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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36화 (136/233)

136화. 일상을 살아

욜리는 쉬이 깨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크림성의 주치의를 비롯해 수의사, 약초꾼, 사냥꾼, 심지어 마구간 지기까지 동원하여 욜리를 살피게 했으나 왜 깨어나지 않는 것인지 설명이 가능한 자가 없었다.

동물 전문가들로부터 강아지가 아니라는 말만 반복해서 들었을 뿐이다.

‘이대로 영원히 안 깨어나면 어쩌지?’

사이나의 신경은 점점 더 예민해졌다. 수면 시간은 점차 줄었고, 그녀는 점점 더 욜리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렇다고 아예 안 잘 수는 없는 노릇. 의지적으로는 안 자려 애를 썼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의식이 끊기듯 잠이 들 때가 생겼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유리의 꿈을 꾸었다.

대부분은 사이나의 기억에 존재하는 일들의 나열이었으나, 이따금 이상한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 꿈은 그중에서도 특히 이상했다.

『사이나!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유리가 근처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지며 괴성을 질러댔다.

『멍청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아니, 지금 유리가… 나한테 욕하는 건가?’ 서로 투닥거리기는 했어도 무얼 집어 던지고 그럴 정도로 격렬하게 다툰 적은 없어서 꿈속임에도 의아했다.

『나쁜 년! 못돼 처먹은 년! 네가! 네가 어찌 나한테 이래! 으아아아아-!』

유리는 처절하기까지 한 비명을 지르더니 그것도 모자라 벽 한쪽에 있는 거울을 향해 돌진했다.

콰장창!

제 얼굴이 반사된 표면을 주먹으로 미친 듯이 쳤다.

쩌억- 하고 갈라진 유리가 산산조각이 난 것도 모자라서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갈 정도로 광분을 해서는 주먹질을 해댔다.

『유리! 너… 손에서 피나잖아! 미쳤어?! 그만해!!』

사이나는 꿈인 걸 알면서도 그만하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저 흐르듯 재생되는 기억의 관람자 입장인지라 그녀의 말은 그에게 가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만하라고오!』

유리의 손은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었다. 사이나는 피칠갑을 한 유리의 양손을 망연하게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유리가 저렇게 심각하게 다친 것을 본 적이 있었나?’

기억 속에 없다.

유리도 남자니 때론 싸우고 폭발하는 면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사이나의 면전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억인가? 꿈인가? 아니면… 망상인가?

손에서 떨어진 피가 바닥에 뚝뚝 흘러 고일 정도로 크게 찢어졌음에도 아프지도 않은지 유리는 묵묵하게 먼 바닥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고개를 들었다.

『널, 내게서 빼앗아 간 자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게.’

‘아…….’ 핏발이 선 두 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배신감, 후회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렇게 할게, 사야. 반드시…….』

문득 언제인지 알 것 같아졌다. 이 기억은 그녀가 이미…….

“……흐윽!”

사이나는 물에 침잠한 것 같던 수면에서 갑작스럽게 끌어 올려졌다.

“…아, 흐으…… 윽.”

후드득. 어떻게 참아낼 수 없는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 떨어졌다.

“세상에……. 율아…….”

이 꿈은 뭘까. 내 무의식이 편성해낸 가짜일까. 아니면 진짜 유리가 경험했던 슬픔의 잔재일까.

사이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욜리를 끌어안으며 울었다.

그도 아니면, 실존했던 기억일까?

“미안해…. 미안…….”

상관없었다.

꿈이지만 꿈이 아니다. 꿈이어도 꿈일 수 없다.

왜 몰랐을까. 유리라면 분명 제 죽음 이후 저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슬픔과 애도를 넘어서 분노하다가 종국에는 자신의 인생까지 그 감정에 담보 잡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지금 이번 생에 유리가 지워진 것과 연관이 있을 테지.

쌍둥이의 감이란, 때론 꽤 정확하니 말이다.

“유리야…….”

그 슬픔에 망연해져 사이나는 눈물지었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공감받을 수 없는 슬픔이었다.

* * *

근래 크림성의 분위기는 상당히 암울했다.

그들의 주인인 크레이머 공작은 본래 그리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니 그를 기준으로하면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음에도 그러했다.

사이나가 두문불출한 지 일주일째.

공작부인의 가라앉은 심성과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동조하는 공작의 태도가 성 전체에 싸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마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생각 없어.”

“그러지 말고 조금이라도 드세요. 식당 말고 이리로 올릴까요?”

“생각 없대도.”

다리엘이 식사를 거부하는 사이나를 보며 이번만큼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가와서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다리엘?!”

깜짝 놀란 사이나가 벌떡 일어나 다리엘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 했다.

“왜, 왜 이래. 일어나.”

“전 시녀 자격도 없어요.”

“…무슨 소리니.”

