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대장이 사복을 입은 것은 처음이라, 저도 좀 놀랐었어요. 기억하기론 사복도 꽤 잘 어울리셨던 것 같아요.”
플로라가 장단을 맞춰주자, 배시시 웃던 루가르가 아차 싶었는지 뒤늦게 눈을 굴리며 제 뺨을 가볍게 긁적였다.
“아 저도 참, 주책이에요. 그런 대장의 모습을 본 게 플로라 님뿐인 데다, 제 마음을 아는 사람도 주변에 없어서요. 어젯밤부터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플로라 님을 뵙자마자 말이 막 나왔네요. 제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죠?”
사과를 해도 영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루가르가 걸음을 먼저 떼었다.
플로라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답했다.
“호들갑은요. 자기감정에 솔직한 게 멋있어요.”
“아, 저 그게…….”
이제 와 발이라도 빼려는 걸까. 루가르가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제게 무슨 얘기든 해도 괜찮아요. 편하게 하셔도 돼요.”
“역시 제가 너무 티 나게 굴었죠?”
민망한 듯 얼굴이 붉어져서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플로라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언제든 자신에게 얘기해 줬으면 한다고 건넨 말은 진심이었다. 이런 귀여운 사랑 이야기라면 언제든 들어 줄 의향이 있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루가르의 말이라면 듣고 공감해 주고 싶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정말 숨길 수 없는 것 같아요.”
루가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루가르가 플로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장한테는 절대. 절대 이런 소리 하면 안 돼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말 안 할게요.”
“약속해 줘요.”
“네. 약속할게요.”
무엇이 걱정되는지 약속까지 해 달라는 말에 플로라는 입을 꾹 다물겠다는 듯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가르를 보고 있으면 에르네 대장 또한 대단하다 싶어진다. 루가르라면 은연중 자신의 마음을 계속 표현했을 텐데. 그런데도 이리 사랑스러운 사람을 여태껏 가만히 두었으니 대장의 인내심이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요. 루가르 님.”
“네?”
“언제부터 대장을 좋아하게 됐나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예요?”
남의 연애가 궁금해지는 날도 오다니.
그저 허황된 놀음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을 직접 하게 되는 걸로도 모자라, 그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에 재미를 붙인다는 게 우스웠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했다.
“아…… 그게…….”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이려던 순간, 루가르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냥 기사로써 인정받고 싶은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언제부터라고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좋아한다고 깨닫게 된 사건은 있었어요.”
“사건이요?”
그래도 역시 흥미가 생긴다.
플로라가 눈을 반짝이자, 루가르는 힐끗 그녀를 바라보곤 신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처음 근위대에 왔을 때는 말을 탈 줄 몰랐거든요. 전 살아생전 말을 타 본 적도 없고, 또 높기도 높아서 무서웠거든요. 근데 여기서는 말뿐만 아니라, 나무나 지붕까지도 능숙하게 타야 하잖아요. 좀체 나아지질 않는다고 계속 혼이 났어요. 그날도 혼자 남아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요. 조심하지 못해 다칠 뻔한 저를 대장이 구해 줬어요. 저는 대장이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화가 나서 간 줄 알았죠. 물론 그것 때문에 또 구박을 받았는데요, 이상하게 혼이 나는데 이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동시에, 그 이상의 의미로 심장이 뛰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그럼 또 대장에게 구해진 거네요.”
어쩐지 루가르의 말만 들어도 그때의 장면이 어땠을지 대충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맞아요. 그래서인지 순간 대장이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백마 탄 왕자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바로 좋아한다고 얘기했더니, 당황하지도 않고 머리를 콩 쥐어박더군요.”
“네? 바로…… 고백했다고요?”
“뭐. 보기 좋게 차였지만요.”
루가르가 입술을 삐죽이며 꼭 방금 맞은 사람처럼 제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플로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역시 루가르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고백한 뒤로도 대장은 전혀 변화가 없었어요. 장난처럼 생각했는지는 몰라도요. 항상 까칠하고, 구박을 일삼죠. 그나마 요즘은 나이를 먹어 그런지 한결 다정해진 거예요. 지난번에 다쳤을 때는 걱정도 해 주고, 칭찬도 해 줬잖아요. 이게 세월의 정이라는 걸까요?”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플로라가 넌지시 말했다.
