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자, 선물이야.”
플로라는 라비우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라비우는 침대에 웅크려 앉아 있는 플로라의 옆에 작은 인형을 하나 두고, 멀찍이 물러서서 곤란한 얼굴을 했다.
“왜 우는 거야?”
“…….”
“마법을 보여줘. 플로라. 응?”
호화롭지만 낯선 방. 낯선 사람들. 플로라에게 익숙한 것은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아빠도, 유모도, 집사도, 그리고 기사들마저도 전부 그녀가 아는 사람들과 달랐다.
‘아가씨, 어서, 도망…… 도망을……!’
라비우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한 채 죽은 유모 타마가 떠올랐다. 그것은 플로라에게 강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집으로 돌아갈래! 보내줘!”
플로라가 토끼 모양의 인형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서럽게 울며 집을 보내 달라고 칭얼거렸다. 부드러웠던 라비우의 눈매가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
“이레나. 이제 여기가 네 집이라고 했잖아!”
갑작스레 터져 나온 고함에 플로라는 어깨를 들썩였다.
타마가 죽고, 집사와 기사가 죽고,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린 플로라가 혼자 도망칠 용기나 그럴 방법이 있을 리도 없었다. 플로라는 라비우의 허락 없이는 방을 나갈 수 없었고, 라비우가 방문하지 않으면 며칠이라도 이곳에 갇혀 시녀들이 가져다주는 밥만 먹어야 했다.
너무 외로워서 가끔은 자신을 찾아 주는 라비우가 반갑다가도,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죽은 타마의 얼굴이 떠올라 두려움이 일곤 했다.
그의 곁에 있던 기사들과 라비우가 직접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죽이는 걸 봤기 때문에 플로라는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라비우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이레나. 난 네 마법을 가지고 싶어.”
“…….”
“나는 왜 마법을 쓰지 못하는 걸까?”
“…….”
“마법을 보여줘. 내가 너라면 매일 마법만 쓰면서 살 텐데, 왜 쓰지 않는 거야?”
라비우는 플로라에게 마법을 쓰길 강요하곤 했다.
플로라가 마법을 보여주면 그날은 칭찬을 받았고, 또 밖으로 외출도 시켜주었으므로 고분고분 그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나도 마법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 왕국에도 마법이 있다면 좋겠어. 그럼 더 강해질 텐데. 하네칸처럼 대제국이 될 수 있을 텐데.”
라비우는 마법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강했다. 곧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그의 욕망은 여러 갈래로 뻗쳤다.
플로라를 볼수록 가지를 뻗은 악한 생각들은 점점 더 커졌고, 이윽고 ‘아이든’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레나. 오늘은 내가 친구를 데려왔어.”
플로라가 점점 체념한 채 시들어갈 때쯤 아이든을 처음 만났다. 아이든도 라비우도 마찬가지로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년일 때였다.
아이든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금발 머리는 덥수룩했고, 눈동자는 연한 분홍색 빛으로 보석처럼 빛나는 남자였다. 체구는 아주 왜소했고, 얼굴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그는 음울한 얼굴로 플로라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힐끗거리다, 이내 그녀가 보여주는 마법에 눈을 반짝였다.
어렸을 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라비우가 왜 아이든을 데려왔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눈빛에도, 라비우의 눈빛에도 어딘지 모를 음산함과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아주 비슷했다. 그리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 * *
아이든이 오면서 플로라의 거처는 성에서 메린 섬에 지어진 허름한 성으로 바뀌었다.
그곳은 이곳저곳에 곰팡이가 핀 퀴퀴한 냄새가 가득하고, 벌레가 득실거리며 어둡고 추웠다. 차라리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라비우와 함께 있더라도 호화스럽던 방이 그리울 정도로 끔찍한 곳이었다.
아이든은 라비우보다 더한 미친놈이었다.
라비우는 플로라의 마법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채 돌아갔지만, 아이든은 그렇지 않았다. 플로라가 마력을 쓰다 지칠 때까지 그녀에게 마법을 쓰도록 강요했다.
