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왜 너만?
“아직 시간 좀 있어요. 너무 조급히 안 구셔도 다 마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걱정 마세요.”
씩씩해 보이는 다리엘을 보자, 문득 궁금해졌다.
정도는 다를지언정, 다리엘도 강제 추행을 당하는 상황에 처했었는데 그녀에게서는 어떤 힘든 기색도 찾기 힘들었다.
“너는 괜찮은 거니?”
“네?”
“전에… 연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잖아.”
“아, 저야 뭐 처음부터 그럴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놀라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결혼 전 사이나에게 했던 행동 패턴이 있다 보니, 대놓고 수작을 부릴 거라는 것을 알고 연기 체제에 들어간 거긴 했다.
“웨슬리 단장님이랑 루퍼트 경이 근처에 있는 것도 다 알고 있었고요. 각하께서도 어딘가 계셨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정확한 타이밍이 되기 전까지는 황자의 우악스러움을 홀로 감당해야 했을 텐데.
“오히려 가장 무서웠을 때는 그때가 아니에요.”
다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2층에서 떨어질 때가 제일 무서웠어요.”
“아….”
황자야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지만, 다리엘은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비명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어휴, 받아주실 걸 알면서도 떨어질 때 감각이 너무 선명해서 이를 악물었지 뭐예요.”
그때 그 감각을 떠올렸는지 다리엘이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외에는 뭐.”
정말 괜찮다는 듯, 다리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크게 웃었다.
“다시 그분을 뵐 일만 없으면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아요.”
단순명료한 성격이라 그런지 털어내는 것도 빠른 듯했다.
‘하긴.’
사이나도 지금은 괜찮아졌다.
콘스탄틴 덕분에.
그리고 다리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났더니 더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
다시 생기지 않을 일이기도 하고.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이야.’
어쩌면 초대장을 보았을 때, 또다시 그런 사건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전과는 달라. 지금은 내게 욜리도 있고, 콘스탄틴도 있는걸.’
루퍼트도 있고, 가족들이 어떤 상황에서이라도 그녀를 우선할 것도 이제는 안다.
멋모르고 당했던 과거와는 다를 것이다. 아니, 달라야 하는 게 당연하다.
‘가면무도회라….’
그것도 황실 주도의 가면무도회.
주최 측은 달라졌으나,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뭔가 사건이 일어나겠지.’
적당한 사건이 아니라, 전처럼 추악하고 끔찍한 종류의, 그런 사건이 터질 것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 벌어지는 연회가 분명하니.
‘하지만 이번 피해자는 내가 아닐 거야.’
사이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 *
까르르.
들어가기 전부터 낭랑한 웃음소리가 문을 넘어섰다.
뭔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듣기만 해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소리에 사이나의 입가가 끌어 올려졌다.
사이나는 오늘 작게 티 파티를 열었다.
정식 티 파티는 아니고, 친우들과 함께하는 수다 타임에 가깝기는 하지만.
황도에 온 이후로 진득하게 앉아 교류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크레이머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를 보고 싶어 하기도 해서, 사이나가 주최자가 되었다.
“안녕.”
“어머, 공작부인 드시나이까.”
약간 늦은 그녀를 보고는 놀리듯 키얼스틴이 말했다.
“늦어서 미안. 막판에 드레스를 갈아입을 일이 생겨서.”
“어머어머, 대체 왜?”
“혹시 막 구겨졌다거나?”
“누가 급하게 찢어버렸다거나?”
“…….”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대놓고 놀리는 말들에 사이나의 볼이 약간 달아올랐다.
“그런 거 아니야. 찻물을 좀 엎어서 그래.”
“아니, 곧 차 마시러 나올 타이밍에 굳이 차를 마셨다고?”
“흐응, 변명을 들으니 더 수상하다.”
자신이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인지라 사이나는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으나, 화제를 돌리기 위해 시종을 향해 명령했다.
“여기, 식은 차를 교체하고 디저트들도 새로 들이렴.”
“네, 마님.”
간만에 사인방을 꽉 채운 모임의 장이 시작되었다.
“와, 근데 여기 너무 좋다.”
“진짜 너무 예뻐.”
“나도 이곳을 발견하고 놀랐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소에 관한 화제가 나왔다.
전에 크레이머 타운 하우스를 집사로부터 안내 받는 동안 이 공간을 발견하고 사이나 역시 꽤 놀랐다.
후원 중에서 침엽수원에 있는 별관 건물인데, 온실과 건물의 중간쯤 되는 구조물이었다.
삼면은 벽이지만 한쪽과 천장은 유리 구조물로 되어 있어서, 훈훈한 실내임에도 마치 바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곳이었다.
보자마자 ‘아, 이곳은 친우들과 함께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손님이야. 환영해.”
“영광이네, 영광이야.”
“우리가 아예 크레이머가의 타운 하우스를 방문한 첫 손님 아니야?”
“응. 그것도 맞아.”
특혜 같은 기분에 다들 킥킥 웃었다.
좋은 사람과 보내는 좋은 시간은 언제나 기쁜 일이다.
“아, 다들 이번에 황성에서 온 초대장 받았어?”
