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86)화 (86/154)

86.

집사는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남은 중년의 남성이었으나,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한 모양인지 여전히 체격도 다부지고 옷매무새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다. 희끗한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정돈되어 있는 것 같았다. 플로라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정중하게 묵례했다.

집사는 잠시 멍한 얼굴로 플로라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저택으로 온 손님을 향한 예를 갖췄다. 찰나의 순간 동안 플로라를 바라보며 지었던 표정이 어쩐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뜻을 가늠하기 애매모호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저택에 방문한 걸 환영한다는 말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아직 다 가꿔지지 않은, 어쩐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정원을 한참 가로질러 들어가서야 저택의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원의 분위기 때문인지 스산한 듯했던 외관과는 달리, 저택의 내부는 굉장히 따뜻한 느낌이었다.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저택의 입구를 온화하게 밝혔다. 곳곳에 스며든 오래된 집의 느낌과 장식장 등이 아늑한 느낌마저 들게끔 했다. 작은 왕국의 성을 방문한 것만 같았다.

새로운 공간에 발을 들여서일까. 괜스레 심장이 미묘하고 빠르게 뛰기 시작하며 알 수 없는 감상에 젖어 들었다. 한참 눈으로만 주변을 훑다가 리비에르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집이 참 예뻐요.”

“칭찬 고마워. 아직 식사가 준비되려면 좀 걸릴 것 같은데.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겠나? 아니면 저택 구경을 시켜줄까.”

“……음. 저택을 구경하고 싶어요.”

“그럴까?”

리비에르가 앞장서 걸었고, 플로라는 그 뒤를 따랐다.

일 층에는 응접실과 식당, 그리고 고용인들이 묵는 방과 창고가 있었다. 창고로 쓰이는 방에는 그가 오랜 시간 세계 각국을 다니며 수집한 예술 작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직 정리를 하지 못해 제대로 구경할 순 없었지만, 플로라가 보기에도 아름다워 보이는 조각상이나 그림들이 많이 있었다.

“다음에 정리되면 한 번 제대로 구경시켜 주세요.”

“그럴게.”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것들이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한 채 플로라는 위층을 향했다.

위층은 리비에르가 묵는 침실과 서재, 마법 연구를 하는 연구실 그리고 딸이 묵던 방과 손님들이 이용할 수 있는 침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리비에르의 개인적 공간 같은, 플로라가 보지 않아도 될 만한 곳은 그저 소개만 하고 지나쳤고 그녀 역시 보겠다고 하지 않았다.

서재는 굉장히 넓고 컸다. 특히 황실 도서관에서 일반 방문객들이 열람할 수 없는 고대의 마법서 같은 것들도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플로라가 읽을 수 있는 문자는 거의 없었지만.

낡고 오래된 것들이 어떤 평안을 줄 때도 있다.

가뜩이나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플로라는 서재에서 눈을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네. 저는 특히 소설책을 좋아해요.”

“소설책은 이쪽에 많아. 고전부터 시작해서 현대까지, 나도 머리가 복잡할 땐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를 보는 걸 좋아해서.”

소설 이야기를 시작하자 플로라의 흥미도 한층 더 올랐다. 이것저것 책을 뒤적이는 사이,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집사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플로라는 서재를 떠날 수 있었다. 리비에르가 책 몇 권을 빌려준 덕에 즐거운 마음으로 일 층을 내려가려는데, 그가 플로라를 불러 세웠다.

“이 방은 네게 한번 보여주고 싶어서.”

“네?”

플로라가 눈을 굴리자, 리비에르가 굳게 닫힌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은 화려하면서 아기자기했다. 레이스가 치렁하게 달린 침대 캐노피하며 곳곳에 놓인 귀여운 인형들까지. 어린아이가 사용하는 방처럼 보였다.

그리고 순간,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

잠깐 눈앞이 어질해 반사적으로 문을 잡으며 눈꺼풀을 지긋이 내렸다.

“괜찮나?”

“아, 잠시 어지러웠어요. 괜찮습니다.”

플로라는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을 느낀 채 방에서 뒤돌아섰다.

그리고 리비에르가 방문을 닫던 순간이었다.

