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의도를 숨긴 사람들
연회장 입구에서 사이나는 약간 긴장했다.
전쟁터에 들어가기 직전의 기분이랄까.
‘다른 건 몰라도,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건 확실해.’
정확히 어떤 일인지를 예상할 수 없을 뿐, 뭔가 사건이 생길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굳어 있다가는 의심을 살 수 있다.
사이나는 심호흡을 하며 너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그 중간 즈음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긴장됩니까?”
콘스탄틴이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잡은 손을 토닥여왔다.
“약간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탐욕에 눈이 먼 자는 생각보다 다루기 쉬운 법이니.”
“그랬으면 좋겠네요.”
별것 아닌 대화지만, 짧게나마 격려의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사이나의 표정이 가라앉으며, 미소 짓지 않을 때의 거리감 가득한 귀족의 얼굴로 돌아왔다.
콘스탄틴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녀의 미소를 독점하다시피 할 수 있는 제 위치가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 깨달아졌다.
그는 제 손바닥 위에 올라온 사이나의 작은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정면을 보았다.
정말로, 입장할 시간이다.
콘스탄틴은 입장에 앞서 호명관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려는 것을 막았다.
조금이라도 조용히 입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 홀로 들어서자 엄청난 시선이 와서 꽂혔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마치, 다들 문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
묵직한 침묵을 뚫고 앞에서부터 콘스탄틴과 사이나, 그 뒤로 다리엘과 다른 여성 한 명, 또한 웨슬리 단장과 루퍼트 경이 차례로 입장했다.
사이나와 콘스탄틴을 빼면 황도 사교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얼굴들인지라, 사람들은 처음에 의아해했다.
그러나 곧 눈치챘다.
크레이머 공작과 함께 입장한 일행의 의미를.
이내 어마어마한 탐색의 시선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저 중에 새로운 맹약자가 있다는 것을 다들 깨달은 것이다.
‘와, 데뷔할 때보다 더 떨리잖아?’
지독할 정도로 집요하고 관찰 어린 시선에 다리엘은 생각했다.
어지간한 것에는 무던한 그녀조차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녀 옆에 있던 여성도 안색이 창백한 것이, 사전 교육을 충분히 받았음에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사이나 역시 뚫을 듯이 와서 박히는 시선들에 긴장감이 고조되는 기분이 들었으나, 반면 안심이 되기도 했다.
자신을 향한 시선보다 자신을 넘어 뒤쪽으로 꽂히는 시선이 더 많다는 것을 느끼고, 시선 분산에 성공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작 황자를 속일 수 있어야 하겠지만….’
하나 그 부분도 콘스탄틴이 미리 수를 써둔 것이 있다고 들었기에, 사이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대타 역할을 하는 여성들을 이 연회가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지켜내는 것이다.
일행은 입구를 떠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이나는 연회홀 한쪽에 자리를 잡으며 루퍼트와 웨슬리를 향해 짧게 눈짓했다.
그들은 알아들었다는 듯, 마찬가지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목적이야 어쨌든 연회는 연회.
초반은 여타의 다른 연회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황실 연회라면 공식처럼 연주되는 몇몇 음악이 흘렀고, 황가의 입장을 기다리며 귀족들은 각각 교분을 나누느라 정신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나 쪽으로 오는 자들은 없었다. 하나같이 흘끔거리며 관찰하기에 바빴고, 동시에 무리 지어 속닥거리며 무언가를 추측하기에 바빴다.
그들이 멀리서 속닥거리기만 한 것은 사실 다가가기가 힘들다는 이유도 있었다.
작정하고 웃음기를 내린 사이나의 얼굴은 차갑다 못해 냉엄해 보였고, 콘스탄틴의 기세는 대놓고 주변에 한기를 내리고 있었다.
같은 쪽에 있는 사람들조차 몸을 슬쩍 떨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라 감히 누구도 먼저 와서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연회 참석자들은 누구라도 얼른 나타나 저 날 선 공기를 깨고, 맹약자의 정체를 밝혀주길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입장을 할 황가를 열심히 기다렸다.
빠밤-!
때마침 익숙한 나팔 소리가 들렸다.
황족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였다.
“제국의 밤을 지탱하는 달, 샤를로이즈 맥페이든 황후 폐하 드십니다!”
“길리언 맥페이든 황자 전하와 헤베타 엘리자베스 발데즈 님 드십니다!”
“매디얼 맥페이든 황녀 전하 드십니다!”
드디어 연회의 주체가 등장했다.
황자를 포함한.
사이나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황족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연회의 시작을 여는 황후의 개회사가 흘러나오는 동안 그녀는 그 뒤를 살폈다.
황자. 길리언은 예상한 대로 황후의 뒤쪽에서 아래를 탐색 중이었다.
사이나는 시야를 황자 쪽으로 틀자마자 그의 날카로운 시선과 떡하니 마주쳤다. 냉랭한 황자의 눈동자가 사이나에게 잠깐 머무르며 분노의 기색을 비치고는, 금세 뒤쪽으로 넘어갔다.
