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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25)화 (125/154)

125.

사유는 알 수 없었지만, 플로라의 테스트는 취소가 되었다. 연구실이 채 정리되지 않은 탓도 있었고, 아이든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일어난 모양이었다. 아이든을 괜히 자극하고 싶지 않아 이유는 묻지 않았다. 돌아가라면 돌아가라는 대로, 얌전히 연구실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긴 연구실의 복도를 지나쳤다.

혹여라도 아이든이 말을 번복하진 않을까 날쌘 걸음으로 복도를 거닐던 도중, 파란 눈을 가진 어린아이를 만났다. 아이보리 색상의 원피스 차림을 한 소녀의 눈빛은 영롱했으나, 영혼은 잃어버린 것처럼 공허하기만 했다. 소녀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플로라를 슥 보았다가, 연구원이 이끄는 대로 다시 종종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모습은 익숙했다. 아는 아이여서가 아니라, 이 센칸에서, 그리고 이곳에서 저런 아이들은 흔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훤히 드러난 가녀린 팔목에는 멍이 생겨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무얼 하는지 정도는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 분명 지긋지긋하리만치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와 눈을 맞췄던 순간, 플로라는 갑자기 머리를 가격당한 듯 멍해지는 걸 느꼈다.

이 와중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은밀히 움직이는 중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그조차 변명처럼 느껴질 만큼.

‘난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애초에 원하는 것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은 맞나?’

플로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저만한 나이였었다. 비슷한 눈빛을 가졌던 것 같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아이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 플로라는 이를 악물었다.

겨우 방으로 돌아온 플로라는 자신의 옷 속에 숨겨 두었던 아이든의 연구일지를 꺼냈다. 테스트용 옷으로 갈아입을 때 들키지 않을까 긴장하고 있던 것이 테스트가 무산되어 생각보다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메린 성의 지하에서 마주했던 아이의 모습이 도저히 잊히지 않아 기분은 여전히 더러웠지만, 잠깐의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플로라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이든의 죽음뿐 아니라 센칸이, 메린 성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라비우는 아이든이 죽는다고 해도, 다른 적임자를 찾아냈으면 냈지 이런 비인간적인 실험들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아이든 뿐 아니라 이곳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구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할 수 있을까?”

포부를 다시 한번 다짐해 보긴 했지만 순간 자신이 없어졌다. 이 섬은 너무 크고, 그 안에 존재하는 플로라 자신은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자신의 편이 되어 주겠다고 한 센칸의 기사들이 있었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그들을 괜히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 또한 들었다.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사람들이 제 곁에 있었다면. 

갑자기 시몬과 카신 단장, 그리고 에르네 대장이 보고 싶었다. 높은 곳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운명이 갈릴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매번 무슨 생각을 해 왔던 걸까. 어떤 짐을 짊어지고 살았던 걸까.

플로라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의식중에 시몬의 생각을 해 버리는 날이면, 이후로는 그 어떤 것도 할 의욕이 사라지곤 했다. 오늘 역시 그러한 듯했다.

* * *

많은 꿈을 꾸었다. 그녀가 힘들게 인생을 살아 온 과정에 대한 장면들이었다. 어떤 장면은 시간이 아주 느렸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빨랐다. 후회와 절망,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 안에 작은 행복과 기쁨, 사랑 또한 있었다.

이브니에, 그녀가 꿈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은 카신을 만난 이후의 일들이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꼽으라면, 카신과 함께 무언가를 하던 때일 것이다.

잿빛의 머리칼과 희고 고운 피부, 푸른색 눈동자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가슴을 선덕거리게 했다. 자신의 단장 같은 기사가 되고 싶었고, 그를 동경하고, 사랑했다. 몰래 그를 숨어 지켜보기도 하고, 함께 밥을 먹고, 성 밖으로 외출을 나가 데이트를 하자고 조르기도 했다. 거절당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그 순간들이 소중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복이 깨어진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경이 날 속인 거였어?’

자신을 보는 혐오의 눈빛 또한 똑똑히 기억한다. 지금껏 제 마음을 무시당해 왔고, 대장이 자신을 밀어내고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큰 착각이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처음 보여 준 그 혐오의 눈빛에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았다.

