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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젯밤 (3/72)

3. 어젯밤

현준을 노려보는 재혁의 눈빛에 방안에 있는 모두는 늑대 앞의 토끼처럼 쥐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가 재혁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파티의 주인공 유리는 과거 재혁의 약혼녀였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재혁이 혹시 난리 치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숨죽였다.

아니나 다를까, 재혁이 현준을 향해 다가왔다.

“헉.”

그가 테이블 위로 올라갔을 때 주위에서는 놀람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재혁은 현준의 앞까지 다가와 그를 내려다 보았다.

현준은 승자의 우월함을 드러내려는 듯 거만하게 웃으며 재혁의 눈빛을 받아냈다.

금방이라도 사고가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순간.

갑자기 재혁이 품 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더니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웃어.”

“뭐?”

“웃으라고.”

재혁은 현준의 앞에 대고 자신의 얼굴이 나오도록 셀카를 찍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현준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지만 재혁은 대꾸 없이 사진을 확인하더니 만족하다는 듯 다시 입구로 향했다.

테이블에서 내려온 재혁은 까먹은 말이 떠올랐는지 문을 잡고 서서 말했다.

“약혼 축하한다. 강현준.”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재혁이 나간 자리.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현준이 잔뜩 기분이 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지 까 봐.”

선물을 열자, 싸구려 러시아 인형이 현준을 비웃듯 미소 짓고 있었다.

***

방을 나온 재혁은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순전히 그의 할아버지인 강 회장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촌이라도, 우애는 있게 지내야지.’

재혁은 방금 찍은 셀카를 강 회장에게 전송했다.

[파티 참석했습니다.]

숙제를 끝낸 듯 홀가분한 기분으로 복도를 도는데, 마침 복도로 들어오던 여자와 부딪쳤다.

“앗.”

충격으로 재혁의 휴대 전화가 바닥에 떨어졌다.

재혁과 여자는 동시에 휴대 전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죄송합니….”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여자는 얼음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오… 오빠.”

유리였다.

이에 반해, 재혁은 유리를 확인하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세간에는 재혁이 유리를 빼앗겼다는 소문이 났지만,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유리는 재혁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 사과했다.

“미안…. 내가.”

“괜찮아.”

재혁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유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왔어?”

“사진 찍으러.”

“뭐?”

“회장님께 보내 드려야 하거든.”

“….”

“간다.”

쿨하게 돌아서는 재혁의 모습에, 유리는 그의 자존심을 긁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넌 자존심도 없니? 동생한테 네 여자 뺏겼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어. 약혼 축하한다.”

재혁은 녹음해 놓은 듯,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작은 틈 하나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그의 뒷모습에, 유리는 재혁과 헤어지던 때가 떠올랐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노력은 해 볼게.’

아무리 정략적인 만남이었지만, 정말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렇게 완벽한 남자만 아니었다면 3년이나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냉대에 지쳐 갈 때쯤, 현준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유리는 현준의 앙큼한 수작에 일부러 넘어가 주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저 오만한 남자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재혁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 헤어져서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상처를 입은 것은 유리 자신이었다.

어느덧 계단을 내려가는 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리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아프게 만들어 줄 거야. 강재혁.’

유리와 헤어진 재혁은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단 한시도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계단의 난간 아래로 광란의 밤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무심하게 발걸음을 재촉해 입구가 있는 지하 1층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입구 쪽으로 몸을 들이밀며 클럽을 빠져나가려는 그때, 스테이지에서 소동이 일었다.

그의 발목을 잡아끈 것은 그다음에 나온 목소리였다.

“이거 놔!”

***

짝-

음악 소리가 요란한 중에도 뺨을 때리는 소리는 강렬하게 스테이지를 울렸다.

이나는 등 뒤에 바짝 붙은 남자를 흘깃 노려보았다.

전형적인 오피스룩에 풀어 헤친 단추, 그리고 도발적으로 머리를 묶어 올린 모습은 평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들러붙지 말라고 했잖아. 싫다고.”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보고 있던 남자는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며 이나를 향해 한 발 다가왔다.

“미쳤냐? 추근대긴 누가 추근대! 뒤에서 춤만 췄는데!”

“역겨워….”

이나가 혐오감에 가득 찬 말을 내뱉자 남자의 눈이 뒤집혔다.

“야, 뭐라고 했냐? 역겹다고? 여기까지 왔으면 적당히 그런 거 아니야?! 어디서 깨끗한 척이야?!!”

남자가 이나의 팔을 잡아끌며 위협했다.

“더러운 손 안 치워?!”

“뭐? 더러워? 그래, 그럼 어디 더러운 손에 한번 맞아 봐라!”

말과 동시에 남자의 손이 이나를 향해 날아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으아아!!”

비명은 이나가 아닌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느새 다가온 재혁이 남자의 손을 잡고 밀어 버린 것이다.

우당탕 소리가 나며 남자가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재혁이 팀장으로 부임한 지 이제 고작 한 달.

지난 한 달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이나가 위험에 처한 때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 뭐야!?”

황당하다는 듯한 남자의 말에 재혁의 싸늘한 눈빛이 쏟아졌다.

재혁이 대답했다.

“나, 직장 상사.”

