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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46)화 (146/154)

146.

시몬이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을 내려 가볍게 턱을 쥐었다. 손가락이 살살 턱 끝을 쓸어내릴 때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했다.

산책을 할 때는 선선해서 기분이 좋았는데, 갑자기 뙤약볕 아래에 놓인 듯 온몸이 뜨거워졌다. 더워서 불쾌한 것보다는 미묘한 감정이 슬금슬금 가슴 끝을 간질이는 듯해 괴로웠다.

시몬과의 숨결이 맞닿은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플로라는 살짝 몸을 떨었다. 가로막혀 있던 그를 향한 마음이 다시 한번 빗장을 열어 버린 듯했다.

아, 달다. 이미 입술이 맞닿아 있음에도 플로라는 갈증이 난다는 듯 시몬에게 몸을 밀착하고,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그러자 시몬의 입매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영원히 이 시간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곧 입술을 떼어낸 시몬이 플로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입이라도 맞추면 갈증이 해소될 줄 알았건만, 오히려 더 뜨겁게 달아올라 정신이 메말라 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아름다운 사람을……. 시몬은 주먹을 꽉 말아 쥐는 것으로 제 인내심의 한계를 극복해 내야 했다.

* * *

플로라는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황제의 집무실 앞에 섰다. 이젤이 당직을 서는 모양인지, 그가 눈웃음을 지어 보이곤 폐하에게 플로라의 방문 소식을 고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방문했지만 여전히 변한 것 없이 익숙한 공간이었다. 높은 천장에는 금빛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고, 거대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하얀 벽지가 단조롭지 않도록 몰딩이 된 벽은 테두리마다 금색으로 치장이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한층 더 이 집무실을 고급스러워 보이도록 했다.

어느 한 곳이라도 고용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붉은색의 벨벳 커튼은 주름마저 아름답고 깔끔하게 보이도록 다듬어진 채 묶여 있었고, 바닥에 깔린 카펫 역시 접히거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반듯하게 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창문 너머에선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플로라는 의자에 앉아 있는 시몬을 바라보았다. 햇살마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아름답고 완벽한 피조물이 틀림없었다.

“하네칸의 태양을 뵙습니다.”

플로라는 시몬을 향해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그가 옅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에 앉아. 플로라.”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황제가 권유한 자리에 앉았다.

“곧 리비에르도 올 거야. 이야기는 그때 시작하지.”

리비에르도? 플로라는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까닭으로 우리 두 사람을 부른 것인지 먼저 묻고 싶었지만, 시몬의 얼굴이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어 플로라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 시몬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예전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가 일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황제가 굉장히 바쁠 거라는 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점이었다. 오랫동안 제국의 자리를 비웠으니 대외로 또는 내부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을 것이고, 센칸과 내통한 내부의 귀족들과 센칸의 처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도 해야 할 것이었다.

플로라는 아직도 모든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메린 섬이 사라졌다는 것도, 또 아이든이 죽었다는 것도. 아이든을 떠올릴 때면 언제고 다시 만날 것처럼 섬뜩해지곤 했다. 아무래도 그를 떨쳐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플로라가 아이든을 떠올리며 잠시 진저리치는 사이, 리비에르가 왔다.

리비에르는 먼저 황제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고, 힐끗 플로라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 나누지 않아도 눈빛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시몬은 리비에르에게도 자리에 앉도록 권유하고, 본론에 들어갔다.

“이걸 좀 봐줘.”

시몬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플로라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메린 섬에서 사용하던 인장이 찍힌 종이였다. 가뜩이나 리비에르가 오기 전까지 아이든을 떠올리고 있던 참이라, 기분이 미묘해졌다. 플로라는 가만히 시몬이 건네준 서류를 읽었다.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을 읽어 내려갈수록, 플로라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뒷머리가 뻐근해지며 눈이 뻑뻑해진다. 마침내 플로라가 그 서류를 다 읽었을 때는 얼마나 이를 악물고 있었는지 턱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어릴 때의 기억까지 모두 돌아왔지만 또렷한 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제 어머니의 오라버니였던 스벤타 남작 같은 경우 굉장히 키가 작고 뚱뚱했다는 것만 기억나고 그 외는 기억조차 없었다. 하지만 스벤타 남작의 저택에서 자랐을 때의 일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어두운 골방에 갇혀 빛조차 보지 못하게 하고, 화가 날 때면 온갖 모욕을 해 대던 괴물 같은 모습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그 작자와 마르웰 공작이 벌인 일이라는 거지? 들끓던 피가 차갑게 식어 버리는 것 같았다. 플로라는 중요한 서류를 차마 구기지도, 찢지도 못한 채 그저 이를 악물기만 했다.

