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아이든의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쳤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광기에 물든 것처럼 보여 순식간에 위협을 느꼈다. 여기서 마력이 돌아왔다고 대답한다면 당장에라도 실험실로 끌고 갈 기세였다.
그녀는 하네칸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고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을 것. 플로라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눈을 먼저 피하지도 않았다.
“마력이 돌아왔으면 하네칸에서 마스터 대접을 받으며 유명해졌겠지. 그렇지 않아?”
말을 하는 동안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아이든은 진심인지 거짓인지 가늠하는 듯한 눈빛으로 플로라를 보았다. 살짝 흘기듯 바라보는 눈빛에 불신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이내 어떤 오점도 찾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가 낯빛을 싹 바꾸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너도 마력에 대해 궁금했잖아. 하네칸에서 배운 건 없어? 성에는 대마법사도 있을 텐데.”
플로라는 어쩌면 이 정신 나간 놈이 이미 리비에르가 자신의 양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허리춤에 숨겨 둔 단도 쪽으로 손이 옮겨갈 것만 같았다. 죽이고 싶었다.
아이든처럼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저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님을 알기에 플로라는 애써 살기를 억눌러야 했다. 태연함을 가장하며 답하는 플로라의 얼굴에선 여전히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배우다 못해 안 된다는 걸 알고 진작에 포기했잖아. 전하께서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마법사들을 데려와 계속 도와줬지만 실패했었고. 하네칸에서 마법을 배운다고 뭐 달라지겠어. 아이든, 내 치부를 이렇게 드러내야겠어? 예전처럼 가서 실험이라도 해 볼까?”
플로라의 차가운 대꾸에 아이든이 주눅 들었는지 금세 한발 물러섰다.
“파르베 경이 말하길 네게 아직도 마력이 있다고 했어. 그래서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파르베 얘긴 꺼내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아이든.”
“왜?”
“왜냐고? 그는 날 죽이려고 안달 난 작자니까.”
“그거야 우리의 명령 때문에…….”
“아이든. 그럼 널 미워해야 해?”
“아니, 아니…… 그건 아니야. 플로라. 진정해.”
“난 지금 누구 하나 미워해야 할 사람이 필요해. 지금은 그 사람이 파르베야. 그러니 그 작자 얘기는 꺼내지도 마. 내 눈에 띄지도 않게 하고. 네 소중한 성공작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알았어.”
아이든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반쯤 고개를 숙였다. 잘못해서 혼나는 사람처럼 비굴하고 불쌍하게 구는 것도 보기가 불쾌했다. 의심을 피하고자 좀 더 강하게 나가기는 했지만, 방금 한 말이 반쯤은 진심이었다. 대놓고 적의를 표현할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선 아이든을 죽이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다치게 할지 몰랐다. 이 센칸에서 플로라는 이제, 그녀 자신답게 살 수가 없었다.
“네 마음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거 알아. 플로라.”
뜸을 들이던 아이든이 말을 걸었다.
“그래도 난 네가 와서 기뻐. 내가 얼마나 기쁜지는 잘 알 거야. 다른 실험체들이었다면 죽이고 말았을 텐데.”
“아이든. 나 피곤해.”
“……알았어. 내일은 식사 꼭 해야 해. 알았지?”
“그럴게.”
플로라의 말에 아이든이 무언가 더 말을 붙이고 싶다는 듯 주춤거리다 이내 방을 나갔다. 미친놈. 그가 사라지자마자 플로라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이 욕설이 터져 나왔다. 플로라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마저 사라져, 그대로 침대에 누워 옆에 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해가 저물고 있는 하늘이 보였다. 시몬, 그는 깨어났을까. 이제 그의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릿하다 못해 눈물이 났다. 약해지면 안 된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면 늘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져 버린다.
그래도 당신이 괜찮다면…… 그걸로 됐어.
플로라는 전하지 못할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플로라가 사라진 하네칸의 성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리비에르는 길길이 날뛰었고 카신과 에르네는 플로라의 행방을 암암리에 조사하기 시작했다.
“……에르네.”
