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근데 어떤 악몽을 꾼 건지 물어봐도 되나?”
이젤의 말에 플로라가 눈을 깜빡이다 그를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다른 얘기를 하면서도 그 꿈을 계속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젤과 눈이 마주치자, 플로라는 멋쩍게 웃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이 죽는 꿈이었어요.”
“……그래?”
“네.”
“누군가 죽는 걸 봤으니 기분이 별로겠네.”
“네. 기분이 계속 이상하네요. 죽어가면서 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아는 얼굴이 아니었어요. 원래라면 그냥 잊혀야 하는데 계속 신경이 쓰여요.”
이젤은 플로라의 마음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 *
갑작스러운 대장의 호출로 막 집무실에 도착한 때였다. 플로라는 선배들이 지키는 집무실의 거대하고 화려한 문 앞에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문을 열고 시몬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넓은 공간 안에 시몬과 에르네가 있는 것이 보였다.
시몬은 바쁘고, 에르네는 그런 황제의 곁에 서 있거나 혹은 앉은 채로 제 할 일을 하는 모습이 이제 좀 익숙하게 느껴졌다.
“하네칸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플로라는 시몬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먼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몬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에르네는 먼저 나서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제 집무실 안에는 시몬과 플로라 둘뿐이었다.
시몬은 빤히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플로라를 바라보다가 일어나길 명령했다.
“플로라. 왔네.”
“……네. 폐하.”
“그동안 잘 지냈나?”
“네.”
아직 어떤 임무를 받지는 않아서, 훈련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다. 잘 지내지 못했을 이유가 없었다. 플로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몬이 중앙에 놓인 테이블로 향했다.
“여기 앉아. 별다른 건 아니고 오랜만에 대화나 좀 나눌까 하고 불렀으니. 경에게 궁금한 것도 있어서.”
“……알겠습니다.”
“한데 플로라. 이제 내 이름은 부르지 않기로 한 건가?”
“아, 그게 아니라…….”
시몬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현실로 직시하자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시몬.”
플로라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이름을 부르자, 시몬의 눈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이 보였다.
“강요는 아니었어.”
“알고 있습니다.”
“혹시 불편한가?”
시몬은 문득 칸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아차 싶어 물었다.
플로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황제의 이름을 막 부르고 서슴없이 대한다는 게 머리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이 없을 때만 부르는 것이니 괜찮습니다.”
“그럼 다행이야. 난 경과 가까워지고 싶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아서 말한 건데 혹시 불편하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알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게 플로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반쯤 열자, 밖에서 누군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플로라가 하네칸에 발을 들이고 처음 만나는 얼굴이었다.
수석 비서관, 카디오크…….
황제의 집무실 책상 옆에는 다른 책상이 하나 더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자리의 주인인 듯했다.
플로라가 시몬에게 고하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들여보내라고 일렀다.
그제야 활짝 열린 문틈 사이로 카디오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갈색의 단정한 머리칼, 동그란 안경을 쓴 외형만 봐서는 어딘지 깐깐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에르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집무실에 있자, 잠시 놀란 듯한 표정으로 플로라에게 눈길을 주었던 카디오크가 먼저 황제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건국제 초대장입니다.”
“아, 그렇군. 검토해보고 이상 없으면 얘기하지.”
“알겠습니다.”
“시종장과는 대화해 보았나? 성의 방은 여유롭다던가?”
“지금 가보려고 합니다.”
“그럼 물어보고 이상이 있으면 바로 내게 말해 주도록.”
“……알겠습니다.”
카디오크는 제 할 말을 묵묵히 끝내고 다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테이블에 놓인 초대장을 들어 읽어본 시몬이 짐짓 심각한 얼굴이 되어, 플로라는 도로 앉아야 할지 아니면 그의 곁을 지켜야 할지 고민했다.
“이만 앉아. 플로라.”
그런 고민에 빠진 사이, 시몬이 먼저 다시 앉길 권유했다.
