뒤돌아본다면 간신히 누르고 있는 욕망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감사해요.”

그녀의 말이 깃털처럼 다가와 귀를 간질였다.

재혁은 뒤돌고 싶어 하는 두 발의 충동을 꾹꾹 누른 채 다시 발걸음을 뗐다.

그때 다시 이나가 말했다.

“선물도… 그리고 이곳에 데려와 주신 것도요.”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리는 이나의 목소리가 재혁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끊어 버렸다.

재혁은 몸을 돌려 이나에게 다가섰다.

“뭐라고 했습니까?”

재혁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선물… 감사하다고….”

“아니, 그다음에 뭐라고 했냐고.”

“데려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저벅-

그가 한 발 더 다가서자, 커다란 그림자가 이나 위에 드리웠다.

“정이나, 이건 당신이 유혹한 거야.”

이나가 말을 잇기 전에, 재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읍!”

입 안 가득 들어오는 그의 숨결에 이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이성은 재혁의 강렬한 키스 앞에 모두 무릎 꿇어 버렸다.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삼킨 재혁은 그녀의 허리 뒤로 손을 감아 그녀를 자신의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녀는 중심을 잃고 그의 몸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재혁은 그녀의 허벅지를 들어 그녀를 완전히 허공에 안아 버렸다.

머리에 비상등이 켜졌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재혁과 함께 침대위로 낙하하고 있었다.

“흡.”

재혁의 육중한 몸이 그녀의 위를 고스란히 덮어 버렸다.

허리춤을 타고 그의 손이 셔츠 안으로 침범했다. 손끝이 지나가는 자리로 짜릿한 전기가 그녀의 잠들어 있던 몸을 일깨웠다.

그의 손은 저항 없는 그녀의 몸 위를 유영해 겨드랑이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녀의 몸이 재혁이라는 야수에게 침범당할 때….

갑자기 이나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띠리리리-

천둥처럼 방안을 울리는 벨소리에 잠자고 있던 두 사람의 이성이 번쩍 깨어났다.

이나가 자신의 몸을 침범하던 재혁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얼굴 사이에 종이 한 장만 한 틈을 둔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재혁의 입에서는 욕망을 가득 담은 거친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찬이예요.”

매일 밤 10시쯤 찬에게서 전화가 온다는 것을 재혁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욕망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 말에,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나 이나의 방을 나갔다.

그가 떠난 자리, 아직 그의 체온은 이나의 곁에 남아 머물렀다.

전화는 여전히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나는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뒤로 넘긴 후 전화를 받았다.

“응, 찬아.”

죄를 짓다 들킨 사람처럼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이나의 방을 나온 재혁은 자신의 방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어둠 속에 서 있자, 코끝에 그녀의 달뜬 숨결이 남아 있는 듯, 달콤한 냄새가 났다.

입술과 손끝, 그리고 망막에 맺힌 듯 선명한 그녀의 이미지가 그를 괴롭혔다.

두근두근-

아쉬움에 입이 썼지만, 이쯤에서 멈출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변했군. 강재혁.”

마지막 순간에 이성을 되찾은 자신을 탓하며 그는 자리에 누웠다.

아마 오늘 밤은 잠자리에 들 수 없을 것이다.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하니까.

***

아침 일찍 두 사람은 공항으로 향했다.

공무원과 애니카가 공항에 마중나와 있었다.

애니카와 작별 인사하며 이나는 허리를 숙여 말했다.

“<또 보자, 애니카. 다음에 볼 때는 우리 아들도 함께 보여 줄게.>”

어눌한 실력의 수화였지만, 애니카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공항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짐을 끌고 도로를 건너는데, 지나가던 택시가 갑자기 두 사람을 덮쳤다.

끼익-

과속 때문에 길 건너는 것을 못 본 모양이었다.

“엄맛!”

“<미안합니다.>”

택시 기사가 급하게 내려 사과했다.

이나가 괜찮다며 손짓하고 재혁을 바라보는데, 재혁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놀란 이나가 재혁을 부축했다.

“으.”

그는 자꾸만 돌아가려는 검은자위를 애써 붙들며 신음을 흘렸다.

“<도와주세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이나가 주위를 향해 소리치는데, 재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놀란 것뿐이야.”