휘청, 플로라의 눈앞이 뒤집어졌다. 리비에르가 재빨리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아, 네. 괜찮습니다.”

머릿속에 아스라이 펼쳐지는 낯선 기억이 플로라의 혼을 쏙 빼어놓는 느낌이었다.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하녀들의 웃는 얼굴.

이상하다.

대체 이 기억들은…… 뭐지?

플로라는 멍하니 눈앞에 그려지는 영상에 집중했다.

“무슨 일인가? 플로라.”

곁에서 리비에르가 계속해서 플로라를 불렀으나, 그녀에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몸이 깨어질 듯 아파오고, 호흡이 가빠졌다. 하루 종일 검술 훈련을 하다 병이 난 사람처럼 살짝만 움직여도 바늘에 찔린 것처럼 찌르르했다.

어깨를 쥐고 살짝 흔드는 리비에르 덕에 현실로 돌아온 플로라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의지와는 달리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플로라!”

그리고 저도 모르게 까무룩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하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플로라를 살피던 리비에르는 그녀가 쓰러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치지 않게끔 붙잡아주었다.

“리비에르 님, 이게…….”

근방에 있던 집사가 요란한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모양인지, 정신을 잃은 플로라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데인. 아무래도…… 찾은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설마 이레나 아가씨가…….”

“일단 성으로 돌아가야겠네. 마력이 깨지고 있는 모양이야. 마차를 준비해주게.”

“알겠습니다.”

집사는 리비에르의 명령에 재빨리 일 층으로 내려가 마부를 찾았다.

리비에르는 그사이, 폭주해서 넘실거리는 플로라의 마력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힘을 써야 했다.

의심하고 있던 것이 현실이 된 것 같은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의할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밀려들어 리비에르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자신이 알던 작고 어린 영애 이레나와 플로라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그런 것일까.

은빛으로 굽이치는 머리칼을 바라보며 리비에르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했다.

* * *

이브니에가 막 국경 지역으로 파견을 나갔다가 성으로 돌아온 날, 그녀의 앞으로 발신인 불명의 편지가 도착했다. 약속장소가 쓰여 있는 편지였다.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올 사람은 단 한 명이란 걸 알고 있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을 정돈하고, 로브를 뒤집어쓴 채 성을 나섰다.

광장에서도 인적이 드문 거리로 약속을 잡은 이 때문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끔 입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백작령 마수 토벌대에서 만났던 첩자에게 정말 마지막이라고는 했지만, 이브니에는 이 일을 끊을 수가 없었다. 아마 평생 그러지 못하리란 걸, 그녀는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브니에 경.”

그리고 한 남자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이브니에의 곁에 다가왔다. 제 심장이 저 남자의 손아귀에 든 것처럼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첩자를 딱 한 번 만나본 적 있었다. 그때도 분명 이브니에에게 알 수 없는 극한의 공포감을 심어주던 남자였다. 이브니에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가 손을 벌벌 떨며 그동안 파견을 나가면서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마법석을 남자에게 넘겼다.

주머니를 확인한 남자가 이브니에를 바라보았다.

이브니에는 최대한 눈을 맞추지 않으려 했지만, 강렬한 시선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분명 웃고 있지만 기괴하게만 느껴지는 표정. 금발 머리, 그리고 초점 없이 살기 어린 분홍색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이브니에 경.”

“안녕하십니까.”

“고마워요. 마법석은 늘 잘 사용하고 있어요.”

“…….”

“참, 경도 마법을 얻고 싶으면 언제든 센칸으로 와요.”

씨익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 이브니에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마른 침만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당장에라도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듯한 눈빛이 그 어떤 마수들을 대적할 때보다도 이브니에를 두렵게 만들었다.

이브니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재미없다는 듯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인 아이든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백작령에서 파르베 경을 도와 많은 일을 해줬다고 들었어요.”

“……아닙니다.”

“경도 플로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죠?”

플로라의 이름이 나오자 이브니에가 눈을 크게 뜨고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이리 똑바로, 오랫동안 보고 있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듯한 목소리 속에서도 분명 광기는 숨어 있었다.

더 이상 이 일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머릿속에 어지럽게 경고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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