보나 마나 맹약자가 누군지 뒤지며 추측하고 있을 터였다.
한참을 그렇게 이쪽을 헤매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는 황자의 시선이 사이나 일행의 반대편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맹약자가 아닌, 누굴 찾는 걸까.’
사이나는 약간의 의아함을 가지며 황자의 시선을 좇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 플로리아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사이나는 반사적으로 웃고 말았다.
작게 손을 흔들며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는 플로리아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사이나는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시야를 돌렸다가 약간 놀라고 말았다.
플로리아의 바로 옆. 또 다른 분홍색 머리카락. 애버딘 공작이 사이나를 빤하게 보고 있었다.
키잉-
콘스탄틴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비슷한 공명음이 들려 사이나는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
그리고 사이나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의 정체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다른 맹약자를 만날 때 맹약자끼리는 속일 수 없다는 그 말을 말이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상대방의 기운이.
콘스탄틴의 기운은 되레 처음부터 너무 가까워서, 혹은 몸의 거리에 따라 이미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실감을 잘 못 했던 듯하다.
생소한 기운일수록 첫 만남의 파장이 더 강렬한 것인지, 일촉즉발의 상태처럼 거세게 흔들리는 애버딘 쪽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타 맹약자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 생소하여, 사이나는 홀린 듯 애버딘 공작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직선으로 교차되는 시야를 뚫고 타인의 움직임이 걸려들었다.
애버딘 공작 쪽으로 누군가 다가서고 있었다.
‘……황자?’
황후의 개회사가 끝나자마자 단 아래로 내려온 모양이다.
하지만 왜 저쪽으로 간 거지?
그가 애버딘 공작 쪽으로 다가가더니 멈췄다. 예상과 다르게 애버딘 공작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근. 그 순간 사이나의 심장이 강하게 박동했다.
황자와 애버딘 공작은 서로 계속해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동시에 시선을 틀어 이쪽을 보았다.
뭔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애버딘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황자의 귓가에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에 따라 황자의 눈빛이 번뜩였고, 동시에 입가에 짧은 비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두근. 사이나는 다시금 제 심장을 두들기는 박동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와 동시에 황후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첫 춤을 열라-!”
어느새 황자의 얼굴에 떠올랐던 비소는 사라졌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황자와 헤베타의 첫 춤이 선보여졌다.
사이나의 심장이 다시 천천히 가라앉았다.
본격적으로 사건의 막이 오를 시간이었다.
* * *
첫 춤이 끝나고 황자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바로 이쪽으로 다가와 뭔가 수작을 부릴 줄 알았던 사이나는 되레 당황했다.
오히려 예상치 않았던 사람이 다가와 사이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사야.”
허락한 적 없는 사이나의 애칭을 부르며 만면 가득 꽃다운 미소를 짓는 자.
헤베타가 되고 나서 처음 만나는 엘리자베스였다.
“…헤베타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어머, 그리 격식 차릴 필요 없어. 한두 해 아는 사이도 아니고.”
“…….”
엘리자베스는 둘의 마지막 만남을 잊은 걸까?
사이나는 가타부타 더하는 말 없이 그저 침묵했다.
“근데… 혹시 저 여성분이 맹약자니?”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사이나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입가엔 묘한 미소를 띤 채였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를 흘깃 보자 콘스탄틴이 다리엘에게 고개를 숙이며 무어라 말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둘이 많이 가까워 보이는데?”
“…….”
무슨 뜻으로 하는 질문일까.
“새 맹약자가 여성일 줄은 몰랐어. 그것도 젊고 예쁘기까지 한. 흐음…….”
엘리자베스는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사이나를 보았다.
마치 걱정스럽다는 듯이.
“맹약자끼리라서 통하는 게 많은가 봐. 지금도 찰싹 달라붙어 있네?”
“…….”
“하긴 500년 만의 맹약자라니… 어떤 의미로 공작부인보다 더 대단한 신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어.”
의도는 모르겠으나 사이나를 화나게 하거나 자극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이나의 관심은 그쪽이 아니었다.
사이나의 대타로 참석한 것은 다리엘 혼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는 저렇게 말했다.
맹약자가 맞느냐고 묻고 시작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다리엘이 맹약자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 같은 말투와 흐름이었다.
‘아마도 황자를 통해 알게 된 거겠지.’
황자가 무사히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아까 본 루카스와 황자의 조합이 걸리기는 했으나, 콘스탄틴도 뭔가 조치를 취해 두었다고 했으니 과한 의심은 할 필요 없겠지.
“어머, 둘이…… 같이 복도로 나갔어!”
“…….”
“저쪽은… 보통 밀회를 하러 가는 곳인데…….”
사이나는 엘리자베스의 공격에 가벼운 지루함을 느끼며 대꾸했다.
“헤베타님. 저희가 그런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네요.”
물론 반말로 대화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다.
이미 사이나는 엘리자베스를 쳐낸 지 오래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