“마님께서 이 짐승을 이토록이나 아끼는 것도 몰랐고, 이 녀석이 사라지는 것도 몰랐고, 지금은 식사 하나도 챙겨드리지 못하니 무슨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

“각하께서 다른 건 몰라도 마님의 식사는 꼭 챙기라고 당부하고 가셨는데 이리 무능하니……. 부디 절 벌해주세요!”

다리엘은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셨다고? 어디, 가셨어?”

그 와중에 콘스탄틴이 갔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예. 어젯밤에 갑자기 토벌을 가시면서 제게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흐윽, 마님. 조금이라도 드세요, 네?”

토벌? 어디 또 마수가 범람한 걸까?

며칠 못 본 새에 그가 또 피가 난무하는 험지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렇지 않아도 별로 좋지 못하던 기분이 더 가라앉는 것 같았다.

사이나가 유리를 욜리에게 투영시키며 눈물짓는 동안 그는 또 생과 사가 공존하는 전장에 고생하러 간 것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딱히 그가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사이나는 요 며칠 콘스탄틴을 피했다. 아니, 피했다기보다는 욜리에게 온 신경이 팔려서 완전 뒷전이었다.

근데 콘스탄틴 역시 그런 그녀의 태도를 그냥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이따금 마주친 모습에서 그는 도리어 그녀에게 큰 잘못이나 한 사람처럼 멀찍이 떨어져 용서를 구하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내고는 했다.

왜 그랬을까.

평소 같았으면 다리엘보다 콘스탄틴이 먼저 찾아와 그녀를 말리고 위로했을 터인데…….

사이나를 품에 안고 이마에 입술을 찍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을 텐데…….

배척에 가까운 사이나의 태도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이런 그녀가 옳다는 듯 동조하기까지.

‘……이 상황은 뭐지?’

정신을 차려 보니 뭔가 상황이 묘하다.

그녀는 그를 탓할 그 어떤 이유나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잘못이라고 해봤자, 무사히 데려오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잠든 욜리를 데려온 것 정도?

아니, 그것도 사실 그의 잘못은 아니잖아?

사이나의 우울은 욜리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건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다.

실상은 유리의 부재. 그리고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스스로 함몰된 것이다.

유리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사이나 외엔 아무도 없으니, 털어놓을 곳도 없다. 그렇다고 유리를 다시 존재하게 할 방법은커녕 그 가능성의 유무조차 모른다.

세상에 속하되, 속하지 않는 유리관 속에 혼자서 갇혀버린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걸까.’

그건 아마도…….

사이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상냥한 사람이니까.’

그녀 대신 스스로 자책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이 모든 것들이 매우 옳지 못한 투정처럼 느껴졌다.

신경이 곤두서서 애먼 콘스탄틴만 못살게 군듯하다. 비현실이 현실을 잡아먹어선 안 될 일이다.

유리의 나무 자리에서 데려왔다는 이유로, 그녀는 욜리에게 어쩌면 지나치게 유리를 투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이나는 반성했다.

“…식사, 방으로 가져다줘.”

그러니 그의 당부 정도는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잘 생각하셨어요! 얼른 챙겨올게요!”

다리엘이 벌떡 일어났다.

사이나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웠던지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식사를 싣고 왔다. 방 안 테이블에 금세 음식이 잔뜩 차려졌다.

평소에 사이나가 잘 먹던 것들 위주로 골라 차려진 것을 보니 계속 그녀의 식사를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입맛은 여전히 별로 없었지만 사이나는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었다.

욜리는 사이나에게 분명 소중한 존재지만, 콘스탄틴도 소중했다.

‘살아있으니… 언젠가는 깨어날 거야.’

첫 발견부터 묘한 구석이 있었던 녀석이다. 신비한 구석이 넘쳐났던 녀석이다. 그러니 이런 이상한 긴 잠도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분명 깨어날 거다.

사이나는 희망적이면서도 최대한 객관적이게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조금 여유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가 돌아오면… 기쁘게 맞아주자.’

사이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 * *

그녀는 최대한 일상을 살아내려고 노력했다.

사이나는 상실감에 매몰되어 남은 인생을 몽땅 저당 잡혔을지도 모를 유리처럼 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꿈과 콘스탄틴의 당부는 새삼 그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럴수록 사실 공작부인인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나디아가 총집사장으로서 훌륭하게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녀는 크레이머가(家)의 공작부인. 공작이 부재 시 영지의 총책임자였다.

많이 먹지는 않더라도 식사 시간에는 식사를 했고, 하루를 쪼개 공작부인의 업무와 번역 작업, 욜리 곁에 있어 주는 시간, 산책을 하는 시간 등을 배정했다. 그리고 배정한 대로 지키려 애썼다.

사이나가 가장 먼저 들여다보기 시작한 문서는 예산안이었다. 사이나 개인에게 배정된 예산.

아직 전반적인 업무 분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상당히 심각했다.

“나디아에게 좀 다녀오련?”

“네?”

“지금 이쪽으로 좀 올 수 있느냐 묻고, 된다 하거든 데려와.”

“알겠어요!”

다리엘이 재빨리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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