<예. 폐하.>
겨우 눈을 뜬 시몬도 그 사실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신경이 움찔거릴 때마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픈데도 불구하고, 눈조차 편히 감을 수가 없었다. 플로라가 사라졌다니. 이 성에 그녀가 없다니.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실 의심 가는 건 한 곳뿐이었다.
“플로라는 찾았나?”
<……아직 수소문 중입니다. 변고를 당한 것이라면 하네칸 어딘가에 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센칸에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센칸…….”
<하지만 그녀가 제 의지로 센칸에 돌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도 배제하셔서는 안…….>
“플로라가 그럴 리 없다.”
시몬은 쓸데없는 소리에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군주의 상태도 좋지 않은데 마음을 더 들쑤셔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에 에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이든이 황제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폐하. 오늘도 제대로 못 주무신 겁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시몬의 상태를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곁에서 오래 함께하다 보니 눈빛만 보아도 그의 상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시몬이 힘없이 웃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따뜻하게 치유 마력을 불어 넣어주었을 땐 새근새근 잘 자는 것 같더니. 금세 또 깨버린 모양이었다. 이든은 걱정 어린 눈으로 에르네를 바라보았다.
이런 몸 상태로는 푹 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지금 시몬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도 이든은 알 것 같아, 친구로서, 그리고 신하로서 마음이 아팠다.
이든도 이 하네칸의 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플로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역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대놓고 드러낼 수 없어 이리 고요한 바다처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얼른 쾌차하시려면 잠을 좀 주무셔야 합니다.”
“자꾸 악몽을 꿔. 소중한 사람이 곁에서 하나둘씩 떠나가는 꿈이야.”
그가 아랫입술을 잘게 떨었다.
“설령 다른 사람이 다 떠난다고 해도, 저와 에르네 경은 폐하의 곁을 지킬 겁니다.”
“…….”
“오늘은 제 마력을 다 쓰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의 곁을 밤새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든. 괜찮아. 네 몸도 생각해.”
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물러서지 않을 기세라서, 시몬이 힘없이 웃으며 졌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잠을 잘 수 있게만 해줘. 밤새 지키는 건 사양할게.”
“알겠습니다.”
명령이라도 내릴 것 같아, 이든은 한발 물러섰다. 대신 시몬을 재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자신이 소중한 친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시몬은 눈을 감기 전 침대 발치에 서 있는 에르네를 보았다.
“에르네, 내가 부탁한 것에 대해선 최대한 빨리 서둘러줘.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건 알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부탁해보겠네.”
<예, 폐하.>
에르네는 시몬이 눈을 감는 것을 보고 나서야, 부단장과 임무를 교대하고 침실을 나설 수 있었다.
* * *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가 놓자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빠르게 날았다. 하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새들 근처에는 닿지 않았다. 새를 잡기는커녕,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푸드득 도망만 쳤다.
“집중해.”
상황을 지켜보던 플로라는 차가운 목소리를 내며 알렉샤를 혼냈다. 알렉샤가 주눅 든 표정을 한 채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다시 심호흡했다.
이번엔 다른 쪽에 내려앉은 새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자 명중 당한 새가 철푸덕 쓰러졌다. 알렉샤가 그제야 환한 얼굴을 하고 플로라를 보았다.
“플로라 경! 제가 해냈어요.”
“잘했어. 감을 더 익혀야 되겠어.”
“보기보다 어렵네요. 더 노력하겠습니다.”
플로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입 기사들이 나무 기둥에 숨거나 혹은 대놓고 슬금슬금 모여들어 어느새 이 수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알렉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그새 많아졌네요.”
“귀찮게 됐군.”
“플로라 경을 다들 존경하고 있어요. 저를 부러워하는 것 같아요.”
“존경할 사람이 퍽도 없는 모양이야.”
“……플로라 경은 우리의 영웅이에요.”
“내가 왜? 다들 나처럼 이 섬을 탈출하고 싶은 모양이지?”
플로라가 퉁명스레 말하자 알렉샤는 그저 입을 다문 채 마른침만 삼켰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알렉샤를 뒤로한 채 플로라는 이 장소를 떠났다. 괜히 여러 사람의 눈에 띄었다간 아이든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무엇을 하든 아이든의 눈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를 마주할 일을 하루라도 늦출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