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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96화 (196/233)

196화. 가능한 영역

“…뭐?”

“저는 헤베타님께 결례를 범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사적인 대화를 나누다 서로의 선을 넘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예법에 맞춰 경어를 써달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동시에 화제에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다.

어째서인지 엘리자베스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좋은 마음으로 해주는 경고도 못 알아듣는 건가? 그러다 크게 당하는 수가 있을 텐데.”

그랬더니 갑자기 황족이나 되는 것처럼 고압적인 말투가 나왔다.

일레인도 엘리자베스도, 저 자리에 가면 어째서인지 헤베타와 황자비, 황태자비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까지 황실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 공작부인 자리가 대단하긴 하네? 언제까지 그렇게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할 지경이야.”

“어깨에 힘을 준 것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만.”

황가에 들어가면 비약을 하는 화법을 따로 배우기라도 하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황녀는 정상인 것 같으니, 황자궁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사이나의 표정이 흐트러짐 없이 여상한 것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무는 것 같더니 금세 수습하고는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뭐, 별수 없군. 하지만 공작부인과 달리 이 몸은 과거의 연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편이라네. 필요에 따라 가차 없이 끊어내고 그러지 않아.”

“…….”

“그러니 혹여 도움을 청할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네. 내 궁은 공작부인에게 항상 열려 있을 거라오.”

이건 또 무슨 꿍꿍이람.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엘리자베스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은, 정말 뛰어났다.

사이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정하고 웃으니, 언제 서로 불쾌한 일이 있었냐는 듯 주변이 화사해졌다. 그 웃음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로 엘리자베스는 몸을 돌려 멀어졌다.

그 모습을 한참 보다가 사이나는 몸을 틀었다.

그리고 웨슬리 쪽으로 가서 그에게 작게 언질을 주었다.

황자가 다리엘을 노리고 있어.

* * *

땅 밑에 파묻힌 폭탄 같은 긴장감을 기저에 깐 채로 연회의 시간은 계속 흘렀다.

겉으로는 여느 황실 연회와 다름없이 성대했고, 평범해 보였다.

사이나도 겉으로는 그저 교제에 힘쓰며, 언제나처럼 친한 이들과 먼저 교분을 나누었다.

“사야~”

“아, 키얼스틴 영애.”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우며 다가오는 사이나의 친우들.

“에비앙 영애, 플로리아 공녀.”

“와, 이게 얼마 만인가요.”

서신으로 계속 교류를 하기는 했으나, 확실히 실물로 보는 것만은 못했다.

공석인지라 서로 경어를 쓰기는 했으나, 사이나와 친우들은 진심 가득한 미소를 그려대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사이나 혼자만 그간 멀리 떨어져 지냈던 탓에 그녀에게 질문 폭탄이 쏟아졌다.

“북동령은 어땠나요? 춥진 않았어요?”

“공작님은? 어때? 잘해 주셨어요?”

“혹시 누가 텃세를 부리거나 한 건 아니겠지요?”

남편이 없는 틈을 타, 민감한 질문들이 잔뜩 쏟아졌다.

물론, 그들 외에는 주변에 들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질문을 던져대기는 했다.

말을 하다 보니 서로 경어와 평어가 섞이기도 했으나 가끔은 그게 더 자연스러워서 웃기기도 했다.

사이나는 질문을 듣고 답을 하랴, 외부 분위기를 살피랴, 정신이 없었다.

“근데 맹약자가 대체 누구야?”

도도한 천년의 올리브나무 회원일지라도 이 궁금증은 어쩔 수 없었는지 두 눈에 반짝거림을 지워내지 못했다.

“음. 그건 아직 내 입으로 밝힐 수 없어요.”

“왜?”

“증명식 전까지는 밝히는 것이 금지. 미안해요.”

사이나는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사과했다.

그래도 별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밝힐 만한 사안이 아니기도 하지만, 아무리 작게 말해도 바깥에서 알아낼 수 있는 확률은 존재했다.

입술만 보고도 말을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에비앙은 사이나의 말을 듣고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반면 키얼스틴은 사이나가 난처해하는 것을 보고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건 아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공작부인께서 황도 사교계 유행을 이끌고 계시다는 걸?”

놀리는 것 같은 말투에 사이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예요?”

“사야, 네가 데뷔탕트 볼에서 입었던 드레스 디자인이 유행 중이잖아. 안 보이나요?”

“…뭐?”

사이나는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약간 놀랐다.

‘어, 저 디자인은…….’

세상에. 사실인 것 같았다. 묘하게 레이스 망토를 두른 스타일의 드레스가 많았던 것이다.

자신이 입었던 것을 남들이 따라 입다니.

상상도 못 해 본 상황에 사이나는 매우 어색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눈을 떼고 싶은 동시에 계속 보게 되는 묘한 심정이랄까.

그러다가 사이나는 큰 차이점을 발견했다.

전에 그녀가 입었던 것에 비하면 다들 디자인이…….

‘…와, 과감하네.’

