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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노크 소리 (12/72)

12. 노크 소리

처음에는 아주 살짝만 닿고 떨어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닿은 입술은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이나의 입술을 가볍게 한 번 머금었다. 그의 손은 이나에게 닿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못한 채로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녀를 품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재혁은 힘겹게 입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향기가 그를 따라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의 안에 잠들어 있는 짐승의 욕구가 그를 지배하려 했다.

‘정신 차려, 강재혁.’

재혁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간신히 발을 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재혁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이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복잡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어 재혁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키자 어깨 위의 담요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안에서 재혁이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

조금 전, 부드럽게 스치고 간 재혁의 입술의 여운이 그녀의 입술 위에 남아 있었다.

그때, 재혁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나는 깜짝 놀라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어찌나 세게 엎드렸던지, 이마가 부딪혀 쿵- 소리가 났다.

‘아야.’

입에서 나오는 신음을 애써 누르고 있는데, 재혁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요. 바람이라도 쐬고 옵시다.”

***

재혁과 이나는 항구에 위치한 야시장으로 향했다.

환한 불빛 아래 다양한 음식들을 파는 점포들이 바닷가를 따라 줄지어 있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이나와 재혁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무심히 걷는 듯 보였지만, 이나의 신경은 온통 손에 가 있었다.

‘길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잡고 걸읍시다.’

너무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재혁의 태도에 이나는 거절할 생각조차 못 하고 그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손을 잡은 어색함 때문인지, 아니면 야시장의 어수선함 때문인지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사람들 사이를 걸어갔다.

그러다 재혁이 멈춘 곳은 러시아 전통 만두인 펠메니를 파는 곳이었다.

“<하나 주시겠어요?>”

주문을 하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만두가 재혁의 손에 올려졌다.

그는 꼬치로 만두를 꽂아 이나에게 내밀었다.

“자.”

재혁이 입으로 내민 꼬치를 이나는 손으로 받았다.

“감사해요.”

재혁이 다른 꼬치로 만두 하나를 자신의 입에 넣었다.

이나 역시 손에든 만두를 입에 집어넣었다.

오물오물 씹고 있는데, 재혁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뭐가 묻었어요?”

이나가 묻자, 재혁이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을 닦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에 묻은 소스를 휴지로 닦아 내고는 만두 하나를 다시 입에 넣었다.

“맛있네.”

재혁의 행동이 묘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나가 꼬치로 만두를 하나 들고 입에 넣었다.

재혁에게 시선을 돌린 채로 만두를 먹고 있는데, 그의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이나는 또 입술에 묻었나 싶어 재빠르게 소매로 입술을 문질렀다.

그러자 재혁이 말했다.

“그냥 본 거야. 안 묻었어.”

이나는 무안함에 손을 내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알 수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것도 먹어볼까?”

“좋아요.”

그렇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었다.

***

이른 아침, 재혁과 이나는 공항에 나가 있었다.

요 며칠과 다르게, 오늘 아침은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불어 제법 날이 쌀쌀했다.

며칠 동안의 날씨를 생각하고 얇게 입고 나온 이나는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재혁이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이나에게 건넸다.

“더워서 그런데 좀 들어 주지.”

이나가 뭘 이런 것까지 시키나 하는 표정으로 받아 들자, 재혁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추우면 입어도 되고.”

어젯밤 이후, 재혁의 태도가 묘하게 변해 있었다.

말끝을 사포로 문지른 거처럼 부드럽고 미끈하다고나 할까?

츤데래 같은 그의 모습에 이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카디건을 입었다.

잠시 후,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올라왔고, 차분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를 나왔다.

그녀를 발견한 재혁이 성큼 다가가 말을 걸었다.

“김미숙 여사님?”

여자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해요.”

“먼저 호텔에서 짐을 푸시죠.”

“아니요. 그 집에 먼저 가 보고 싶네요.”

“피곤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재혁과 이나는 섭외해 둔 택시에 올랐다.

노인의 집으로 향하는 길, 미숙은 상념에 잠긴 듯 멍한 표정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택시에서 내려 골목 안 작은 집을 바라보는 미숙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말없이 노인의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왔어야 할 곳. 80년의 세월을 지나 손녀인 그녀가 온 것이다.

미숙이 마음을 다잡은 듯 고개를 끄덕이자 재혁이 노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문을 두드리기가 무섭게 즉각적으로 반응이 왔다.

쿵쾅 소리가 나더니 문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꺼져! 똥물 뒤집어쓰고 싶지 않으면!>”

재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말했다.

“<어르신, 만나 보실 분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열린 문으로 펄펄 끓는 주전자를 든 노인이 나왔다.

노인은 금방이라도 이나 일행을 향해 물을 끼얹을 듯 위협하며 말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

그때 미숙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한글로 러시아말을 적어놓은 종이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종이를 보며 어설픈 러시아어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상혁 중사의 손녀…입니다.>”

미숙의 말에 노인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커졌다.

