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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72)화 (72/154)

72.

서신을 전달받은 플로라는 문을 닫고, 조금 경직된 얼굴로 시몬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둘 사이에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다. 시몬도 슬금슬금 플로라의 눈치를 살피다, 결국 그 서신을 펼쳐 보았다.

마음은 시궁창에 처박힌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저 서신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궁금해졌다.

차라리 자신에게 칸나와 혼인하게 되었다고 쐐기라도 박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분이었다.

그럼 좀 더 홀가분해질 것 같은데.

그렇다고 먼저 황제의 개인적인 일들을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있는 이 위치가 이리 낮아 보이기는 또 처음이었다.

“칸나가 할 말이 있어서 내일 저녁에 급히 방문하겠다는군.”

이번에도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시몬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플로라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하고 싶은 말들을 꾹 참아내었다.

사색에 잠기자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시몬이 칸나와 혼인할 것이라고 제게 쐐기를 박아준다 한들 이 마음이 접히기는 할까?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홀로 간직한 마음이었다.

아마 단념하지 못할 것이다. 플로라는 지금껏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마음과 감정의 무게를 체감하는 중이었다.

혼자 간직하는 것도, 감정을 숨기는 것도 다 쉬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안일한 생각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 * *

에르네가 돌아온 것은 늦은 밤이었다.

다행히 사냥 대회에선 별일이 없었다고 한다.

여명 기사단과 카신은 사냥 대회에 참가한 정예 기사들에게 특별 지시를 내려 경비를 강화하도록 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시몬에게 보고했다.

<고생했어. 플로라 경.>

황제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얌전히 쉬는 꼴이었어서 뜨끔했지만, 그래도 에르네에게 칭찬받는 것이 뭔가 낯설고 새로워서 기분은 환기되었다.

“넌 다시 돌아갈 건가?”

<폐하께서 명령하신다면 돌아가겠습니다.>

“상황은 보고해야 하니. 좀 쉬고 돌아가. 너도 오늘 많이 예민해져 있었잖아.”

<저는 괜찮습…….>

“다들 내 앞에서 괜찮은 척하는 게 취미인가. 응?”

시몬이 플로라와 에르네를 번갈아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플로라는 옆방에서 쉬고, 눈 뜨는 대로 다시 이리로 와. 시종이 안내해줄 거야.”

그의 명령에 놀라긴 했지만, 숙소로 돌아가겠다거나 시몬의 의중을 물을 순 없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의 안내를 받아, 황제가 머무르는 침실 옆 방에 들어섰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밖에 시녀들과 시종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알겠다. 고맙네.”

황제의 방만큼이나 넓고 깨끗한 침실이었다.

예전에 그녀가 머물렀던 방보다 조금 더 크고 세련되게 꾸며진 느낌.

요즘 기사단 숙소에서만 지내 그런지, 이리 큰 방이 적응되지 않았다.

플로라는 다리를 절뚝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왜 마음이 불편한 건지는 묻지 않아?’

시몬의 말이 아스라이 귓가에 맴돌았다.

대화의 흐름이 끊긴 후, 시몬은 더 이상 그 주제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플로라 역시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

‘물어봤어야 하는 걸까…….’

그래 주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어쩌다 이리 생각 많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인지. 스스로가 답답했다.

* * *

신경 쓸 일이 많아 저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던 플로라는 날이 밝는 대로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던 여명 기사단의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에르네의 모습이 보였다.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미동 없이 앉아 있던 그는 플로라의 기척에 눈을 떴다.

자신이 잠을 깨운 건 아닐까, 미안해진 플로라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오늘 저녁에 칸나 영애가 방문하는 것 외에 폐하께 일정은 없다. 웬만한 귀족들은 폐하가 사냥 대회에 계신 줄 알고 있을 테니 노출을 최소화하고 움직여줘.>

“……아. 알겠습니다.”

폐하께 공식적인 일정이 없어 별달리 하는 일은 없었지만, 에르네에게 명령받아 황제의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사명의 불씨가 다시금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꼭 자신이 여명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가 된 것 같았다.

그 밖에도 황제가 일어나면, 플로라가 간단하게 해줘야 할 일들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경은 다리를 다쳤으니 앉아 있어.>

할 말이 모두 끝났는지 에르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 에르네 님.”

