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없던 일로 하지는 맙시다. (1/72)

1. 없던 일로 하지는 맙시다.

보글 보글 보글 – 탁.

커피포트의 요란한 소리가 그치자, 벽 너머로 여직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게이라며?”

“에이, 아닐걸?”

“이번에 파혼한 거… 게이라서 그랬다는 소문이 있어.”

“설마… 3년이나 만났는데?”

“그래, 네 말대로 3년이나 만났는데 왜 헤어졌겠어. 혼담까지 오고 간 사이일 텐데.”

“생각해 보면 게이처럼 생기긴 했어?”

“그래, 왜 게이들이 유독 잘생겼잖아. 3년 연애도, 자기가 게이인 걸 숨기려고 그런 거 아닐까?”

“정말?”

들리는 말에 이나는 문득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도화의 기운이 은은하게 베어 촉촉한 눈매와 날렵하고 높은 콧날. 깎은 듯 날렵한 턱선을 따라 이어지는 쭉 뻗은 어깨, 190에 가까운 훤칠한 키. 그리고 완벽한 슈트발을 자랑하는 모델 같은 몸매까지.

그녀의 상상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어젯밤의 일을 다시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어둠 속에서 손끝에 느껴지던 딱딱한 가슴 근육과 자신을 힘차게 끌어안을 때 꿈틀거리던 팔 근육…. 그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이래. 정이나.’

그 사이, 벽 너머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역시 재벌들은 평범하게는 못 사나 봐. 그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왜 하필 게이일까?”

“아버지가 없잖아. 이래서 가정 교육이 중요한 거야.”

“헐, 팀장님 아버지가 없어? 이혼?”

“아니… 사고, 어렸을 때. 그래서 강 회장님이 애지중지하면서 품 안의 자식으로 키웠대.”

“헐, 그런 사람이 왜 일개 팀장으로?”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후계자 수업.”

“아… 그런 거야?”

“야, 아무리 잘생기고 잘났어도 직원이, 그것도 일개 팀장이 회사 대표 모델 하는 게 말이 되냐?”

“그치…. CF에서 팀장님 정말 잘생겼던데~”

“그래서 팀장님한테 잘 보여야 해. 완전 성공으로 가는 동아줄이라니까.”

“너 이번 미팅 팀장님하고 같이 가잖아. 부럽다….”

“뭐. 다 능력 아니겠어?”

“그런데 말이야, 정이나 그 여자가 팀장님한테 꼬리 치는 거 같더라?”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이나는 행동을 멈췄다.

“진짜? 대박, 그 나이에?”

“그러니까 말이야. 스물여덟이라는데 아직 계약직이고, 앞이 막막하니까 남자라도 잡으려는 거 아니겠어?  이력서 보니까 연기 전공했던데, 아직 주인공 병에서 못 벗어 난거지.”

“하긴, 저번에 보니까 회사에서 블라우스 단추 두 개씩 푸르고 다니더라고. 완전 꼴불견이야.”

이나는 손을 들어 블라우스의 단추를 확인했다. 단추는 정갈하게 잠겨 있었다.

“여기가 회사지, 클럽이야? 맨날 타이트한 스커트만 입고. 외국어 좀 한다고 지가 꼭 정직원인 줄 알아. 남자들이 문제야. 직원이고 팀장이고, 좀 이쁘장하면 특별 대우 하니까, 하여간 짜증 나.”

“정이나가 이뻐? 내 눈에는 그냥 싸 보여.”

“그러니까 남자들한테 먹히지. 남자들은 싼 여자 좋아하니까. 불쌍해. 그게 이쁜 줄 알고 볼 때마다 내가 코디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라니까.”

“오호호호.”

“그런데 강 팀장이 거들떠나 보겠어? 재벌 3세가, 뭐가 모자라서 계약직한테?”

“하긴, 나 같아도 싫겠다.”

그때, 그 앞을 지나가던 박과장이 두 사람이 있는 자료실을 향해 소리쳤다.

“두 사람, 점심시간 끝났어!”

“어멋! 예, 과장님!”

“자료 좀 찾을 게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과장의 호통에 여직원들은 탕비실 앞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나는 블라우스의 두 번째 단추를 풀었다.

톡-

깊게 파인 블라우스 사이로 그녀의 여리고 새하얀 몸매가 도드라졌다.

커피가 완성되자, 이나는 쟁반을 들고 탕비실 밖으로 향했다.

사무실을 가로질러 간 이나는 바이어와 회의 중인 박 과장의 자리로 다가가 커피를 내려놓았다.

“어, 이나 씨, 고마워. 내가 타도 되는데.”

과장의 인사에 이나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업무를 돕는 게 제 일이니까요.”

“그런데 이나 씨…. 이런 말 조금 그런데, 단추가 좀 많이 풀렸다.”

부장의 말에 주위 남자 직원들의 시선이 은근히 이나에게 향했다.

이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자들이 싼 여자를 좋아한다길래요.”

말을 마친 이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까 뒷담화를 하던 장지영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몰래 인터넷 쇼핑을 하고 있던 지영은 흠칫 놀라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박 과장은 무슨 말인지 몰라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나가 돌아서자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강 팀장님이 이나 씨 찾던데. 한번 가 봐요.”

