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08)화 (108/154)

108.

하네칸은 매일 축제였다. 플로라는 근위대 인원이 워낙 적으니 아예 임무에서 배제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사람들과 거의 마주치지 않는 위치로 배정받아 임무를 진행했다. 연회장 안쪽 입구 또는 성 밖 건물을 지키곤 했다. 연회장 안에 있어야 할 때는 혹여라도 라비우와 눈을 마주칠까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알아보자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플로라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플로라는 대부분의 시간을 황제의 성에서 지냈지만 숙소도 종종 들러야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에르네가 쓰던 곳을 잠시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이 플로라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옷이나 무기를 관리할 용품은 숙소에 있었기에 하루에 한 번은 꼭 들렀다.

오늘 근무는 오후였기에 느지막한 시각에 눈을 뜨자마자 숙소로 향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황제의 성을 벗어나 숙소로 돌아가자, 임무가 없는 선배들이 삼삼오오 나무 기둥 아래 모여 담소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플로라 경!”

그들 틈에 끼어 있던 이젤과 루가르가 플로라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플로라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로 향했다.

“여기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날이 좋아서 농땡이 좀 피우고 있었습니다.”

“…….”

“그나저나 요새 플로라 경을 보기가 힘들어요. 근무 배치 때문인가……?”

“아마도요. 저는 이젤 경을 매일 보는 걸요.”

실제로 그랬다. 이젤은 웬만해서는 폐하의 곁에서 호위를 맡았으니까. 플로라의 너스레에 이젤이 뺨을 긁적이며 맑게 웃었다.

“대장님은 이제 경을 완전히 후방 기사로 자리를 잡게 하실 모양이에요. 시력도 좋고 활도 잘 쏘고, 움직임도 민첩하니 후방에 제격이긴 하죠. 플로라 경이 내 근처에 있다고 생각하면 괜히 든든해진다니까요.”

그녀를 향한 선배들의 칭찬에 플로라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참, 플로라 경은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이젤의 물음에 플로라가 대답했다.

“숙소에 들르던 참이었습니다. 온 김에 훈련도 하고 가려고요.”

“……역시 모범생.”

플로라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용무를 보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여기서 넋을 놓고 더 시간을 허비한다면 훈련은 하지 못할 것이었다.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일은 즐거웠지만, 마냥 이 즐거움에 심취해 안도할 수는 없는 삶이었다. 라비우가 이곳에 있다. 그 생각을 하자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걸음을 재촉해 숙소 건물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 기분 나쁜 오싹함은 가시질 않았다. 뭔가 공기부터 미묘하게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방문하기는 하나, 성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져서 그렇겠거니 쉽게 생각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상 위에 직사각형으로 된 편지가 놓여 있었다. 너무 반듯한 각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오히려 더 눈에 잘 띄었다. 무기를 내려놓은 플로라가 미간을 좁힌 채 그 종이를 손에 쥐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카드에는 유려한 필체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플로라에게 익숙한 필체였다.

결론은 자신이 이곳까지 왔으니 한 번은 만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래, 라비우가 모를 리는 없었다. 모른 체 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플로라는 장소가 적힌 카드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것을 구겨 버렸다. 무시하면 그만인 것을, 자신의 정중한 부탁을 거절하면 이번엔 어떤 소중한 것을 앗아가게 될지 모른다는 협박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일이 틀어져서 라비우를 죽이더라도, 시몬은 자신을 이해해 줄까?

리비에르는 그래도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봐 줄까?

카신과 루가르는 제 편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플로라는 멀거니 앉아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갈고 닦았다.

집중하기 딱 좋은 일이었다.

* * *

마르웰 공작은 메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고명한 딸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은 오늘에서야 알았다. 칸나가 떠나고 벌써 며칠이 지난 뒤였다. 건국제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틈을 타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서재의 물건들을 몇 개 부수고도 화가 좀체 풀리지 않았다.

발칙한 계집!