아무래도 데뷔용 드레스는 얌전할 수밖에 없는 디자인인데, 그걸 다들 제각각 변형하여 입고 있었다.

망토는 특성상 상체의 대부분을 가리는 반면 레이스라는 특성은 그 재질이 성기고 가벼웠다. 그래서 입은 영애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썩임을 통해 안쪽의 살결들이 보일 듯 말 듯 노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내부 드레스 디자인이 또 반전이다. 가슴이 꽤 깊이 파여 있거나, 등 쪽의 천이 아예 없거나 하는 식이라, 가린 듯 안 가린 듯, 살결이 비쳐서 더 야릇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다수의 영애들이 그런 디자인을 입고 있었고, 더 다수의 영식들이 그 영애들에게 슬쩍슬쩍 눈길을 주는 것을 보니 사이나는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시작은 그녀가 했을지 몰라도, 다른 영애들이 변형한 디자인이 훨씬 예쁘다고 생각하며 사이나는 속으로 웃었다.

“다들 나보다 나은걸.”

“무슨 소리. 완전 새로운 시도보다 기존의 것을 변형하는 게 당연히 더 쉬운 거랍니다. 그러니, 이 결과는 분명 너의 영향력이라구.”

키얼스틴이 대견하다는 듯, 사이나의 볼을 슬쩍 쓸며 미소 지었다.

“나도 동의하네.”

황녀 매디얼이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전하.”

“그간 황도를 비웠음에도 이러한 영향력이라니, 사교 시즌에 계속 머무르면 어찌 될지, 궁금해지는군.”

“너무 띄워주시네요.”

사이나는 그저 웃었다.

패션에는 그다지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다. 이번 일은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일어난 요행 같은 것이라고 사이나는 생각했다.

“패션이나 이런 유행 분야는, 저보다 훨씬 뛰어난 분들이 많지 않나요. 오늘은 그저 요행 같은 것이겠지요.”

그녀는 자신의 흥미 분야를 잘 알고 있는 만큼, 못하는 분야에 대해서도 쉽게 납득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이 유행에 대해서 자신의 성과라고 여기지 않았다.

“아를어라면 굳이 이런 겸손을 떨지 않을 텐데요.”

굳이 겸손을 떨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이나는 농담을 띄웠다.

황녀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아를어.”

그런데 황녀가 웃다 말고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사이나를 보았다.

“그대가 아를어를 잘한다지.”

“네?”

“방금 겸손이 아니라 하지 않았나?”

“네, 어느 정도는 합니다.”

핵심적인 아를어 구조를 새로이 알게 되면서 사실 그녀의 고대어 실력은 이제 전문적인 학자를 훌쩍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갑자기 아를어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황녀는 슬쩍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내 궁에 와서 뭐 하나를 봐줄 수 있겠나?”

묻기는 묻되, 크게 알리고 싶은 것은 아닌지 그 물음은 꽤나 나직했다.

“…무엇입니까?”

“그대가 봐주었으면 좋겠는 것이 있다네. 자세한 것은 그때 설명해주겠네.”

흠, 대체 뭘까.

무언가를 보고 확인하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 하지만 황성이라는 게 좀 걸렸다.

“혹… 무리한 부탁인가?”

그녀의 망설임을 읽은 듯 황녀가 물었다.

“봐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근래 제 주변이 다소 소란한지라 따로 입궁을 해도 될지….”

“아.”

황녀는 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전령을 보낼 테니 그 마차를 같이 타고 들어오게. 그럼 조용히 입궁할 수 있을 게야.”

황녀는 상당히 배려심이 있는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부탁을 하는 것 보면 꽤 중요한 일인 듯했다.

사이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욜리가 있으니까 나도 어지간한 건 피할 수 있고.’

황녀는 기쁜 듯 웃었다.

그들은 화제를 바꾸어 도란도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연회가 중반부를 넘어섰다.

사이나는 홀을 둘러보았다.

아까 다리엘과 함께 나갔던 콘스탄틴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황자 역시 보이지 않았다.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사이나는 중간 쉬는 텀도 없이 이렇게 오랫동안 연회홀에 머무른 것이 처음이라 상당히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이 짙어져서 더 그런 것 같았다. 홀 바깥으로 잠시 나가서 뭐라도 확인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냐,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혹시나 타이밍이 어긋나면 일을 크게 망칠 수 있다.

사이나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사야.”

“아, 콘스탄틴.”

드디어 그가 돌아왔다.

“한 곡 추실까요.”

때마침 곡이 바뀌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내미는 손을 잡으며 사이나는 플로어로 나섰다.

그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숙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곧 시작입니다.”

멀리서 보면 그저 친밀한 부부가 서로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꽤 오래 걸렸네요.”

“그가 꽤 치밀하게 준비를 해 두었더군요. 무대를 만드느라 상당히 애를 써야 했습니다.”

‘그’는 보나 마나 황자를 이름이다.

“2층에 있습니다. 곧 시작될 테니 준비하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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