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대장, 괜찮아요? 다친 데는…… 읏.”
인상을 찡그린 채 힘겹게 말을 뱉어내던 이브니에는 결국 무너졌다.
동시에 카신도 그녀를 붙잡기 위해 주저앉았다.
동료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도한 적도 있고, 부하가 다치는 것도 심심찮게 봐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익숙해지진 않았다. 아무리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한들, 몇 년간 자신의 곁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부하였기에 감정을 단단하게 추스르는 것도 어려웠다. 이래서 정이라는 것이 무섭구나. 카신은 스스로의 부족한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이브니에를 들어 안았다.
카신은 성에 도착하자마자 이든을 찾았다.
이브니에의 상태를 보고, 상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장. 무슨 일입니까?”
소식을 전달받은 사르트가 다급한 얼굴로 도착했다.
“예상대로였어.”
카신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복잡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덤덤한 척 말했지만 사르트의 입술 사이로는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백작령 마수 토벌대로 파견되었던 여자 기사들을 며칠 동안 조사하던 중이었다. 당연히 카신과 사르트만 알았고, 흑기사단에서도 파견 나왔던 기사들은 하키라의 허락하에 정보를 제공 받고 몰래 감시했다.
설마 백기사단일까. 며칠을 골머리 썩혔다.
카신도, 사르트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그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니었다.
“대장께서 베셨습니까?”
“습격을 받았어.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이브니에와 거래를 했던 사람인 것 같더군.”
“……그렇군요.”
잠시 정예 기사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르트도 이제 필요한 정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카신 못지않게 사르트 역시 충격받은 얼굴이었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정리하는 듯 입술을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당장은 카신에게 물어볼 수도 없을 것 같아 결국 사르트는 침묵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카신은 곧 사르트에게 황제께 알현 신청을 대신 해 달라고 명령했다. 사르트가 떠나고도 카신은 한참 치유실 앞을 지켜야 했다. 죄인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사히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플로라가 당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독이 퍼졌다고 했다. 이든과 같은 고급 치유사에게 맡긴다고 깨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일이었다. 움직이면서 목에 깊게 팬 상처와 등에 꽂힌 단도가 치명상을 입히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배신감이 사라진 건 아니나, 그렇다고 죽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카신은 자신을 향해 웃던 이브니에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 * *
한꺼번에 많은 일이 터진 지금 시몬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카신의 요청으로 급하게 알현실로 왔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플로라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폐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리비에르는 큰일은 아닐 거라고, 갑자기 많은 양의 기억이나 마력을 회복하는 도중에 쇼크가 올 수 있다고 했지만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플로라의 일은 사소한 거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연한 척을 하려고 해도 되질 않았다.
에르네가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주어 이쪽도 위급한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한 제국의 황제로서 꼭 가야 할 일이었기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도 카신을 만나러 와야 했다.
“카신. 몸은 괜찮나?”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무사하다니 다행이군. 상황은 대충 전달받았어. 이브니에 경의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저 대신 칼을 맞았습니다. 저의 심장을 정확하게 노린 공격을 막아주었죠.”
얼굴 옆으로 단도 하나가 스쳐 지나갔을 땐, 웬만해서 긴장하지 않는 카신도 아차 싶었을 정도로 위험했다. 그게 살짝만 긁혔어도 그 역시 독에 감염되었을지 몰랐다. 그건 천운이었다고 치고, 이브니에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은 카신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카신의 표정이 좋지 않아 마음이 쓰였다.
자신의 부하가 센칸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리라.
시몬은 카신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브니에는 카신을 살린 은인이지만 시몬에게는 범죄자일 뿐이었다.
제국에 해를 입힌 자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제의 입장으론 곱게 볼 수 없었다. 살린다고 해도 우리 편이 되어줄지 의심도 됐다.
“솔직히 고민이 많이 되네. 이브니에 경을 살릴 가치가 있을지.”
“…….”
