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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49)화 (149/154)

149.

라비우의 저 눈빛에 담긴 소유욕은 시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내가 부른 이유는 알 테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그만 멈추자는 소리였다. 라비우가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한 싸움이었지만 이미 그의 패배였다.

패배자는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어야 했다. 속에선 풀지 못한 욕망이 울분이 되어 들끓었다. 갑자기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센칸이 저지른 짓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왕께서는 센칸을 지키고 싶다면 많은 것을 손에서 놓으셔야 할 겁니다.”

누굴 건드렸는지 똑똑히 보라는 듯, 시몬의 목소리는 한없이 냉랭했으며 그의 눈빛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당장 그를 죽여도 시원찮을 것 같은데도 이리 침착하게 대화를 하고 있다니. 스스로의 인내심을 칭찬할 만했다. 모든 회의가 끝나면 플로라에게 칭찬해 달라고 해야지, 시몬은 생각했다.

시몬은 그 이후로도 침착함을 유지한 채 라비우와 대화했다. 어떤 것도 뺏기지 않고, 빼앗을 수 있는 건 모든 것을 빼앗았다.

본격적인 의논이 시작될 때에는 플로라가 잠시 물러나 있었기에 라비우는 체면치레할 순 있었지만, 모든 것을 빼앗겠다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적으로나 실질적인 앞으로의 그의 삶에 타격이 클 것이 분명한 계약이었다. 그럼에도 라비우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메린 섬에서 벌어진 실험에 대해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고 하기에는, 플로라에게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이었다. 왕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나니, 그제야 제가 욕망하며 쥐고 있던 것들이 선명히 보였다.

시작은 아주 작은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이 집무실에 왔을 때. 자신의 집무실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게 꾸며진 이곳을 보며 욕심이 생겼다. 센칸이 왜 하네칸의 아래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국명을 바꾸고, 즉위하는 대로 체제를 바꾸는 데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으므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애초에 플로라를 죽였더라면, 그랬다면 이렇게 비참히 모든 걸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라비우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 * *

플로라는 초조하게 시몬을 기다렸다. 옷도 불편한데 회의도 길어지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분리불안에 걸린 것마냥, 마음속에 부정적인 감정들만 가득해졌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지?>

옆에 서 있던 에르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하고 플로라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비우와 폐하가 단둘이 있으니까요. 옷도 너무 불편해요.”

플로라가 툴툴거리며 미간을 좁히자, 에르네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앞으로 경이 입어야 할 옷이 아닌가.>

“제가 공작가로 들어간다고 해도 검은 놓지 않을 거예요.”

<마음대로 될까? 공작가는 공작 부인도 없을뿐더러 후계조차 없는 데다 경은 공식적으로 황제 폐하의…….>

에르네는 자신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플로라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거기까진 생각 안 했구나. 시몬과 리비에르는 분명 플로라가 검을 잡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할 게 뻔했다.

“아……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어요.”

이런 얘기를 해 줬던 사람은 없었다. 플로라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잠시 고민에 빠져 있자, 곧 회의가 끝났단 소식이 전해져 왔다. 무사히 끝났다는 것에 플로라는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시종의 안내에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시몬,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응. 없었어.”

시몬이 다정하게 웃으며 플로라의 손을 잡아 왔다. 만나자마자 이리 애정이 담뿍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봐 주는 모습에 모든 걱정과 고민이 잊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 같다. 그의 곁이라면 자신이 무엇이 되든 그게 행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플로라도 시몬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시몬은 가볍게 플로라를 끌어당겼다. 플로라는 서 있고, 시몬은 앉아 있다 보니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것도 퍽 나쁘지 않았다. 플로라가 잠시 놀란 듯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가 이내 시몬을 가볍게 안아 주며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는 시몬에게 스킨십을 하는 것이 한결 익숙해졌다.

“오늘 예뻐. 플로라. 보자마자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 라비우가 있어서 못 했어.”

예쁘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다. 특히 마음에 품은 남자에게 듣는 칭찬은 기분을 날아갈 것처럼 들뜨게 만들었다.

“근데 플로라는 불편하지?”

“조금요. 익숙하지가 않아서…….”

“이제 자주 이런 옷을 입어야 할 텐데, 괜찮겠어?”