“네, 알겠습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이나는 등 뒤로 들리는 장지영의 목소리를 일별하고 강 팀장의 방으로 향했다.

사무실을 가로질러 팀장실 문을 노크 하려던 이나는 손을 멈췄다.

“….”

아까 풀었던 단추가 신경 쓰였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블라우스 단추를 잠갔다. 그리고 살짝 말려 올라간 스커트 끝단을 잡아당겨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똑똑-

“들어오시죠.”

남성 호르몬이 풍부한 남자의 증거라는 동굴형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일에 집중하고 있는 강 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기획조정실 제1팀장 강재혁.

창문에서 사선으로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이 그의 높은 콧대에 부딪혀 반대편의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서류에 몰두하던 재혁은 힐끔 고개를 들었다.

이나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사무적인 어투로 물었다.

“부르셨습니까.”

“앉아요.”

“급한 일 아니시면 이대로 듣겠습니다. 오전에 처리해야 될 일이 밀려서요.”

재혁은 이나의 말을 듣지도 않고 다시 말했다.

“앉아요.”

이나는 하는 수 없이 재혁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식사했습니까?”

“네.”

“그렇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어제 일은,”

이나가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재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없던 일로 하면 좋겠습니다.”

이나의 담담한 말에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6년 전의 아픔 때문이었을까? 재혁은 머뭇머뭇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 방 먹었네.’

하지만 당황한 것을 들킬 수는 없는 일. 재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 말 하려고 했습니다. 오해하지 말라고.”

말 끝에 보인 당황한 기색에 재혁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이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네.”

“잘됐군요. 나가 봐요. 나가는 길에 이 결재 서류 좀 부회장님 비서실에 갖다주고.”

재혁이 무심하게 넘긴 서류를 이나가 공손하게 받아 들었다.

“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이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탁-

가벼운 소리로 문이 닫히자, 재혁의 방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는 의자에 몸을 묻고 조금 전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어이가 없었다.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을 하기 위해 그녀를 불렀는데, 선수를 빼앗기다니…. 떨칠 수 없는 패배감에 재혁은 인상을 구겼다.

이번에도 당해 버렸다. 6년 전과 같이….

‘결국 또 이런 식인가?’

어젯밤 일 때문에 작은 기대를 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문득, 어젯밤 일이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어둠 속, 숨과 숨이 닿는 거리에서 보았던 그녀의 얼굴.

둥글게 솟은 이마와 커다란 눈. 날카롭게 뻗은 콧날과 생기 있어 보이는 작은 입술. 그리고 오른쪽 목덜미에 있는 작은 반점.

어젯밤 그는 그 작은 앵두를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손끝에 닿았던 가슴의 감촉이 되살아나자 묘한 흥분이 일었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는 자신을 보며 그는 한심함에 실소했다. 그저 하룻밤의 유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두는 것은 금물이다.

“그래도, 가벼운 정도는 괜찮겠지.”

혼잣말인지 다짐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그는 다시 책상 위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하루는 순식간에 흘러갔다.

이나는 6시가 되자마자 남은 일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장지영이 부탁한 기획서 번역이 남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제주도에 갔던 엄마가 돌아오는 날이었고, 마중을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 일어나야만 했다.

“퇴근하겠습니다.”

누구도 듣지 않는 퇴근 인사를 하며 이나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는 서둘러 엘리베이터 앞으로 뛰어갔다.

퇴근 시간이라, 한 번 놓치면 족히 10분은 가만히 서 있어야만 했다.

다급한 마음으로 복도를 도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이나는 다급하게 달려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띠-

인원 초과.

“아, 뭐야….”

사람들의 눈총이 쏟아졌다.

이나는 하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약속시간에 늦을 수 있다는 생각에 초조하게 닫힌 문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 이나의 옆으로 다가섰다.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던 이나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남자의 모습에 깜짝 고개를 돌렸다.

재혁이었다.

“뭘 그렇게 봅니까?”

“아니요.”

이나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한번 사람들을 내려보낸 탓인지, 엘리베이터로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퇴근합니까.”

“네.”

“그렇군요.”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사람은 어색하게 다른 곳을 보며 서 있었다.

이나가 하염없이 엘리베이터 숫자를 바라볼 때 마침 문이 열렸다.

재혁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이나는 그와 단둘이 타는 것이 부담스러워 머뭇거렸다.

“안 탑니까?”

“놓고 온 게 있어서요. 먼저 가세요.”

“그럼, 기다리죠.”

“네?”

재혁은 열림 버튼을 굳게 누른 채로 말없이 이나를 바라보았다. 문은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요란하게 삐- 소리를 냈다.

난처한 상황. 이나는 다급하게 주변의 눈치를 살폈지만, 안타깝게 엘리베이터로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에도 엘리베이터는 계속해서 삐- 소리를 냈다.

이나는 하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뭘 놓고 왔다면서요.”

재혁의 말에 이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알면서 묻는 건가?’

그녀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내일 가져가도 돼요.”

“그렇군요. 그런데 정이나 씨.”

“네.”

“생각해 봤는데, 아예 없던 일로 하지는 맙시다.”

“네?”

재혁의 말투는 너무나 평온해서, 마치 업무 지시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게 무슨 말이냐면,”

재혁이 말하는 순간. 

끼익- 쿠쿵-

굉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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