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플로라 경.”
버둥거리는 꼴이 속 시원하기도 했다. 플로라는 그녀를 이대로 죽일 생각도 잠시 했다. 센칸이 손해 보는 일이지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여자가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알렉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다면…… 이 목숨값이라도 받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어느새 얼굴이 벌게진 그녀는 급하게 플로라의 팔을 붙든 채 컥컥거렸다. 아마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정말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여자의 숨통을 끊어 놨을지도 몰랐다.
플로라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여자를 놓아주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카나락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가 잠시 놀란 듯 플로라와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연구원은 누가 보아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 사태를 확인한 연구원들이 기사들을 부르기 위해 다급하게 움직였다. 상황을 파악한 모양인지 카나락은 성큼 플로라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아이든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플로라가 반쯤 멍한 얼굴로 그리 물었다. 카나락이 자신을 딱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따라오시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같이 찾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여기 계속 있으면 위험할 것 같군요.”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말이었으나, 사실 플로라의 귀엔 잘 들리지 않았다. 오직 알렉샤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으까. 그저 같이 찾는 것을 도와준다기에 그를 따라나섰다.
* * *
바다가 출렁거리는 모양새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시몬은 문득 제게로 다가온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에르네가 등 뒤에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시몬은 하네칸을 떠나 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기까지 일어났던 많은 우여곡절을 떠올렸다. 살면서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가 본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플로라를 떠올리면 하루가 더뎠으나 그녀를 되찾으러 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고 생각할 때면 시간이 물 흐르듯이 흘러 계속해서 부족하고 아쉬운 것만 보였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
아쉬운 것만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자신감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플로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품어주던 성을 떠나 이곳에 나왔으나, 막상 나와 보니 이 계획이 차질없이 성공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연히 실패 따위는 가정조차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미흡함으로 인해 혹여 플로라가 다치진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언제나 잘해 오셨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그러실 겁니다.>
시몬은 에르네의 위로에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나 잘 버티고 있었지. 위태롭게.”
먼 곳을 바라보니 탁 트인 풍경에 속이 뻥 뚫리다가도, 다가올 앞으로의 일을 떠올리면 먹먹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활시위는 당겨졌다. 자신은 지금 그토록 그리고 기다리던, 플로라를 만나러 가고 있는 것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날이 찹니다. 이러다 이든에게 또 잔소리만 들으세요.>
“……들어가야지.”
시몬은 이든을 떠올리자, 아직 듣지도 않은 잔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아 고개를 설설 저었다. 이든에게 걸리기 전에 어서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시몬은 걸음을 옮겼다.
* * *
플로라는 생각보다 빠르게 아이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테스트나 연금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층이 아닌, 루엘들이 기거하는 더 깊숙한 지하에 있었다. 루엘들의 거처는 플로라에겐 익숙했지만, 카나락에게는 더없이 신선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작은 방에 사람들이 겨우 누울 만한 자리를 두고 몰아 둔 걸 보며 카나락의 표정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게 보였다.
아무튼 방 세 개 정도를 뒤적거렸을 때, 멀리서 희미한 비명이 들렸으므로 플로라는 그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곳에 아이든과 알렉샤가 있었다.
플로라가 방문을 열어젖히자, 가장 먼저 퀴퀴한 냄새가 훅 코끝을 타고 들어왔다. 알렉샤는 의자에 묶여 있었고,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을 한 채였다. 다행히 정신은 있는 모양인지 플로라를 발견하고 울먹거렸다.
“플로라?”
채찍을 들고 있던 아이든이 플로라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이든. 지금 뭐 하는 거야?”
“뭐가?”
“알렉샤 경에게 무얼 하고 있는 거냐고.”
“아…… 훈련 중이지.”
“일방적으로 사람을 묶어놓고 패는 게 훈련이라고?”
플로라의 말에 아이든이 자신의 손에 들린 채찍을 내려다보았다가, 히죽 웃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플로라.”
“아이든.”
“지금 얠 감싸고 도는 거야? 걱정이 되어 허락도 없이 이곳까지 내려온 건가?”