“그런 제 옆에 시몬이 있고, 시몬이 예쁘다고 칭찬해 준다면요. 견딜 만할 것 같아요.”

시몬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플로라를 올려다보았다. 플로라는 그와 눈을 맞췄다. 아름다운 눈빛에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쪽, 플로라가 홀린 듯이 고개를 숙여 시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단번에 시몬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지는 게 보였다. 수줍음 같은 건 모르는 남자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잘 숨겼거나, 제 설렘에 가려져 보지 못했었나 보다. 플로라가 옅게 웃자, 시몬이 눈을 흘겼다가 그녀를 와락 당겼다.

“아…… 시몬! 잠시, 이건!”

졸지에 그의 무릎에 앉게 된 플로라가 새된 비명을 질렀으나, 그녀의 허리를 꽉 붙들어 안은 시몬은 놓아주지 않았다.

“사람 마음에 불을 지펴 놓고, 이러면 곤란합니다. 플로라.”

“제가, 제가 무슨…….”

“이렇게 도발해 놓고.”

쪽, 하고 간질이듯 뺨에 시몬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가 화끈거렸다.

“……아니라고?”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와 그의 무릎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의식되어 플로라는 당황했다. 숨결이 뺨 언저리에 닿는 것 같아 온몸이 간지럽고, 차마 시몬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플로라가 다시 한번 몸을 버둥거렸으나, 시몬의 팔 힘이 어찌나 센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시몬의 간질이는 듯한 속삭임에 플로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이내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잘못한 것 같네요.”

픽, 하고 짧게 웃는 목소리와 함께 시몬의 손이 플로라의 뺨에 닿았다. 부드러운 감촉에 플로라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깜빡였다. 이대로면 곤란하다. 아마도 자신이, 황제를 잡아먹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위험한 생각이 들었다.

“시몬, 그, 센칸과는 이야기가 잘 끝난 건가요? 라비우는…….”

플로라가 이 오묘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하지만 자꾸만 시몬의 요망한 손이 뺨에 닿고, 허리를 쓸어내리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잘 끝났어. 그는 지금껏 누려 왔던 모든 것을 잃을 거야.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왕이겠지만, 껍데기만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 실질적으로 모든 것은 내게 보고가 올 거야.”

센칸의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왜 사랑을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플로라가 결국 눈을 들어 시몬을 바라보았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온몸의 신경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도 빤히 플로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애정이 담긴 눈빛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플로라, 이건 어쩔 수 없어.”

“……네?”

“참을 수가 없어.”

시몬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술을 포개어 왔다. 플로라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이미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이곳이 집무실이든 누가 들어오든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됐다. 플로라도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에 걸터앉아,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농밀한 키스는 한참 이어졌다. 서로의 입술 사이로 자연스레 숨결이 오고 갔다. 두 사람의 세상이었다.

* * *

라비우는 제대로 된 귀빈의 대접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본국으로 돌아갔다.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이니 충분히 이해되는 처사였다.

센칸은 본격적으로 하네칸의 속국이 되었다. 군사권, 통치권 등 중요한 부분은 모두 시몬에게 보고가 들어와야 했고, 그로 인해 시몬이 신경 써야 할 일이 늘기는 했지만 적어도 센칸이 음흉하게 다시 활개 치지는 못하게 되었다.

아직 하네칸에 남아 있을 첩자들은 잠잠하기만 했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인지, 아니면 명령을 하달받은 것이 없어 그런지. 그도 아니면 아이든이 죽었다거나, 센칸이 하네칸의 속국이 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일지도 몰랐다. 남은 잔당들을 얼른 잡아야 한다고, 조급함을 내비치는 플로라를 진정시키는 건 언제나 시몬이었다.

그가 안아 줄 때마다 플로라는 편안함을 느꼈다.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고 아무렴 좋아졌다.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을 때 유일한 걱정거리가 있다면, 점점 그의 포옹과 스킨십에 익숙해져 간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공작가로 들어가서, 지금처럼 자주 못 보게 되면 어떡하나, 그래서 이렇게 안기는 것도 점점 줄어들면 어떡하나, 그런 음흉한 생각이 들었다. 밤 산책을 함께 못 하게 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같은 지난번 고민과는 다른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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