“그게 아니라…… 대장의 마음도 흔들린 게 아닐까요? 항상 곁에 있어 몰랐던 마음을 깨닫게 된 거죠.”
루가르의 반응으로 보자면 아직 에르네는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않은 듯했다.
플로라의 말에 잠시 동공이 흔들리던 루가르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요.”
“왜 그렇게 장담하세요?”
“설령 플로라 님의 말처럼 그렇다고 해도 대장은 마음을 깨달을수록 오히려 절 더 밀어내기만 할 거예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좀…… 노력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진짜 에르네에게 마음을 묻고 답을 들은 것도 아니면서, 추측으로 이런저런 말을 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플로라는 이번엔 입을 다물었다.
역시 사랑이란 감정은 혼란스럽다. 왜 타인의 시선으로 봐야만 명확하게 보이는 걸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오해만 쌓이고, 아까운 세월을 흘리게 되는 것 같다.
어제 티가든에서 대장에게 루가르 선배를 좋아하는 걸 안다고 넌지시 말했을 때 눈초리를 받긴 했어도 부정은 하지 않았는데.
그녀를 보는 시선도 분명 남들을 볼 때와는 달랐는데.
플로라가 생각에 잠긴 사이, 루가르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대장은 반마족이에요. 부모들에게도 버림받고, 마수들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세계에서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자랐어요. 그러다 마수와의 전쟁이 한창 일어나던 시기에 폐하를 만나 하네칸에 정착하게 되었죠. 대장은 여기저기서 오랫동안 버림받은 트라우마가 강해요. 사랑처럼 금방 소멸되는 감정은 믿지 않는다고 했어요. 딱 열 번째로 고백하던 때에 제가 진심이라고 판단했는지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명백한 거절이었죠.
그렇게 말하며 루가르는 어딘가 씁쓸한 듯 웃어 보였다. 그러나 곧 단단한 미소가 어렸다.
“그 후로 전 대장에게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아요. 그저 사랑을 믿지 않는 그 불쌍한 사람 옆에 특별한 존재로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기로 다짐했어요.”
이동하며 짧게 나누기엔 생각보다 무거운 얘기였다.
두 사람의 서사를 들었음에도, 역시 루가르의 확고한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타인의 입장에서 한 발 떨어져 보기에 에르네와 루가르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무엇보다 대장의 마음은 이미 그녀를 향해 있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플로라는 루가르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마음이 있는데도 욕심내지 않고 곁에만 머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알았다.
듣자 하니 대장도 걸리는 것이 있어 루가르에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 같았다.
플로라는 어제, 오늘 답답한 두 사람을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도우리라 마음먹었다.
마침 멀리 에르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던 그가 플로라와 루가르를 발견하곤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표정을 부드럽게 풀어내었다.
“대장님!”
루가르가 배시시 웃으며 에르네를 불렀다.
이리 바로 반응하면서. 고백은 하지 않아도 마음을 숨기지는 못하면서.
플로라는 멍하니 루가르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루가르가 민망한 듯 웃으며 속삭였다.
“지금 한 얘기는 우리 둘의 비밀이에요. 알았죠?”
“……그럼요.”
“폐하께도 말하면 안 돼요.”
“…….”
플로라는 루가르의 말에 멍한 얼굴을 했다.
“다음엔 플로라 님의 이야기도 들을래요.”
눈치가 없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저 먼저 갈게요! 우리 둘이 계속 갔다간 플로라 님까지 대장에게 잔소리 왕창 들을 거예요.”
루가르가 손을 흔들곤 앞으로 달려 나갔다.
폐하…….
바보처럼 그 말 한마디에 얼굴에 바짝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사랑은 사람을 참 바보처럼 만드는 거구나.
그와 손을 잡고 고요한 정원을 거닐던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오늘 하루 종일 일에 통 집중하지 못했었는데…… 또. 플로라는 괜히 눈치가 보여 사위를 둘러보았다가 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워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