순식간에 아이든의 목소리가 매섭게 변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흉흉한 기세에 플로라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뒤늦게 그녀를 따라온 기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이든이 그들을 노려보았다가 다시 플로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플로라는 아이든에게 물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알렉샤 경이 무얼 잘못했기에 이러는 거냐고.”
이미 알렉샤의 반쯤 찢겨진 상의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맞은 것인지 몸에 힘도 없어 볼품없이 흐느적거리는 모습이었다. 어서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네 옆에서 얼쩡대는 게 잘못이야.”
“아이든.”
“그래도 네게 약속한 것처럼, 죽이진 않을 거야. 그럼 되잖아. 그러니 날 짐승 보듯 할 거 없어, 플로라.”
“지금도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데 그만해.”
아이든이 고개를 갸웃하며 알렉샤를 내려보았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다 이내 채찍을 내던졌다.
“그래. 마침 재미없어진 참이야.”
“…….”
“이렇게 만난 거, 우린 산책이라도 하러 갈까?”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사람을 저렇게 만들어놓고 해맑게 웃는 모습이라니.
늘 느끼고 있지만 이런 광경을 보니 더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이런 불합리한 곳에서 어떻게든 예쁨 받고 살아 보겠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니…… 과거의 제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아이든.”
“……응? 플로라.”
“넌 정말 이렇게 사는 게 좋아? 아무렇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라비우 전하에게 당하는 폭력을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거잖아.”
“…….”
“마력에 대한 연구는 네가 할 일이고, 이곳이 존재하는 이유니 이해할 수 없는 실험들을 진행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는 건 아닌 것 같아.”
플로라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참아야 하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피범벅이 된 채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알렉샤를 보니 제어가 되지 않았다. 플로라의 말에 아이든이 미간을 찡그렸다.
“네가 요새 내 관심을 좀 받는다고 잊은 모양인데, 플로라. 방금 네 입으로 말한 것들이 너희가 존재하는 이유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근데 넌 뭐가 그리 불만인 거야?”
“…….”
“센칸에 제대로 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면 나라도 즐겁게 해 줘야 하는 게 맞잖아. 내 기분이 풀리면 연구도 더 잘 진행될 테니까. 근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심기나 불편하게 만들고, 밥만 축내고 있으면 되겠어? 너무 이기적인 생각 아니야? 왜 날 미친 사람으로 매도하는 거야.”
아이든은 억울한 듯 말하다가, 화가 난 듯 딱딱하게 목소리를 저음으로 깔아 내렸다.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이런 얘기 그만하고, 올라가자. 이 이상의 무례는 아무리 너라고 해도 못 참을 것 같아.”
아이든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플로라를 지나쳐, 복도에 서 있던 기사들 앞에서 멈췄다. 퍽, 뺨을 한 대씩 얻어맞은 기사들이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너희의 처벌은 조만간 진행하겠다.”
아이든은 낮게 중얼거리곤 도도한 고양이처럼 복도를 거닐었다. 플로라는 아이든의 더한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그를 따라나서야 한다는 걸 알았다.
“카나락 님, 알렉샤 경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알렉샤의 상태가 걱정되었으나 깊게 살필 여력은 없었다. 아직 카나락에 대해 잘 모르고, 그를 신뢰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지금 이 순간은 그라도 옆에 있다는 것이 안심되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순 없다 하더라도, 그가 지금껏 제게 호의적이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네. 제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플로라 경은 혼자 가셔도 괜찮은 겁니까?”
“네. 제게는 함부로 손을 못 댈 겁니다. 괜찮아요.”
알렉샤가 걱정스럽단 얼굴을 했으나, 플로라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채 복도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아이든과 내가 나눈 이야기를 경들은 들었을 거야.”
“…….”
“정말 이런 취급을 받으며 사는 게 괜찮아?”
그들도 루엘을 거쳐 어엿한 기사단의 일원이 된 자들이었다. 목숨 걸고 피 터지게 훈련해도 결국은 아이든에게, 센칸에게 개처럼 굴려질 인생이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아이든이 당연히 그게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말했듯, 그건 바뀌지 않을 굴레였다.
플로라는 아직도 잘못된 점을 깨닫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아이든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