재혁은 이제 좀 진정이 됐는지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온몸에는 아직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잠깐 부축 좀 해 줘. 자리에 앉게.”

이나는 재혁을 부축해 벤치에 앉았다.

재혁이 보이는 의외의 모습에 이나는 놀랐다.

죽을 위기에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경미한 교통사고에 이렇게 질겁하다니.

숨을 고른 재혁은 금세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들갑 떨어서 미안하군. 이제 가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더 걱정스러운 이나였다.

***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조금 전의 해프닝은 금세 두 사람의 머리에서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한국에 돌아간다는 두려움이었다.

이나는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다. 좋게 생각해서 둘이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고 치자. 그래서 그다음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관계가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이나는 슬며시 재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이런저런 서류들이 들려 있었다.

재혁은 비행기 안에서도 업무를 처리할 정도로 일 중독이었다.

‘내가 사랑해도 괜찮은 걸까?’

***

공항에서 집으로 향할 때는 재혁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아파트에 도착해 그들이 사는 층에 도착해서야 두 사람의 침묵이 깨졌다.

“감사… 아니, 고생하셨습니다. 팀장님.”

어제 감사하다고 했다가 키스 세례를 받은 기억이 있어서 이나는 말을 돌렸다.

재혁은 이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서서 대답했다.

“정이나 씨도 고생 많았습니다.”

4박 5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 순간 서로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나는 문득 내일 아침에는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샤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썩 좋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이나가 먼저 몸을 돌렸다.

“정이나 씨.”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자리에 멈춰 섰다.

돌아설 때마다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사랑을 원치 않는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함께해서 참 좋았습니다.”

“….”

“푹 쉬고 내일 봅시다.”

뒤에서 문소리가 들릴 때까지 이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소리가 나자, 안에서 찬이 후다닥 뛰어나왔다.

“엄마아!”

등 뒤로 재혁을 보내고 맞이한 찬의 목소리가 꿈을 깨는 자명종 소리처럼 느껴졌다.

찬은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찬아. 잘 있었어?”

“응! 엄마 보고 싶었어.”

“엄마두 우리 찬이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지.”

“헤에. 엄마~ 사랑해.”

찬의 뜬금없는 사랑 고백에 이나는 놀란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찬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똘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나는 만감이 교차하는 목소리로 찬에게 말했다.

“엄마도, 우리 찬이 사랑해.”

***

한편, 이나가 블라디보스토크 출장을 가 있는 며칠 동안 지영은 짜증이 있는 대로 나 있었다.

“아씨… 이건 또 왜 이런 거야!”

그녀가 애꿎은 마우스를 탕탕 내려치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전부 지영의 눈치를 봤다.

그녀의 짜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직원들은 그냥 모른 척해 주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콧대 높기로 유명한 지영이 계약직인 이나에게 밀렸으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러기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되는 그녀의 짜증에 보다 못한 박 과장이 지영을 불렀다.

“장지영 대리, 잠깐 와 봐요.”

“왜요?”

삐딱한 그녀의 태도에 박 과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무실인데.”

“제가 뭘요?”

“흠. 좀 조용히 하자, 이거지.”

“컴퓨터가 엉망인데 어떡해요. 그럼!”

“그래. 알았으니까, 내일 팀장님 오셨을 때 절대 티 내지 마. 알았어?”

“….”

재혁 이야기를 꺼내자, 지영의 표정이 구겨졌다.

박 과장은 결재판을 지영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 이거 좀 팀장님 오시면 직접 드려. 지금 가지 말고, 외출하셨을 때 방에 누구 들어가는 거 싫어하시니까. 청소 이모님도 못 들어가게 했어. 알았지?”

“알았어요.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영은 곧바로 재혁의 방으로 향했다.

보란 듯이 재혁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지가 갈 것이지, 왜 나한테 시키고 난리야.”

지영은 투덜거리며 재혁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들고 온 결재판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돌아섰다.

그때, 쓰레기통에 정이나의 이름이 보였다.

그녀는 뭐지 싶어 쓰레기통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들었다.

펴 보니 테스트를 보았던 시험지였다. 그리고 시험지에는 단 한 문제의 정답도 적혀 있지 않았다.

시험지를 확인한 지영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혼잣말을 했다.

“뭐야…. 설마 0점인데 데리고 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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