“어, 가면무도회?”
화제가 전환되며 가면무도회 초대장 이야기가 나왔다.
사이나가 받은 만큼, 다른 가문에도 도착한 모양이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황실에서 가면무도회를 주최하다니.”
가면무도회는 보통 심야 무도회에 속했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그곳에 묻고 온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을 정도로 자극적이고 난잡한 연회가 바로 가면무도회다.
그렇다 해도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라, 데뷔탕트 볼을 앞둔 어린 영애들이 가장 참석하고 싶어 하는 종류의 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실에서 가면무도회라니.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당연한 평이었다. 황실에서 여는 종류의 연회라고 하기엔 상당히 저급하니까. 마땅히 갑론을박이 많았다.
“황실인데 주최가 어느 궁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그건 왜 그런 걸까?”
“근데 사실 뻔한 거 아니야? 황녀 전하나 황후 폐하께서 가면무도회를 열리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
사이나가 의문이었던 것이 친우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왜 보편 인장으로 초대장이 발송되었는지 궁금해했다.
“친필 초대장이 아니야?”
그런데 그 와중에 플로리아가 이상한 질문을 했다.
“친필이면 보편 인장을 안 쓰겠지?”
“어, 나는… 친필로 왔는데?”
“뭐?”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친필로 왔다고? 누구한테?”
“헤베타?”
“…….”
헤베타가 플로리아에게만 친필로 초대장을 보냈다고?
에비앙이 어리둥절하더니 물었다.
“플로리아 외에 친필 서한 받으신 분?”
“…….”
아무도 없었다.
“그래. 황녀 전하도, 황후 폐하도 아니니 당연히 황자궁 쪽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세 쌍의 시선이 플로리아를 향했다.
“왜 너만?”
헤베타로부터 유일하게 친필 초대장을 받은 것이 부러워 추궁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들 이해가 가지 않을 뿐.
“모르겠어. 그렇지 않아도 사이나에게 물을 게 있었는데.”
“응? 나?”
“너 한때 그 헤베타랑 알고 지냈잖아.”
“응.”
“친해?”
“음. 친하다고 말하긴 힘들 것 같은데.”
“그래? 어떤 사람이야?”
“…왜?”
“요즘 자꾸 친한 척을 해대는데, 뭔가 좀 이상해서.”
사이나는 외출을 자제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외부 활동을 하며 요즘 유독 자주 마주친 모양이다.
“…그러게. 좀 이상하네.”
엘리자베스는 목적 없이 그렇게 행동하는 아이가 아니다.
사이나에게 친해지기 위해 하녀까지 매수할 정도로 계획적인 성격이 단순하게 친교를 위해 플로리아에게 접근했을 리는 없었다.
“꼬-옥 참석해달라며 무진장 정성 들여서 썼던데.”
그러니 더욱더 수상하다.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뭔가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키얼스틴이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런 타입이잖아. 그 헤베타는. 뭐랄까, 이득이나 목적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타입.”
몇 년을 곁에 있어도 사이나는 잘 몰랐는데, 키얼스틴은 별로 접점도 없는데도 알아채다니, 새삼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뭐? 그럼… 나 어떻게 해? 참석 말까?”
헤베타가 왜 친하게 굴며 가면무도회에 오라는 것인지 모르니, 다들 뭐라 결론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타깃이 내가 아니라 플로리아인가?’
하지만 왜? 그때와 달리 많은 것들이 달라져서?
아, 그러고 보니 사이나는 전생에 엘리자베스가 사이나를 미워했고 그녀에게 해를 끼쳤다는 것은 알아도,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내가 미혼이 아니라서 플로리아가 타깃이 된 건가?’
그럼 설마, 조지 홀랜더가 이번엔 플로리아를 노리고 있다고?
그 자식이? 감히 공녀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사이나는 머리가 뜨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이나?”
그 노기가 겉으로 드러났는지, 플로리아가 의문 띤 표정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아.”
“뭐야, 왜 그래?”
“아니, 잠시…….”
그녀가 딴생각에 빠진 동안 결론이 난 건가?
“참석할 거야?”
사이나는 그것부터 물었다.
“응. 뭐, 꿍꿍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피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잖아. 다들 안 가는 거면 나도 안 가도 상관없는데 그게 아니기도 하고.”
“하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면… 이번에 피한다고 해도 다음을 노릴 것이 분명하니, 눈치챘을 때 대처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아무리 경계를 하고 또 한다고 해도, 작정하고 나쁜 짓을 하려고 벼르는 사람을 막아내는 것은 힘든 법이다.
그러니 이렇게 확실하게 계기가 보일 때 차라리 덜미를 잡는 게 나았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뭔 짓을 하려는 걸 후회하게 해줘야지.”
엘리자베스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전생의 사이나는 가면무도회가 처음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플로리아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그녀는 데뷔 후 어지간한 야회는 다 경험해 본 이후라 웬만한 빛과 그림자는 이미 다 숙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날 선 경계가 더해질 테니, 어떤 수작을 부린 들 절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인방은 금세 그 찜찜함을 잊고, 가면무도회에서 어떤 컨셉으로 참석할지에 관해 열렬히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