플로라는 어느새 떠날 채비를 마친 에르네를 조심스레 불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에르네가 뒤를 돌아 플로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지?>

“몸조심하세요.”

플로라가 옅게 웃자, 에르네가 싱겁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뒤돌아섰다. 에르네가 방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플로라는 소파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오늘도 모두에게 별 탈 없길…….

플로라도 함께 따라나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누구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시몬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깐 고개를 돌리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몬과 눈이 마주쳤다.

플로라가 놀란 듯 숨을 삼키며 눈을 깜빡였다.

“눈을 떴는데, 네가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지는군. 늘 에르네가 있던 자리인데.”

“……일어나셨습니까.”

“몸이 찌뿌듯해. 어제 너무 긴장했나 봐.”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미리 시종이 가져다 둔 물에 적신 수건을 시몬에게 건네자 그가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내기 시작했다.

“많이 불편하시면 치유사를 불러드릴까요?”

“아, 아? 괜찮아.”

시몬이 갑자기 질색하며 고개를 가로젓곤,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플로라는 잘 잤어?”

“……네.”

“다행이네. 잠자리가 바뀌어 불편하면 어쩌나 했는데. 모닝 티를 마실까 하는데, 같이 마실까?”

“아…… 네.”

플로라는 문밖에 있는 시종들에게 황제의 기상을 알렸다. 그제야 방 안으로 들어온 시종들이 황제에게 채비를 시작했다. 어제 옷을 갈아입었던 것처럼, 황제의 침실과 이어진 옆방에서 갈아입었기 때문에 플로라가 방을 나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리비에르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어?”

“아, 네…….”

“너도 그렇고, 리비에르도 좀 한가해져야 할 텐데. 방법을 생각해보는 중이야.”

“리비에르 님이 준비되시면 연락 주겠다고 하셨으니 기다려보겠습니다.”

채비를 마친 시몬과 티를 마시며 리비에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넌 뭐 궁금했던 거 없어? 내게.”

대화의 흐름이 끊기는 듯하자, 티를 마시던 시몬이 찻잔을 내려놓고 플로라에게 물었다.

꼭 질문을 해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플로라는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사냥 대회에서 에르네 단장님이 반마족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어느새 너도 에르네와 계약을 했더군. 그의 말을 알아듣는 거 보니…….”

“폐하와는 어떻게 처음 만나신 건가요?”

시몬이 옛날 생각이 난다는 듯 잠시 픽 웃었다.

“제국에 마수의 대규모 습격이 있던 때였어. 나는 쫓기듯이 전장에 참여했고, 거기서 에르네를 만났어. 다시 생각해도 장관이었는데 말이야…….”

“…….”

“돌연변이 마수들은 지능이 없어. 항상 굶주려 먹을 것을 갈구하기만 하는 덜떨어진 것들이 되지. 인간이며 가끔 폭주하면 동족까지도 잡아먹는다더군.”

“…….”

“에르네가 그들을 죽여 탑처럼 쌓아놓고, 그 위에 서 있었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는 그런 그를 거둬 데려왔지.”

“반마족이면 인간처럼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는 건가요?”

“아, 그게…….”

시몬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어렸을 때 마을 사람들에 의해 혀를 잘렸다는군. 길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핍박당하면서 살아온 모양이야.”

인간들 틈에서 반마족이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떳떳하게 여명 기사단의 단장이 되어 있으니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시몬의 말을 듣자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판단되었다.

플로라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자, 시몬이 옅게 웃었다.

“조심스러운 얘기지. 그 이상은 에르네에게 물어봐. 나도 이런 말을 듣기까지 한참 걸렸지만. 플로라도 그의 마음을 열게 된다면 들을 수 있을 거야.”

“……네.”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불행이 가장 크게 보이는 법이니까.

“마족이 인간과 정을 통하는 일이 종종 있는 건가요?”

“마족들에게도 등급이 있어. 그들에게도 귀족이 있겠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더군.”

“특이한 점은 없습니까?”

“마법에도 능하기 때문에. 자신이 밝히지 않는 이상은 모를 거야. 종종 인간 여자와 정을 통하고, 반마족을 만들기도 한다더군. 하지만 대부분의 마족은 인간을 싫어하니…… 드물어.”

“……그렇군요.”

플로라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수들 중에서도 1급이라 불리는 그 귀족들은 플로라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제대로 된 정보도 없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그들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실험만큼 끔찍한 삶이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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