미숙은 주머니에서 녹이 슬어 쌔까맣게 변해 버린 쇳조각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노인은 주전자를 옆에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쇳조각을 받아 들었다.

부식되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쇳조각에는 분명 갈매기 모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미숙이 말했다.

“할아버지의 군번줄이에요.”

옆에서 보고 있던 이나가 미숙의 말을 재빠르게 번역하자, 노인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80년이나 걸리셨습니다…. 김 중사님.>”

노인의 눈에서는 마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네 사람은 노인의 집 거실에 둘러앉아 있었다.

“<꼭 오실 거라 믿고 있었어…. 오시면 꼭 같이 조국에 돌아가고 싶었네…. 그런데 80년을 기다렸더니 이렇게 오시는구만….>”

노인은 미숙이 건네준 쇠붙이를 손에 꼭 쥐며 말했다.

80년의 세월보다 소중했던 동료애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제 여한은 없네…. 광복한 내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구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어르신. 그리고 이 집. 보존해서 많은 사람에게 독립의 의지를 전달하겠습니다.>”

“<고맙네…. 고마우이….>”

그렇게 블라디보스톡 부지 매입이 마무리 되었다.

***

노인의 집을 나서는 두 사람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충만하게 차 있었다.

두 사람은 상념에 빠진 채로 한동안 자리에 서 있었다.

이나가 재혁에게 말했다.

“감사해요.”

“뭐가 말입니까.”

“이 집을 보존해 주신 거요.”

노인의 집이 독립군의 은신처였다는 사실을 알고, 이나는 재혁에게 집을 보존하자는 제안을 했다.

‘1층 로비 안에 집의 원형을 보존하는 거예요.’

그럴듯한 제안이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호텔 로비의 크기가 기존 계획보다 2배는 높고 넓혀야 하는 일이어서, 당초 계획했던 예산을 초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재혁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강 회장에게 다이렉트로 보고해서 허락을 받아 냈다.

이번 토지 매입건은 이나의 안목과 재혁의 결단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이나의 말에 재혁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이나 씨의 계획이 좋았습니다. 안 그래도 우리 호텔만의 아이덴티티를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두 사람의 대화 속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배고프군요.”

“네, 정말로요.”

“킹크랩 어떻습니까. 축하하는 의미로 내가 사겠습니다.”

재혁의 말에 이나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재혁이 이나를 데려간 곳은 항구에 정박한 크루즈선의 선상 레스토랑이었다.

호화스러운 레스토랑의 모습을 보며 이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너무 과한 거 같아요.”

재혁은 이나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조금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정이나 씨가 오늘 성사시킨 계약이 얼마짜리인 줄 압니까? 이 정도 먹을 자격 되니까 부담 갖지 마요. 그리고 나 정이나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부자입니다.”

조금 기다리자 웨이터가 다가와서 메뉴판을 내밀었다.

재혁은 유창한 러시아어로 음식을 시켰다.

웨이터를 보내고 재혁이 이나를 보는데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낭만적인 주황색 조명 아래, 머릿결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이나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여자의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잃어버렸다.

이나는 재혁의 시선을 느끼고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

재혁은 괜히 머쓱한 마음에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대화가 끊기자 조금은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때마침 웨이터가 간단한 애피타이저와 와인을 들고 나타났다.

와인이 앞에 놓이자 재혁이 잔을 들며 말했다.

“우리의 성공을 축하하며!”

이나 역시 기분 좋게 잔을 들어 그의 축사를 따라 했다.

“우리의 성공을 축하하며!”

축사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있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이 눈을 마주칠 때처럼 애틋하고 수줍은 미소였다.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곧바로 호텔로 돌아왔다.

객식로 들어온 두 사람은 거실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무언가 원하고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망설임에 서로 주저하는 것이 느껴졌다.

손과 손, 몸과 몸 사이에 알 수 없는 실 같은 것이 있어서 차마 각자의 방으로 들어갈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럼, 잘 자요.”

재혁이 꺼낸 말은 그가 하고 싶은 말과 정 반대의 말이었다.

이나 역시 그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웃으며 모른척했다.

“네, 팀장님두요.”

이나가 못내 아쉬운 듯 돌아서는데, 갑자기 재혁이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

“네?”

“그게,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정이나 씨.”

“팀장님두요.”

“그럼.”

돌아서는 이나의 뒷모습을 보며, 재혁은 그녀를 잡으려는 손을 있는 힘을 다해 막았다.

그가 자신을 막아내는 동안 이나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달칵-

여닫는 문의 속도가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

방 안으로 들어간 이나는 문을 등지고 섰다.

어둠 속에 뛰고 있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울렁거리는 설렘 속에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간단한 와인 정도는 함께 해도 되지 않을까?

아쉬움이 미련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괴롭힐 때, 등 뒤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

그리고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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