아이든은 플로라에 대한 정보를 빼곡하게 작성해 일지를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그 일지가 지금 제 손에 있었다. 거기에는 플로라가 누구의 계략으로, 어떤 방식을 통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적혀 있었다.

‘너, 이름이 뭐야?’

‘……이레나.’

‘예쁜 이름이네. 이레나 영애.’

‘오라버니는요?’

‘나는 라비우라고 한다.’

라비우와 처음 만났던 기억이 떠오르며 갑자기 찌르르한 이명이 귓전을 때리는 것 같았다. 그날 그렇게 우연찮게 만나지 않았더라도, 어쨌든 라비우에게 잡혀갈 운명이었던 거다.

……스벤타 남작과 마르웰 공작의 협작에 의해서.

플로라는 실소를 터트렸다.

스벤타 남작이 어린 플로라를 거뒀던 이유도 고작 재산 때문이었다. 그 욕심 때문에 어린아이를 데려가 놓고 하인처럼 부려 먹고, 괴롭히기 일쑤였다. 그런데 재산 상속을 포기하고 리비에르의 수양딸로 들어간 것조차 못마땅해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대체 왜? 그 많던 재산도 다 포기했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서?

“플로라.”

시몬과 리비에르는 플로라의 눈치만 봤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 플로라에게 솔직하게 말하기까지 수도 없이 고민해 왔었다. 그녀의 일이니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플로라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쉬이 꺼내놓을 수 있는 유의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전 괜찮습니다.”

플로라의 눈빛은 금세 고요해졌다.

뒤통수가 얼얼해질 정도로 화는 났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들 덕분에 플로라는 기구하고도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화가 난다고 해서 그들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시절들을 지나 다행히도 지금은 행복해졌으니, 앞으로의 날들을 바라보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로울 터였다. 자신에게도, 제 곁의 다른 이들에게도.

플로라는 시몬과 리비에르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눈앞에 행복이 있으니, 화를 내려고 해도 금세 수그러졌다.

“이들이 정당한 죗값을 치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작자들이었다. 죽여도 시원찮고, 죽여서도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는 걸 알았다. 플로라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벤타 남작은 꼭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생각했는데. 안 되겠죠?”

그러자 리비에르가 무시무시한 말을 꺼냈다.

“안 될 것까진 없지. 아니면 저주를 걸어도 나쁘지 않겠어. 땅을 밟을 때마다 불 위를 걷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는 건 어때?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거야.”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예상외의 대답에 플로라가 평정심을 잃고 ‘아버지!’하고 작게 외쳤다. 시몬이 픽 웃으며 플로라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플로라. 꼭 죗값을 치르게 할게. 센칸으로 잡혀간 무고한 하네칸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네. 감사합니다. 폐하.”

플로라뿐만 아니라, 그동안 사라졌던 많은 아이들이 전 대륙으로 팔려갔다. 그것이 가장 청렴해야 할 귀족이 벌인 짓이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소문으로 듣자 하니, 우리가 돌아온 이후로 마르웰 공작은 여행 준비를 하고 있다더군요.”

“아…… 그래. 사실이야.”

시몬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매만지며 인상을 구겼다.

“마르웰 공작은 대외적으론 딸을 잃어버린 불쌍한 아버지니까. 그 이미지를 이용해 파렴치한 짓을 벌이려고 하더군. 딸을 잃은 상처가 너무 커서, 잠시 공직에서 물러나 쉬고 싶다는 보고가 올라왔어.”

“……뻔뻔하기는.”

“동감이야.”

형식과 예의를 잃은 리비에르의 분노에도 시몬은 침착하게 동조했다.

“더 뻔뻔한 것은 내가 센칸에 간 사이 그런 일들을 벌였다는 거야.”

“……하!”

“떠나기 전에 잡아야지.”

시몬이 다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 뻔뻔하고 악랄함은 죽어서야 끝이 날 것 같았다. 플로라도 이번에는 기가 차서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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