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플로라가 라비우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라비우가 보냈던 초대장은 무시했기 때문에 최대한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지만,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었나보다.
귀족과 황족, 그리고 기사들까지 전부 얼굴의 반을 가리게 되는 가면무도회. 플로라도 호위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틈틈이 기사들과 손짓을 통해 이상 없다는 신호를 주고받으며 연회장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여전히 아름다운 머리칼이야.”
등에서부터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 플로라는 차마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서 있어야 했다. 가까이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둥, 둥, 위험 경보가 울려댔다.
“플로라. 나의 아이야.”
높은 곳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던 라비우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눈앞의 광경이 변하는 듯했다. 자신이 센칸의 경기장에 피칠갑을 한 채 주저앉아 라비우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보고 싶었다.”
바짝 다가온 서늘한 기운에 턱 근육이 바짝 조여졌다. 금방이라도 목이 졸릴 것 같은 기분에 몸 안이 말라가는 듯했다.
“내가 보낸 편지는 보지 못한 것이냐.”
참, 그게 언제였더라…….
편지를 받고 플로라는 고민에 빠졌었다. 라비우의 부름에 응답해야 하는지, 아니면 무시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는 무시였다. 그만큼 시몬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고, 라비우에게 다시는 놀아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또 이렇게 만나야 될 사람들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구나.
플로라는 짧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뒤를 돌았다.
다른 기사들이 잠시 플로라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지난번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는 은근히 그녀를 챙기는 듯한 모습들을 몇몇 보였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누군가 자신을 봐 주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이대로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겠구나 싶어서. 이럴 때 보면 사람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입니다. 라비우 전하.”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된 덕일까. 플로라는 어쨌든 자신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라비우 역시도 그녀인 걸 확신하고 왔으니 아닌 척해 봐야 아직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일밖엔 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라비우의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얼굴을 가려 주는 가면이 그녀의 두려움을 숨기는 데에 한몫을 톡톡히 했다.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군.”
“…….”
“내 물음에 아직 답하지 않았는데. 답하지 않은 것이 너의 대답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나?”
“편하실 대로 생각하십시오.”
플로라의 말에 라비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가면 너머의 표정이 선연하게 보이는 듯했다. 지금까지 아이든은 몰라도, 라비우에게는 이런 식으로 반항해 본 기억이 없었다.
“얼굴을 보고 가지 못해 아쉽구나.”
라비우의 어조는 차분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문득 플로라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볼 수 있겠지.”
그래, 센칸이 너무 조용했지.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라비우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플로라의 옆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또 보자고. 플로라. 나의 아이야.”
나직한 음성이 그의 올가미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차분한 말 속에서도 위협이 느껴졌다. 사납고도 음습한 위협이.
플로라는 라비우가 제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며 시몬을 찾았다. 시몬이 어떤 옷을 착장했고,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지 기사들은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황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기사들이 이상 없다는 신호를 주고받는 것을 본 플로라는 안심했다. 마음이 조급하니 쉽게 그를 찾을 수 없어 갑자기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기사들을 발견하고 나니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플로라는 침착하게 시몬을 찾았다. 시몬은 사람들 틈에 섞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확실히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안심이 되었다. 어느새 사라진 불안감의 자리에는 그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대신했다.
* * *
‘얼굴을 보고 가지 못해 아쉽구나.’
드문드문 이해하기 어려웠던 라비우의 말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왕국에 일이 생겨 급히 먼저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시몬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플로라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라비우가 떠난다고 해서 하네칸에 남은 센칸의 모든 첩자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하루에도 불쑥 오르락내리락하던 불안한 감정들이 잔잔하게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그래봤자 고작 몇 시간 일찍 돌아간 것일 뿐 어차피 이 축제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오찬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황족과 귀족들이 티타임을 보낸 뒤 공식적 일정이 끝났다. 하네칸 제국의 건국을 축하해 주기 위해 왔던 귀빈들은 하나둘씩 각자의 일정에 맞춰 제 나라로 돌아갔다. 남은 축제를 더 보내는 것은 본인들의 선택이었다.
이제 시몬은 제국민과의 축제를 준비해야 했다. 그에 따라, 근위대도, 다른 기사단의 기사들도 스케줄이 바빠졌다. 어두운 밤, 시몬의 곁을 지키던 플로라도 단체 훈련에 참여하며 모든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했다.
아이든의, 그리고 라비우의, 파르베의 얼굴을 떠올리며 플로라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조롱하는 듯하던 라비우의 목소리도 계속해서 되새겼다. 시몬의 마음을 얻었다고 해서 제 본분을 잊지 않았다. 시몬을 지키는 것이, 그녀의 숙명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광장에서 성대한 축제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마을은 그녀가 처음 답사를 나갔던 때보다 더욱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성의 모든 시녀와 시종들이 모여 시몬이 제국민들과 마주하는 순간을 위해 새벽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높은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는 광장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가판대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액세서리나 먹을 것을 구매했다. 피의 분수라고 불리던 오래된 분수와 분수대 주변은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시몬이 걸어 올라갈 커다란 단상의 설치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단상과 쭉 이어진 길은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주변에는 하얀색 부바르디아를 가득 담아 둔 커다란 장식장이 자리했다.
오늘은 성에 있는 모두가 공식적으로 제국민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하나둘씩 완성되어 가는 아름다운 광경에 넋이 팔린 것도 잠시,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소란에 플로라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벌써부터 제국민들로 바글바글한 광장에서 범죄의 한 장면을 목격했다. 어린아이가 금화 주머니를 훔쳐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돈을 잃은 사람은 그런 아이를 쫓았고, 그 뒤를 기사들도 따랐다.
플로라는 자리를 이탈할 수 없었기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주변을 경계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축제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악단이 연주를 하고, 먼저 귀족들이 단상으로 입장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장 앞서 있어야 할 마르웰 가의 공작은 보이지 않았다. 플로라는 오전에 고용인들이 떠들던 말을 떠올렸다.
“마르웰 공작님께서는 건국제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신다며?”
“소문에 듣기론…… 가문에 안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이야.”
“무슨 일인데?”
“칸나 영애께서 사라졌다고 해.”
시녀들 세계의 소문은 빨랐다.
“저런. 어쩌다가? 영애께서는 우리 폐하의…….”
한참 잡담을 하던 고용인들은 시녀장이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말을 멈추고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었다.
왜 마르웰 공작이 단상으로 걸어 올라오지 않는지 정도에 대한 이유는 알고 있었기에 플로라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이어 소피와 네이라 그리고 리비에르가 하얀색 케이프 코트를 걸친 채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귀족들이 입장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함성에 플로라가 디디고 서 있는 높은 건물의 지붕마저 울리는 것 같았다.
리비에르가 웃으며 제국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의 아버지…….
그가 하네칸을 위해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는 플로라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붉은 레드카펫과 잘 어울리는 복장을 한 리비에르를 바라보며 플로라는 남몰래 웃었다. 당당하게 단상으로 오르는 그가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