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신경 쓸 것 없다. 루가르 경은 근무 중이야.>
“대장. 지금 멋있으세요.”
<…….>
에르네가 그게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는 듯 플로라를 노려보았다.
“루가르 선배에게 들렸다 가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대장에게 핀잔 들을 각오는 이미 했다. 센칸에서도 그렇고, 하네칸에서도 항상 매사에 열심히 하고 모범생 같은 이미지로 남고 싶었는데 어쩐지 틀린 것 같았다.
“멋있게 차려입고 왜 도망을 쳐요?”
<……도망은 무슨.>
“지금 도망치시는 거잖아요.”
<네가 뭘 안다고.>
머릿속에서 발끈 외치는 말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을 보니, 플로라의 말에 제법 수줍어진 모양이었다. 대장은 웬만해선 감정 기복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으니, 이건 확실했다.
“선배 좋아하시잖아요.”
<……조용히 해.>
“지금 대장의 모습을 못 보면 선배가 한참 속상해할 텐데요. 대장이 이렇게 꾸미는 게 어디 흔한 일인가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참견은. 네 연애나 잘하지.>
계속해서 플로라가 재잘거리자, 귀찮다는 듯 에르네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다 별말 없이 그냥 방향을 틀었다.
‘내가 네 등쌀에 못 이겨 간다, 가!’ 하는 듯한 행동이었으나 그의 발걸음이 사뭇 빨라진 것이 보였다.
플로라는 걸음을 멈춰서서 에르네에게 외쳤다.
“대장. 저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릴게요.”
그나저나 네 연애나 잘하라니.
잘하고 싶다.
플로라는 어이가 없었지만 씁쓸하게 웃는 수밖엔 없었다.
* * *
루가르를 만나고 돌아온 에르네와 함께 티 가든에 도착한 플로라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는 아름다운 영애와 황제를 보았다.
대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둘은 웃으며 다정하게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멀리서 보고 있음에도 벌써 심장이 욱신거렸다. 역시 괜히 따라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기다려. 폐하께 고하겠다.>
“……네.”
두 사람의 모습은 가만 보기에도 잘 어울려서 더 이상 그 광경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플로라는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문득 제게로 닿는 시선들이 느껴지긴 했지만, 시몬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벅저벅. 자신을 향해 다가온 발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에르네일 줄 알고, 고개를 들었던 플로라는 눈앞에 보이는 시몬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하얀 피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말끔하게 올라가 정돈된 머리칼, 구김 없는 제복까지. 칸나 영애를 만나기 위해 많이 신경을 쓰셨구나 싶은 모습이었다. 그에게 어쭙잖은 흑심을 품게 될까 봐 이제 시몬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또 마음이 흔들리고 만다.
“폐하.”
“플로라.”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마음을 푹 찔렀다. 이 와중에도 석양이 지는 것처럼 타오르는 주홍빛 눈동자가 어쩐지 자신을 반겨주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데이트를 방해했는데 자신을 달갑게 여길 리 없었다. 아무리 시몬의 명령으로 왔다지만…… 그래도. 그저 아끼는 신하에게 예의상 웃어 주는 것뿐이리라 생각했다.
심장이 콕콕 쑤셨다. 칸나 영애와 시몬의 모습이 너무 조화로워서 그런 걸까. 아님 두 사람이 이대로 혼인까지 가게 될 것 같다고, 스스로도 인정해 버렸기 때문일까.
이리 바쁜 와중에도 칸나 영애를 만나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니, 건국제에서는 세간의 소문대로 두 사람이 혼인 발표를 하게 될 것 같았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폐하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몸은 좀 괜찮아?”
“……네.”
“그럼 다행이야.”
플로라가 슬쩍 눈을 들어 시몬을 보았다.
꼼꼼히 자신을 살피는 듯한 시선을 마주하자, 금방이라도 펑 하고 자신의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고작 이 얘기를 하려고 부르신 걸까?
“플로라.”
“예, 폐하.”
“오늘 칸나 영애가 재미있는 얘길 할 것 같은데, 경도 같이 듣지 않겠어?”
“……네?”
“같이 차도 마시고, 디저트도 먹고.”
저 불편한 자리에 자신을 초대하겠다는 걸까.
플로라는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보였다.