마법을 쓰는 능력에 대해 연구한다는 이유였다.
플로라는 아이든에게 실험에 쓰일 인간으로밖에 취급받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벌을 받아야 했기에 플로라는 한동안 잠잠했던 울음을 다시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마법을 쓰고 싶지 않았다. 마법이라면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다. 차라리 쓸 수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플로라의 강한 관념이 기억을 지우고, 마력을 봉인했다. 리비에르를 떠올리며, 그리고 자신이 가장 행복하게, 그녀답게 살 수 있었던 저택을 떠올리며. 그곳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절대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든은 더 이상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플로라에게 어떤 약을 먹였다. 그리고 그 이후, 플로라는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기억들을 잊었다.
플로라에게 남은 최초의 기억은 아이든이 가둬 둔 감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자신이었다.
센칸 왕국의 궁에서 지낼 무렵, 라비우가 선물해주었던 토끼 인형이 제 유일한 친구인 것마냥 생각하며 쭉 지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가 왔다.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이인 것처럼.
타오르는 불길처럼 붉은 머리칼을 한 남자, 라비우가.
“이름…… 이름이…….”
라비우의 물음에 플로라는 눈을 굴렸지만 아무리 머리를 써도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이름을 생각하려 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기억나지 않는구나.”
다정한 목소리는 플로라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플로라는 다정한 라비우를 좋아했다.
“……네.”
그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런. 그럼 넌 다섯 번째 아이라고 하겠다. 진짜 이름은 나중에 되찾아줄게.”
다섯 번째 아이…….
플로라는 그것마저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그리고 그 손을 잡았다.
* * *
기억으로 이어진 길을 자근자근 밟아온 플로라가 겨우 눈을 떴다.
익숙한 공간과 냄새가 플로라의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 진정시켜 주었다.
“……깨어났군.”
시몬이 있는 성이다. 여기는 하네칸이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따뜻한 것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꿈일까 봐.
너무 잔인한 꿈을 지나온 터라, 이 행복이 깨질까 두려워서.
“플로라.”
“제 이름은…….”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목소리가 잠겨 갈라지고 잘 나오지 않았다.
또 차오르는 눈물을 꾸역꾸역 참아내느라 목구멍이 묵직했다. 플로라는 감정을 추스르려 애쓰며 다시 말했다.
“이레나예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옆을 바라보자, 꿈속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달리 확실히 세월의 흔적이 남은 모습의 리비에르가 보였다. 자신이 리비에르가 찾던 ‘이레나’라는 걸 몰랐을 때도…… 그의 고독과 상처를 감히 가늠할 수 없었는데, 모든 걸 알고 나자 더욱 심장이 꿰인 듯 아파졌다.
“그래, 이레나.”
그가 옅게 웃었다. 그 역시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알고 계셨어요? 제가 이레나라는 거요.”
“확신하지는 못했단다.”
“…….”
“기대하면 실망하게 될까 봐 두려웠거든.”
오랜 세월, 한 사람을 찾아 헤맸던 삶이다.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 고독과 실망을 맛봤다. 그렇기에 리비에르는 기대는 헛된 것이라 치부하고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찰랑이는 은빛 머리칼을 볼 때마다 기대로 얼룩진 심장이 날뛰었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인내해야 했다.
“이레나.”
플로라는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지만, 자신을 부르는 말임을 알았다. 따뜻한 목소리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비에르의 꽉 다물린 입술이 지금 얼마나 감정이 복받쳐 오르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한데 마력을 봉인한 것으로도 모자라 기억까지 지웠다는 건 본인이 영영 마력이나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아 한다는 뜻 같은데…….’
‘…….’
‘찾고 나서 후회하지 않을까요?’
처음 리비에르와 광장에 있는 주점에서 만났을 때의 대화가 떠올랐다.
마법 수업을 하면서도 종종 되새기던 말이었다. 찾으면 후회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솔직히 되돌아온 기억들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할 순 없었다.
리비에르를 볼 때마다 그 감정은 더 복받쳐 올랐고.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