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플로라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있는 기사들은 열 명 남짓 되었다. 대부분 익숙한 얼굴들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도 있었다. 정식으로 특별 수업을 허가받은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허가받을 거란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의외로 아이든은 플로라에게 나머지 훈련을 받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비밀인 일이었다.
알렉샤 혼자 가르칠 때와는 달리, 머릿수가 많아졌으니 플로라도 나름의 고민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그냥 몰래 가르쳐 봤자 이정도 인원이 모이는데 언제고 말이 새어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보고하지 않고 행하면 문제가 될 일이겠지만, 보고를 했으니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모인 이들도 홀가분한 것처럼, 또는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을 받고 있자니 자신이 무슨 일국을 구한 영웅이라도 된 것 같았다.
“다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날 따르겠다고 모여 준 것인지 모르겠지만…….”
플로라는 주변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미동조차 하지 않으며 어떤 말도 놓치지 않기 위해 경청하는 모습들이 부담스러웠다. 바싹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훑은 그녀가 뒷말을 중얼거렸다.
“어쨌든 고마워요. 같이 열심히 해 봅시다.”
“네!”
“우리가 가는 길은 아주 험난할 거예요. 대단한 걸 생각하셨다면 오산입니다.”
아마 하네칸에서의 기사단 생활이 없었다면,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무얼 한다는 것 자체도 어색했을 거다. 혼자인 것이 편한 사람이라서. 아마 복수를 하더라도 나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의 질서에 혼란을 줬을지언정 동료로는 세우지 않았을 거다.
대외적으로 이 모임은 ‘허락받은 업무 외 시간’이었지만, 사실 센칸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자 하는 혁명가들의 비밀 모임이었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플로라가 이 센칸에서 떠날 무렵 함께 기사단에 있었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플로라가 떠난 직후부터 끊임없이 센칸의 올바르지 못한 연구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주어지는 비윤리적인 임무 등 잘못된 부분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플로라처럼 다수와 싸워 이길 자신도, 그렇다고 삶을 비관해 제 목숨을 끊을 용기도 없어 이렇게 휘둘리기만 했다고. 하여 죽게 되더라도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아 보고 싶다고 했다.
예전 같았다면 들은 체도 하지 않았겠지만, 변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플로라 또한 이제는 그들의 말 또한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도 얼마나 좋은 건지 알았다.
전투기술은 일을 치르는 데에 있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이었기에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행히 모두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 그런지 열심이었다.
“라비우 왕이 다음 주에 이곳을 방문합니다. 우리는 그 전에 이곳을 정리할 거예요.”
“저어…… 플로라 경. 그건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많은 변수가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도 변수를 만들어야 해요.”
플로라는 파르베를 떠올렸다. 그의 마법 능력이 어디까지 향상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네칸의 마스터처럼 마력을 전투에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 한 명의 파급력이 우리 전부를 몰살시킬 수 있었다.
“아이든의 연구에서 성공작이 나온 건 다들 아실 테죠.”
“……혹시 파르베 경을 말씀하십니까?”
“네.”
모인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서 알렉샤 역시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식당에서 파르베를 만나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불완전하긴 하지만 그도 마법을 쓸 줄 압니다. 라비우 왕이 마법사도 특별히 고용해 붙여 주었어요.”
플로라도 한때 그런 특혜를 받았던 적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기사들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모양인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가 무언가를 더 배우고,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승산이 없어집니다. 그 전에 빨리 일을 해치워야 해요.”
“파르베 경이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정말 위험하겠네요. 지금도 훈련할 때 가끔 마주치면 무척 살벌하거든요.”
다른 기사들이 동조했다. 파르베가 마법을 쓴다는 것을 상상했는지, 순간 모여 있던 기사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사라지려는 것이 보였다.
“아직은 완벽하지 않아요. 승산 있어요.”
“알렉샤에게 말을 전해 듣고, 모이기는 했는데 경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함께해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됩니다. 큰 전투를 벌이려면 능력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일단 계속해서 훈련에 임해 주세요. 또한 지금까지 하셨던 대로 주변 동료 기사분들을 설득시켜 주세요. 물론 믿을 수 있는 자들에게, 이야기가 잘못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시는 것 잊지 말고요.”