“그녀가 센칸이 벌인 만행을 솔직하게 고발해준다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한데. 그걸 기대해 봐도 되겠어?”
“아마 해 줄 겁니다. 하지 않겠다고 하면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그래도 마법석을 밀매한 죄에 대한 처벌은 면치 못할 거야. 이브니에 경이 진짜 첩자는 아니었다고 해도, 센칸과 내통한 건 사실이니.”
“……예.”
“깨어나서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모습을 보인다면 바로 죽일 거고.”
“당연합니다.”
“경의 부하인 데다 목숨까지 살렸다고 하니 마음이 복잡할 것 같아 대신 정리해주는 거야. 그래도 그녀가 중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잊지 마.”
“예, 폐하.”
그렇게만 해준다면 센칸의 만행을 터트릴 때, 더 신빙성이 있을 수 있겠지.
그들의 만행을 증언해 줄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습격을 한 자의 얼굴은 보았나?”
카신이 고개를 저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얼굴은 정확히 보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빠르게 움직여 사라지더군요…… 꼭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잡을 틈도 없었습니다.”
시몬이 한숨을 폭 내쉬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최근 보고를 받은 사건이 하나 있지. 스벤타 남작의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이, 휴가차 본가로 내려가다 짐승처럼 빠르게 달리는 남자를 보았다더군. 그 일이 수도에 퍼졌고, 나도 알게 되었지.”
“…….”
“그것이 센칸의 사람일 거라고, 플로라에게 들었어. 그리고 현재 그 고용인은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는군.”
카신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센칸의 사람일 거라고 확신해.”
“제 생각도 같습니다.”
“하네칸 수도에 있다면 금방 추적 가능할 겁니다. 제가 나서서 그놈을 잡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센칸을 곧장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정치에는 언제나 명분이 필요했다. 귀족을 설득하고, 또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겨우 일상으로 되돌아온 제국민들을 이해시키려면 그 명분은 꼭 필요했다.
“그대는 성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카신.”
“폐하…….”
“불허한다. 곧 건국제야. 몇 주 후면 각국 주요 인사들이 모두 성으로 모일 거라고. 유능한 경이 없으면 안 돼. 그럼 부하들 통솔은 어떻게 할 거지? 부단장에게 전권을 일임하고 떠날 텐가?”
“…….”
“무고한 기사들이 사경을 헤매고, 우리는 그 자의 도발에 놀아나고 있어. 나도 이를 갈고 수배하라 명할 것이니, 그대는 이만 잊고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해. 복수할 날은 곧 올 거니까.”
카신은 황제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시몬을 상대로 자신의 뜻만 주장할 수는 없는 위치였다.
“카신. 건국제에 센칸의 왕을 초청했네. 그는 우리의 초대장을 거절할 명분이 없지. 쥐새끼 한 명을 잡는 것보다 더 큰 걸 노리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쥐새끼가 아무리 활개를 치고 다녀봤자, 그들은 도구일 뿐이니.”
* * *
플로라의 꿈속은 복잡했다. 미로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이 엉겨 붙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영상은 어둡고 컴컴한 방 침대에 앉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두렵다, 슬프다, 화가 난다, 단적인 감정들이 떠올라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아주 작은 아이였다. 자신처럼 은빛 머리칼을 가진 작은 아이. 제삼자의 시점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느끼는 감정들이 단적이지만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보았지만 아이에게 닿지 않는다.
‘혼자 있기 싫어. 무서워.’
플로라는 심장 한구석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이어지는 장면은 다른 기억이었다.
화려하게 보석으로 휘감아 두른 남자와 여자, 그리고 한 소녀가 하하 호호 웃으며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을 아이는 지켜보고 있다.
“집 밖으로 나가지 말고. 알았어?”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간 여자는 싸늘한 표정으로 나가기 전, 아이에게 그리 말했다.
우물쭈물 선 채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던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느껴지는 감정은 고통, 슬픔, 분노, 그리고 외로움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플로라는 알 수 없는 이 기억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