플로라가 자리에 앉자 초대장을 다 읽은 시몬이 지끈거리는 골을 꾹 눌렀다.
간밤에는 특히 일이 더 많아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기 때문인지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 시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플로라가 걱정했다.
“시몬, 어디 불편하십니까? 이든 님을 부를까요?”
“아니. 괜찮아.”
“하지만……!”
“건국제 준비로 일이 많아서 그래. 아까 들었겠지만, 초대장이 나왔어.”
“…….”
“센칸의 왕에게도 초대장을 보낼 거야. 방문하게 된다면 성에서 머물 테고.”
“네. 알고 있습니다.”
이번엔 되려 시몬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널 후방배치 할 테지만, 성 내에선 언제 어떻게 마주칠지 몰라. 정말 괜찮겠나?”
“어떤 부분을 염려해 그런 질문을 하신 겁니까?”
“네가 라비우 왕과 마주치면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시몬의 걱정 섞인 말에 플로라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저는 이제 폐하의 사람입니다. 하네칸에서, 그것도 폐하가 계신 성에서 라비우가 이성을 잃고 저를 해칠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잔악무도한 인간이라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알 테니까요. 그 정도 구분도 못할 멍청이였다면, 진즉 반란 세력에게 죽었을 겁니다.”
목숨이 위험한 걸 걱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라비우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과거가 생각날 것 같아 마주치기 싫은 것뿐이었다.
라비우에게까지 자신이 하네칸에 발을 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것과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를 것이다. 라비우나 아이든이 직접 황제 곁에 있는 플로라를 보게 된다면, 하네칸에게 센칸의 ‘충성스러운 개’를 빼앗겼다고 생각해 더 이를 갈 것 같았다.
그 화살은 자연스레 시몬에게 돌아갈 게 뻔해 두려웠다.
플로라는 불현듯 라비우와 아이든, 두 사람을 이 성 내에서 만날 생각을 하며 표정을 싹 굳혔다.
건국제가 열리면 정해진 임무 외에는 방에서 꼼짝도 하지 말아야지.
위협이 되든 안 되든,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래도 걱정은 되는군. 센칸의 행태가 좀 영악해야지.”
“…….”
“최근에도 몇 번 경의 컨디션이 안 좋다는 이유로 해치려 했잖나.”
그렇다고 센칸에 초대장을 보내지 않으면 귀족들이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를 대며 노발대발할 것이고. 시몬은 그런 귀족들에게 센칸을 초대하지 않은 타당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기에 라비우가 이 하네칸에 발을 들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음 같아선 부르고 싶지 않아.”
“……센칸은 하네칸의 동맹국이니 꼭 불러야 합니다.”
그 대답에 시몬은 코웃음을 쳤다. 플로라 역시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동맹국이라는 그런 거창한 이름까진 아니지. 딱히 정복하지 않아도, 매해 공물을 불쌍할 정도로 많이 바쳐서 살려둔 건데.”
그렇다고 센칸에서 탐나는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이 탐나는 것도 아니라 정복까진 시간이며 자원 낭비가 아까울 정도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속국, 이라고 했지. 플로라는 처음 센칸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황당해하던 시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센칸을 깎아내리는 것이 왜 이렇게 속이 시원한 건지 모르겠다.
“왜 웃어?”
동맹이라는 말에 흥분해서 열변을 토하던 시몬이 플로라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속이 시원해져서요. 라비우가 폐하의 앞에서 조아리는 모습을 보면 더 후련할 것 같네요. 갑자기 건국제가 기대되기 시작했어요.”
“난 그래도 걱정돼.”
“제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근무 시간 외에는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게요. 저도 라비우를 마주치는 건 싫어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걱정은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야.”
플로라는 자신을 걱정하는 시몬을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고맙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도 콕콕 쑤셔 온다.
왜 이렇게까지 다정해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건지.
“그래서 말인데. 내 방에서 함께 지내는 건 어때?”
“……네?”
순간 플로라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귀를 의심했다.
온 세상의 흐름이 끊기고, 정지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아마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런 줄 알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