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42)화 (142/154)

142.

시몬은 약속을 지키겠다는 듯, 플로라를 만찬에 초대했다. 리비에르도 당연히 올 줄 알았는데, 그는 없었다. 아무리 좁은 배 안이라고 해도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은 드물었다. 플로라가 웬만해서는 방 밖을 나가지 않기도 했고, 리비에르나 에르네, 카신 등도 제국에서 떨어져 있으니 그만큼 더 제국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일해야 했기에 바빴다. 제국과 사람들의 소식을 주고받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게 온전히 리비에르의 몫이었기에 그 역시 매우 분주했다.

“리비에르는 바쁜 모양이군.”

“그런 모양이에요.”

식당에 플로라와 시몬, 단 둘뿐이라 어딘지 모르게 이 고요함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플로라는 시몬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대놓고 그를 바라보고,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다정하게 주고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전히 시몬은 플로라에게 센칸으로 훌쩍 떠나 버린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다 이해해서 말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이해하길 포기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시몬의 행동과 마음이 궁금한 한편, 사실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미워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답답한 고민이기는 해도 걱정이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시몬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대해 주었는지, 얼마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썼는지 알기 때문에. 그를 떠나야만 했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진 않았다. 그때는 시몬을 두고 떠나는 방법이 최선인 줄 알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종종 후회도 했으니까.

지레짐작하고 겁을 먹은 소극적인 태도에는, 시몬과 하네칸의 소중한 동료들에 대한 걱정도 담겨 있었다. 아이든은 죽었지만 여전히 센칸은 존재하는 나라였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다시 하네칸에 복수를 해 올지 몰랐다.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한다면 또다시 소중한 사람들이 이유 없이 다치고 상처받는 것을 보아야 했기 때문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하네칸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것이니 다시 돌아가는 마음이 마냥 설레고 기대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그들을 향한 마음이 너무나 커져 버린 탓이리라. 이제 플로라에게 리비에르를 포함한 모두는 한 명도 잃을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적당한 마음과 생각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리라 넘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원래부터 이리 깐깐한 성격이었나. 누가 보아도 지금 자신의 모습은 답답해 보일 것이다. 플로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답답한 생각들은 쳇바퀴처럼 맴돈다. 해답은 없었다. 모든 결정은 플로라의 선택에 따라, 그녀가 마음먹는 것에 달렸다.

“플로라.”

플로라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눈을 들었다. 시몬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용기는 여전히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몸은 좀 괜찮아졌어?”

“네. 신경 써 주신 덕분입니다.”

“다행이네. 배고플 텐데, 얼른 먹자.”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곤 마른 빵조각을 집어 들었다. 오래 씹어야 하는 단점은 있었으나, 맛이 담백해서 먹을 만했다. 슬쩍 시몬을 살피자, 그도 나쁘지 않은 듯 음식은 대체로 잘 먹고 있었다.

“왜 자꾸 눈치를 보는 거야?”

그녀가 이 상황을 꽤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모양인지 시몬이 물었다. 플로라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몬은 괜찮나 해서요.”

“보고 있다시피 난 멀쩡해.”

“……살은 많이 빠지셨는걸요. 저 때문에 괜히 하지 않아도 될 고생까지 하신 것 아닌가요?”

“그야 누가 날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

“입맛이 없더라고. 어쩔 수 없잖아.”

장난스러운 말 속에는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그간의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 플로라가 빵조각을 접시에 내려놓고 시몬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드실 건 드셔야죠. 저는 시몬이 잘 지낼 거라고 굳게 믿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습니다.”

“나도, 이 정도면 잘 버틴 거야. 플로라.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시몬은 덤덤한 목소리를 내었지만, 눈빛에는 그간 그가 느껴왔을 슬픔과 절망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했다. 지금은 그 눈동자 안에 자신을 담고 있음에도.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시간들이 아득하게 느껴져 그에게 불쑥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 제가 떠나는 것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몬이 정신을 잃은 모습을 직접 보고 나니…… 그 방법밖에는 떠오르지가 않았어요.”

“그래. 네 마음도 이해해. 나도 떨어져 있는 동안 널 이해하려고 수도 없이 노력했으니까.”

시몬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말을 멈췄다.

“너도 알게 모르게 압박을 느끼고 있었겠지. 센칸에서는 협박을 당했을 테고, 두렵고 흔들리는 와중에 나는 다쳐서 정신을 잃기까지 했으니…… 그래,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어.”

“…….”

“근데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붙잡을 틈도 없이 사라져 버리니 허망하더군. 내가 건강하게 있어야, 네가 돌아와서도 안심할 거란 걸 알면서도 마음을 잡기가 쉽지 않아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이게 최선이었어.”

“제가 괜한 얘길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시몬의 탓으로 돌리려고 했던 말은 아니었어요. 저도 제 선택을 많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플로라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솔직히 말해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플로라는 잠시 고민했다.

“시몬.”

“…….”

“저도 시몬의 곁에 오래 남아 있고 싶어요. 좋아하는 사람의 옆에서 떨어지고 싶어 하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또 이런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고 약속은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번에 후회했던 기억을 잊지 않겠습니다.”

플로라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시몬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왜인지 놀란 것도 같고, 당황한 것도 같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살짝 발그레 달아오른 뺨도 선연하게 보여 플로라는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시몬?”

“……아. 미안. 심장이 뛰어서.”

시몬이 멋쩍게 웃으며 심장 부근을 매만졌다.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처음 이성의 고백을 받고 수줍어하는 어린 소년처럼, 달아오른 뺨을 보아하니 플로라도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어 대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전염이 된 것인지, 무겁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어서인지, 안심이 되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을 느끼는 지금이 무척 행복했다. 그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네가 다시 떠나면…… 그때도 내가 갈게. 플로라.”

“…….”

“솔직히 조금은 걱정했어. 네가 날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아서, 마음이 변해서 간 건 아닐까 하고. 네가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날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거라고 믿지 않으면 정말 미칠지도 몰라서 꾸역꾸역 믿고 있었거든.”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이제 어렵지 않았다. 시몬도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도 조금은 걱정하고 있었어요. 시몬이 절 잊었을까 봐. 떠나 있을 땐 차라리 절 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참 간사해요. 다시 이렇게 만나고 나니 절 잊었을까 두려워하는 걸 보면요.”

그래도 어렵지 않은 것뿐, 수줍은 것은 별개다. 플로라가 흘러넘치는 달콤함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네칸에 돌아가서 상황이 정리되면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아. 플로라.”

“…….”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좋은 곳도 놀러 가고 싶어. 네가 함께해 준다면 없던 입맛도 돌아올 것 같아. 난 지금 이 말라비틀어진 빵도, 고기보다 맛있게 느껴지는걸.”

시몬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죄인이 된 마음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인지 남모르게 안고 있던 불안감은 조금 해소가 되었다.

플로라는 용기 내어 다시 시몬을 올려다보며 수줍게 웃었다.

“일단 빨리 상황을 정리해야겠지. 하네칸이 당분간은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혹시 리비에르에게 전해 들었어? 네가 누군지 발표하게 될 것 같아.”

“……네. 들었습니다.”

“괜찮겠어?”

“네. 저도 이제는 아버지의 딸로 살아가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해 주세요.”

시몬은 플로라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것이 변할 거야.”

“……네. 각오하고 있어요.”

“그리고 센칸도 처리해야겠지. 네가 마지막에 활을 쐈던 그 사람이, 아이든이라는 작자지?”

“그렇습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센칸으로 넘어갔다. 아이든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와의 마지막 기억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나쁜 감정이 이 행복한 마음을 들쑤시는 것이 불쾌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