“네!”
“그럼 다시 움직이시죠.”
플로라의 명령에 기사들이 빠릿하게 몸을 움직여 훈련을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포지션의 훈련을 해야 했다.
알렉샤 또한 활을 만지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모든 훈련이 끝나고, 알렉샤는 취미처럼 활을 쏘곤 했지만 전처럼 플로라가 계속 봐 줄 수는 없었다.
“다시 플로라 경에게 활을 배울 수 있는 날이 올까요?”
“……그래야지.”
플로라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먹은 뒤였다. 다른 사람들은 내보내더라도 그녀 자신만은 이곳을 빠져나갈 각오가 없었다. 죽음을 불사한 각오였다. 만약 일을 치르다 죽게 되더라도…… 다신 시몬을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센칸의 메린 섬만큼은 완벽하게 무너뜨릴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네요.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숲을 빠져나가시죠.”
“……먼저 가도록 해. 저녁에는 아이든과 식사를 하기로 해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 옆에 있다가 괜히 그의 눈에 띄어 좋을 것 없어.”
“또 연구에 참여하시는 건가요?”
알렉샤의 시선이 잠시 플로라의 팔에 머물렀다.
오늘의 이 비밀 훈련을 얻어 내기 위해, 플로라 경도 한 가지 정도는 내어 줬을지 모르겠단 생각을 문득 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진 못했다.
“글쎄…….”
알렉샤는 더 묻지 못하고 힘겹게 발을 떼어야 했다.
그렇게 혼자 남은 플로라는 조금 더 그 깊은 숲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날이 금세 쌀쌀해져서 몸을 웅크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이 더 높고 넓게 보여서 해가 저물며 새하얀 하늘을 붉게 태우는 것이 더 잘 보였다. 딱딱한 흙바닥에 오래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다 보니 으슬으슬 뼛속까지 한기가 올라오는 듯해졌다. 떠나야겠다는 생각보다, 문득 그동안 센칸을 떠나 지냈던 삶들이 떠올랐다. 하네칸에서 지내던 일들보다 훨씬 이전의 일들이.
겨우 센칸에서 도망쳐 살아남았고,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저를 지키려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던 사람들도 떠올랐고, 산에서 아등바등 살아 왔던 시간들도 소중한 기억들이 되어 머릿속을 유랑했다.
만약에 이곳에서 살아남게 된다면 이번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시몬에게 돌아가기는 두려웠다. 자신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는 건 더 이상 원치 않았다. 하네칸에는 참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 천지여서, 그녀가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마당에 어디로 떠나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우습긴 했지만 희망찬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될 때가 있었다.
살아남아도 하네칸으로 가지 않을 거란 사실은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상상은 자유이니까. 약간의 기대와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복잡했던 기분이 점차 나아졌을 때쯤이었다.
누군가 지척까지 다가온 인기척이 들렸다.
센칸에서는 습격을 당할 일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고 있었다. 플로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 앞에 선 이를 보고 와락 얼굴을 구겼다. 짧게 잘린 턱수염이 뺨까지 드문드문 난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스치듯 한 번 본 것이 전부였지만, 플로라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아, 플로라 경…… 맞으시죠? 반갑습니다.”
무표정일 때는 무겁고 진중해 보였지만, 입꼬리를 말려 올린 지금은 어쩐지 친근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플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카나락 님.”
이번에 메린 섬에 새로 오게 된 마법사였다. 파르베를 위해 라비우 왕이 직접 고용한 마법사……. 라비우 왕이 고용했다고 하니, 센칸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해 그가 아무리 서글서글해 보여도 좋게 대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곧 해가 저뭅니다. 어두워지면 길을 찾기 어려우실 거예요.”
“아…… 그게…….”
카나락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잠깐 산책을 하려고 했는데, 이곳까지 와 버렸습니다. 이미 길은 잃은 모양입니다.”
귀찮아……. 플로라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곤 카나락에게 대꾸했다.
“따라오시죠. 성까지 안내하겠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제가 방해한 것 같아 마음이 쓰이네요. 죄송합니다.”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깊게 말을 섞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다. 플로라는 차갑게 대꾸하고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뒤에서 카나락이 조용히 그녀를 따르는 듯한 인기척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