그 위로 재혁의 손을 떠난 명함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병원비 청구하든지.”

***

“감사했습니다. 팀장님.”

“집에 혼자 갈 수 있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이나는 재혁에게 철벽을 치며 돌아섰다. 도움을 받았지만, 그 이상은 다가오지 말라는 노골적인 태도였다.

돌아서는 이나를 바라보며 재혁은 불쑥 화가 났다. 무엇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오히려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은 사절이었다.

한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재혁은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차가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재혁의 두 눈은 이나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

차창으로 이나의 모습이 겹쳐지며 지나갈 때, 재혁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재혁은 이나가 내려오는 길 앞을 막아섰다.

재혁을 발견한 이나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그냥 타지. 늦었는데.”

“괜찮습니다. 그냥 지하철,”

“타라면 타. 혼자 보낼 생각 없으니까.”

“….”

이나는 대답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재혁의 눈빛이 이나의 마음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잊고 싶었지만, 잊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눈빛에 이나의 마음이 반응한 걸까? 일탈의 욕구가 물밀듯이 일었다.

제주도에 간 찬은 내일이면 돌아온다. 6년 만의 휴가, 내일이면 그녀는 다시 엄마 정이나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나의 입에서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 말이 흘러나왔다.

“나랑 잘래요?”

그 말 한마디가 재혁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

아침 햇살에 재즈 선율이 섞여 있는 듯 맑은 아침.

검은 벤츠 뒷좌석에 재혁과 강 회장이 앉아 있었다.

“꼭 나가 살아야겠어?”

서운함이 가득 담긴 강 회장의 말에 재혁은 기계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무뚝뚝한 재혁의 대답이 강 회장은 못내 서운한 모양인지 따지듯 재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큰 집 놔두고 뭐 하러 나가 산다는 거야.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면 내가 옆에 별채라도 지어 줄 테니. 그러다 예전처럼 쇼크라도 오면 누가 널 봐줘?!”

“다 끝난 얘기로 아는데요.”

“김 박사 소견서는?”

강 회장의 질문에 재혁이 움찔했다.

“필요 없어요. 저 다 나았어요.”

“너 이 자식! 낫긴 뭐가 다 나아! 저번에도!”

재혁은 듣기 싫다는 듯 대답했다.

“집 구했습니다.”

“뭐? 언제?”

“어제요.” 

“으잉! 고집 센 건 지 애비 쏙 빼닮았어.”

강 회장은 삐졌는지 고개를 휙 돌렸다.

회사에서는 누구도 그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지만, 재혁 앞에서 그는 손주를 애지중지하는 한 명의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영원히 할아버지와 함께 살 수는 없잖아요.”

재혁이 소용없다는 듯 말하자 강 회장은 고개를 돌린 채로 툴툴댔다.

“누가 뭐라더냐.”

첫째 아들 태수를 교통사고로 잃은 후, 강 회장은 재혁을 아들처럼 여기며 애지중지 키워왔다.

그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재혁은 여태까지 강 회장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평생 같이 살 수는 없는 일. 재혁은 이번만큼은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강 회장을 삐진 상태로 그냥 두었다.

“대신 올해 안에 결혼이나 해. 약속한 거 잊지 말거라.”

강 회장의 말에, 이번에는 재혁이 움찔했다. 유리와 헤어지며 했던 약속 때문에, 결혼은 재혁의 약점이 되어 있었다.

‘유리와 헤어지려거든 올해 안에 결혼해!’

재혁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강 회장이 미간을 좁히며 재혁을 노려보았다.

“아니, 왜 대답이 없어? 또 말만 하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크으.”

그때, 강 회장이 갑자기 심장을 움켜쥐었다. 놀란 재혁이 강 회장을 부축하며 물었다.

“또 안 좋으세요?”

“으… 가끔 이래. 잠깐 있으면 괜찮아져.”

“병원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 봤어. 별거 아니래. 어쨌든, 다음 달에 있을 현준이 약혼식 때까지 결혼할 사람 데려와. 알겠어?”

“다음 달은 무리죠.”

“안 데려오면 선이라도 봐!”

더 이상 강 회장을 흥분시켜서 좋을 것이 없어 보였다.

재혁은 일단 지금 이 상황을 넘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대답했다.

“네.”

***

아침부터 지영이 이나에게 다가왔다.

“이나 씨, 어제 내가 번역 부탁한 거 다 했어요?”

전날 그렇게 뒤에서 험담해 놓고 부탁한 일을 물어보는 꼴이라니, 정말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나가 대답했다.

“아니요. 바쁜 일이 있어서요. 앞부분밖에 못 했네요.”

“아니. 내가 오늘까지 해 달라고 했잖아! 아씨, 오늘 오후 미팅 때 그거 들고 들어가야 하는데, 대체 어제 하루 종일 뭐 한 거야?”

이나는 갑작스러운 지영의 짜증이 당황스러웠다.

“그런 일이라면 직접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뭐야? 정이나 씨, 지금 내 말에 토 다는 거야?”

“토 다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반말하지 마시죠.”

“어이없어. 됐으니까 내놔!”

두 사람의 언쟁에 사무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때, 지영의 뒤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헉! 팀장님!”

재혁은 지영이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에 들린 기획서를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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