황제와 작당을 한 것이 분명했다. 능청스럽게 실실 웃는 황제의 얄미운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인정하긴 싫었으나 새파랗게 어린 그를 한 손에 쥐고 흔들던 때는 이미 지나고 없었다. 시몬은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한 제국의 황제였다. 자신이 그 자리를 꿰찰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걸 알았기에, 대신 그를 조종하고 싶었다. 제 딸을 그 옆에 앉혀 제국을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모든 것이 제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그 둘이 애초부터 손을 잡고 이렇게 자신의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그 연기에 속아 넘어가다니.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황태자, 아니 현 황제에게 놀아났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성이 흐려지는 듯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칸나였다. 그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자신의 딸이 도망쳤다. 어디로 어떻게 떠났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눈앞이 아득했다. 자신의 입맛대로, 엄하게 키우려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때는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기도 했던, 자신의 자식이었다. 뭐 하나 아쉬울 것 없이 키워온 딸이 부모를 버렸다.

칸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안 것은 공작 부인이었다. 부인은 이미 침대에 드러누운 지 오래였다. 제 시종이 급하게 전갈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마르웰 공작은 지금까지도 연회장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건국제에 온 타국의 귀족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으리라. 몸 건강하라는 쪽지를 내려다보던 마르웰 공작이 탁자를 쾅 내리쳤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제국을 영영 떠난 것일까.

공작은 얼마 전 무투 대회에서 함께 있던 시몬과 칸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다정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가 보았다. 귀족들은 공작가를 이을 아들은 없어도 황후가 될 여식이 있으니 자식 농사 또한 성공한 가문이라고 속살거렸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순탄하게 돌아간다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탁자를 내리친 손이 얼얼했다. 자신의 사병들에게 칸나를 찾아오라고 명령은 했으나 앞이 막막하긴 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단서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꼴들을 보아하니 더 그랬다. 어떻게 하면 분이 풀릴지 고민하던 와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공작이 들어오라고 대답하자, 그의 시종이 들어왔다.

“공작님께 온 서신입니다.”

촛농으로 단단히 굳어진 채 봉인된 편지에 새겨진 인장은 그가 잘 아는 것이었다.

잠시 머릿속이 맑아지며 모든 고민들이 사그라졌다.

공작은 시종에게 나가보라고 이야기하고, 혼자 남았을 때가 되어서야 조심스레 그 편지를 열어 보았다.

거래를 하겠다며 내일 그에게 방문하길 원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권력도, 금화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구하게 된다. 딱 마르웰 공작이 그랬다. 그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지만 끌어모으고 모아도 매번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부를 쥐고 있어서 나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또다시 예전처럼 마수와의 전쟁이나 정복 전쟁이 일어나서 제국이 제게 손을 뻗친다면, 그것으로 마르웰은 권력을 한 몫 더 단단히 쥐고 흔들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칸나가 아니어도 돼.

심혈을 기울였던 패가 저를 저버리고 떠났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렇게 버젓한 패가 새로이 들어왔으니 기회를 잡아야 했다. 칸나를 되찾아오는 건 그 이후여도 문제없었다.

마르웰은 이를 꽉 악물었다. 독기를 품은 그의 눈빛이 붉게 물들어 넘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 * *

시몬은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방에 돌아왔다. 먼저 방에 도착해 있던 플로라를 본 시몬은 피곤을 잊은 사람처럼 맑게 웃었다. 플로라는 자신을 보며 웃는 그의 얼굴이 좋았다.

“저녁은 잘 챙겨 먹었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자, 플로라는 새끼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그녀의 품에 안겨들어 목덜미에 이마를 문질렀다. 기묘한 감각들이 온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시몬은 체취마저도 남들과 다르게 느껴졌다. 너무 달콤하달까. 술에 한 번도 제대로 취해 본 적 없지만, 취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이 체취를 통해서도 알 것 같았다.

“잘…… 먹었습니다.”

그와 살을 맞대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행복’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동반하는 법이었다. 행복을 느낀 동시에 라비우가 보냈던 쪽지를 떠올린 것처럼. 순간 플로라의 얼굴에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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