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76)화 (76/154)

76.

진지한 표정으로 플로라를 빤히 바라보던 카신은 곧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소파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조금 풀어진 그의 표정에 어쩐지 플로라는 안심이 되었다.

그가 곧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농담이다.”

“……네?”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싶어 걱정하던 플로라는 카신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가 웃고 있었다. 방금 전 진지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재미없는 농담이었습니다.”

“솔직히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경을 붙잡을 수 없다. 경은 훌륭한 인재니 당연히 능력을 더 끌어 올려줄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게 맞아.”

“…….”

“내가 경에게 어떤 기사가 되고 싶냐고 물은 적 있었어. 기억하고 있나?”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을 잊었을 리 없었다. 백기사단에 입단하는 것을 결정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으니까.

‘경은 어떤 기사가 되고 싶나?’

‘저는…… 지금까지 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외면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약자를 수호하고, 대의를 위해 정의를 버리지 않는 기사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 기사가 되고 싶어요.’

플로라는 그때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가슴 한구석이 뭉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명 기사단에선 경이 원하는 그런 기사로서의 긍지를 지킬 수 있을 거야. 나는 경의 꿈을 지켜주고 응원하고 싶다고 했지. 그런 기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겠다고.”

“…….”

“더 좋은 조건으로 보내는 것도 경을 이끄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때 느꼈던 따뜻함이 지금도 가슴 속에 전달되는 것 같았다.

정말 좋은 사람…….

“열심히 하겠습니다.”

“……작별 인사는 이걸로 대신하지.”

그래서 더 미안한 마음이 크게 들었지만, 플로라는 감사하다는 묵직한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전한 이별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이상 마음 무거워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기사단에 가서도 카신을 욕보이지 않도록 열심히 하는 것만이 그의 배려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며 플로라는 다시 마음을 다졌다.

* * *

“정말 오기로 했대?”

<그렇습니다.>

건국제에 관련된 서류들을 훑어보던 시몬이 서류를 손에서 내려놓으며 반색했다.

플로라가 여명 기사단에 들어오기로 결정한 소식을 막 들은 참이었다.

“다행이네. 잘됐어. 리비에르에게도 소식은 전해놔야겠어.”

<알겠습니다.>

행동이 빠른 에르네는 곧장 방을 나서서 밖에 있는 다른 기사에게 황제의 명령대로 지시했다. 그 사이 홀로 집무실에 남은 시몬은 창밖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플로라를 자주 볼 수 있다는 건 좋은데, 혹시 자신의 욕심이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든 탓이었다.

결정을 내리고, 추진까지 다 해놓고 이제 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막상 어떤 일이 코앞으로 닥치면 잠시 주춤하게 된다.

자신은 황제고, 플로라는 기사일 뿐인데. 자신의 마음이 이렇다 저렇다 한들, 혼자 간직하고 있는 마음일 뿐이었다.

플로라가 어떻게 받아줄지 알 수 없었다.

부담스러워서 밀어낸다면 어쩌지. 지금까지 봐온 그녀라면 차갑게 선을 그을 것 같아 무서웠다. 그녀를 생각하는 시몬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쩌다 이렇게 감정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어떻게 감정이 이렇게까지 커지게 되었을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지만, 플로라라는 존재가 제 삶에 들어오면서부터 바뀐 많은 것들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가장 궁금한 것은 어찌 되었든 ‘플로라도 같은 마음일까?’였다.

그래서 함께 붙어 있는 시간에도 최대한 마음을 확인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플로라는 알아주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 아무 질문도 하지 않을 거면서.

저의 마음을 알고자 하지 않으면서.

시몬의 눈빛이 순간 짙게 가라앉았다. 좀 지난 기억이 수면 위로 떠 오른 탓이었다.

아카데미를 함께 보낸 학우들과의 만찬이 있었던 후, 플로라의 여명 기사단 영입을 위해 카신과 독대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에야 에르네에게서 말이 전해졌다.

<플로라 경이 이곳까지 왔다고 합니다. 딱히 전달하는 말은 없었고요.>

“……그래?”

그날 밤, 그녀는 왜 이곳에 왔을까.

시몬은 싱그러운 정원을 내려다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뒤늦게 나가보아도 플로라의 모습은 볼 수 없었기에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간 참이었다.

그때 왜 이곳에 왔냐고 물어봤어야 했을까.

……별 뜻이 없었으면 어떡하지? 그냥 산책하다 길을 잃은 거라면?

여러 두려움에 묻지 못했다. 겁쟁이가 되어가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 * *

플로라 당사자만 모르고, 에르네나 카신 그리고 시몬까지도 전부 알고 있는 일이었던 모양인지 그녀의 기사단 이적 처리는 빠르게 진행됐다.

마지막까지 아쉬워하는 동기들과 놀란 듯한 사르트 경에게 갑작스러운 결정이라 미안하다는 말만 전했다. 사르트 경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는 훌륭한 기사가 되어 파견 근무에서 만날 수 있으면 만나자고 했다.

아쉽지만 따뜻한 마음을 안고, 플로라는 여명 기사단에 처음 발을 들였다.

황제의 성 뒤편에 자리한 기사단 본부 옆에 백기사단 본부처럼 그들의 숙소가 있었다.

방을 배정받고 난 뒤, 일 층으로 내려온 뒤에야 처음으로 아는 얼굴을 만났다.

“아…… 플로라 경? 소식은 들었습니다. 근데 막상 여기서 만나니 신기하네요.”

아직도 그를 처음 보았던 날이 눈에 선했다.

바람처럼 나타나 순식간에 적을 베고, 자신을 올려다보던 선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깊은 밤처럼 푸른 머리칼을 반으로 질끈 묶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제는 자신의 선배임이 틀림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젤 경.”

“아…… 네. 반가워요.”

이젤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앞으로 기사단 생활에 어려움이 있으면 제게 말해요. 플로라 양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선배 기사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신을 반겨주는 분위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전 플로라 경과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동안 많이 봐와서 그런지 친밀감이 드네요. 앞으로 잘 지내요. 자, 그럼 단장님께 가보셔야죠? 단장실은 본부에 없고, 성안에 있어요. 주로 황제 폐하와 함께 시간을 보내시니 지금도 아마 그곳에 계실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젤은 플로라가 찾고 있는 바를 명확하게 캐치하고, 그녀에게 조언해줬다.

이젤과 헤어지고 본부를 나선 플로라는 황제의 성 앞에 섰다.

백기사단에 처음 발을 들일 때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듯했다.

플로라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 난 뒤에야 성에 발을 들였다.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한 번 가로막히긴 했지만, 새로운 신입이 왔다는 걸 그들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인지 이후 군말 없이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놀랍게도 익숙한 길이었다.

플로라는 자신이 아는 대로, 시몬의 방으로 향했다.

집무실이 어딘지는 들은 적 없는 터라 일단 그곳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문 앞은 여전히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에르네 단장님을 뵈러 왔다고 말하니 서로 눈빛을 주고받던 기사들이 대답했다.

“이곳은 폐하의 침실이다. 현재 에르네 대장님께서는 폐하를 호위하고 계시니, 아래로 내려가 보도록 해라.”

근엄한 목소리에 플로라는 작게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뒤돌아섰다.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데, 발소리가 여럿 들리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걸음을 멈출까 말까 고민하다가 한층 내려섰다. 그곳에서 맞닥뜨린 사람은 시몬과 에르네, 그리고 여명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시몬을 먼저 발견한 플로라는 순간 말문이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네칸의 태양을 뵙습니다.”

허둥지둥하는 꼴이 우스웠을까.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플로라는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곧 머리 위로 따뜻한 손길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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