“……거절이야?”
“제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입니다. 단장님께 들었습니다. 오늘 아카데미 친구분들과 함께 모이시는 자리라고요.”
“그건 맞지.”
“제가 낄 자리는 아닌 듯합니다.”
“……함께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다음에 전해 줄게.”
“알겠습니다.”
그때 뒤에서 다른 인기척이 들렸다. 플로라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불편한 기색을 지워내곤 반색했다. 카신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폐하.”
잠시 플로라를 보고 오묘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던 카신이, 정신을 차리고 시몬을 향해 인사했다.
“늦었어.”
“훈련이 좀 늦어졌습니다. 게다가 땀에 젖은 모습으론 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시는 바람에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구겨 입고 오느라 시간이 더 지체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칸나가 그랬지.”
“……그렇죠.”
“사과도 칸나에게 해. 깐깐한 건 영애 하나뿐이니. 나는 일하다 늦은 공작이 아주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그래도 넌 그나마 들어야 할 잔소리가 양호할 거야. 아직 네이라와 이든은 오지도 않았거든. 르뷔에르의 결계도 강화해야 하고, 전국의 텔레포트 일도 있고, 또 대마법사들도 건국제 준비를 해야 하니 바쁠 거야. 이든도 마찬가지고. 요즘 이슈가 많잖아.”
“…….”
“네이라는 낮에 잠깐 회의실에서 마주쳤는데, 얼마나 시달렸는지 눈 밑이 새카맣더라고. 약속을 잊은 건 아닌가 모르겠어.”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대화를 들으며 플로라는 눈만 굴렸다.
전에도 한 번 있었던 파티였기에, 드레스 코드가 정해진 파티라는 걸 알 것 같았다.
어쨌든 칸나 영애와 시몬 만의 데이트는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낄 수 없는 자리란 사실에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플로라 경과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카신이 제대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기에 자신의 존재를 잊은 건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먼저 플로라의 이야기를 꺼냈다.
덕분에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카신을 향해 인사할 수 있었다.
그가 픽, 옅게 웃으며 플로라를 내려다보았다.
“얘기할 게 있어서. 너와도 잠깐 일 얘기를 해야겠어. 저번에 내가 전달한 보고서는 다 읽었나?”
카신이 플로라의 눈치를 살폈으나, 이내 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실종 사건과 암시장에 관한 보고서는 전부 읽었습니다. 센칸은 납치한 아이들을 구매하거나, 팔리지 않으면 노예로 다른 대륙에 수출한다고 하네요. 솔직히 그런 방향으로 생각을 아예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충격적이군요.”
플로라도 그에 눈살을 찡그렸다.
센칸의 이야기가 나오자 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분위기도 덩달아 급격하게 심각해졌다. 센칸 놈들이라면 분명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근래에 하네칸에서 사라진 아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지방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 사람의 아이도 실종되었고. 센칸은 하네칸의 아이라면 몇 명이든 값을 주고 데려갔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개중에는 마력을 가진 아이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마력을 가진 자를 연구해서 센칸 역시 마법을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아이든과 라비우의 목적이었다.
플로라는 문득 파르베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냥대회 이후 자취를 감춘 덕에 그의 모습을 더 파악할 순 없었지만, 가히 충격적이긴 했다. 플로라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식간에 머리 위로 닿은 낯선 손길 때문이었다.
“…….”
플로라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고개를 돌렸으나, 제 머리 위로 손을 얹은 사람이 카신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왜 이렇게 꽁한 얼굴이야? 위로가 필요해 보이네. 위로.”
“……단장님!”
갑자기 이게 무슨…….
플로라의 표정은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변했다. 그걸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던 시몬의 눈도 덩달아 둥그렇게 변했다.
“이렇게 해 주면 위로가 된다며.”
“……위, 위로가 필요하다고 한 적 없어요.”
제아무리 편한 사이라도, 황제도 보고 있는 앞에서!
플로라가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며 원망을 토해내자 카신이 쿡쿡 웃으며 손을 내렸다.
“플로라 경.”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플로라가 조금은 원망스러운 얼굴로 카신을 올려다보았다.
“할 얘기가 있으니, 조만간 식사라도 함께하지. 중요한 얘기야.”
무슨 얘기일까. 플로라는 어쩐지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