‘네가 이 일을 나중에라도…… 지금이라도, 먼저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건. 우릴 믿지 못한 거야. 대장이라고 따른다면서. 나를. 그리고 하네칸을.’

분을 못 이겨 그런 것인지 눈시울이 붉어진 것도 같은, 대장의 모습에 목이 메었다. 다시 생각해도 가슴부터 뻐근해지며 숨이 막혔다. 왜 그랬을까. 후회는 늦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왜 그런 짓을 벌였을까 하는 자책이 들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본 적 있었다. 이미 늦었겠지만,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주어진다면 그러고 싶었다. 이브니에는 단장의 눈빛에 피어난 눈빛을 견디기 버거웠다. 한 번도 제대로 믿어 본 적 없는 아르제카 신께 빌었다. 한 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그 견디기 힘든 혐오의 눈빛을 받다가, 어떻게 되었더라…….

이브니에는 순간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작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눈앞에 꿈속을 유랑하며 계속 그리던 이가 보였다. 다시 또 꿈속인가, 아니면 아르제카 신의 은총인 걸까, 그도 아니라면 단순한 기적인 걸까.

자신을 걱정스레 들여다보고 있는 푸른 눈을 마주하자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꿈이 분명했다. 눈을 뜬 지금에서도 그가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던 표정을 잊지 못하는데, 갑자기 이리 걱정하는 눈을 보여 줄 리 없지 않은가.

“이브니에 경?”

먹먹했던 청각도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카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이브니에의 눈시울이 붉어진 듯하자, 그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조금만 기다려. 치유사를 불러올 테니.”

이브니에가 눈을 떴다는 사실이 카신의 심장을 거칠게 뛰게 했다. 그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돌려 방을 나섰고, 건물에 상주하고 있는 신관들을 불러왔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이브니에는 도로 정신을 잃은 채였으나, 그녀가 단순히 잠에 빠진 거라는 말을 전해 듣고 카신은 안심했다.

깨어나지 않는 시간이 길어 걱정이 깊어지다 보니, 이제는 헛것까지 보인 줄 알았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여러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다방면으로 뻗쳐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드디어 미쳐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카신.”

“아, 이든.”

다시 잠든 이브니에의 얼굴을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카신은 이든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방에 들어온 이든이 이브니에를 살피고 있었다.

“깨어나지 않아 걱정했는데, 잘됐네.”

“그래. 잘된 일이지…….”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깨어나지 않을 땐, 자신의 품에 안겨 죽어가던 그 모습이 선해서 괴롭고 걱정되더니…… 그녀가 다시 깨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랐지만, 이제 그녀가 눈을 뜨고 나니 다른 이후의 것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잠깐 잠든 거니까 금방 다시 정신을 차릴 거야.”

“……바쁜 와중에 고맙군.”

“카신, 좋은 단장이네. 자기 부하는 끝까지 챙기고.”

이든이 느른하게 웃으며 이브니에에게 치유력을 불어 넣었다. 그동안 시몬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기에 이브니에는 신경 쓰지 못했었는데, 그럼에도 그녀가 꿋꿋하게 독을 이겨내고 깨어났다니 기특하단 생각이 들었다.

배신자든 첩자든 뭐든, 이든에게 지금 당장 그녀는 자신의 치유력이 필요한 아르제카 신의 아이일 뿐이었으니까.

“금방 깨어날 수 있겠지?”

“응. 내가 치유를 멈추기 전부터 해독은 거의 되어 있었어. 갑자기 건국제 행사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신경을 쓰지 못해서 좀 더디게 회복되었을 뿐이지.”

그렇다고 치유를 아예 멈춘 것은 아니고, 이든이 아닌 다른 신관들이 이브니에를 돌봐 주기는 했다. 하지만 역시 이든만큼의 치유력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강력한 독에는 한참 부족했던 모양이다. 새삼 그의 위치가 실감이 났다.

“그럼 난…… 폐하께 보고를 드리러 가야겠어. 잘 부탁해. 이든.”

이든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신이 방을 완전히 빠져나간 뒤에야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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