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몰래 성 밖으로 외출했던 이들은 볼 일을 마치고 난 후, 별일 없이 돌아왔다.
시몬은 습격의 위험도 있으니 플로라를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그녀가 거절했다. 시몬의 차림새가 딱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좋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괜한 구설수에 올라 좋을 것 없었다. 성에 첩자가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플로라와 자주 엮이는 것도 문제가 생기기 딱 좋았다.
시몬은 자신이 절대로 위험에 처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듯했지만, 플로라도, 또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에르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언제나 절대적인 건 없는 법이니까.
에르네까지 만류에 가담하자, 끝끝내 아쉬운 얼굴로 플로라를 돌아보던 시몬은 결국 집무실로 떠났다. 플로라의 곁에는 대신 자신의 방을 지켜주는 근위대 기사가 남았다.
시몬이 떠나면서 ‘이젤 경, 수고해주게.’ 하고 그를 격려한 덕분에 플로라는 자신의 숙소를 밤새 지켜주는 기사의 이름까지도 알게 되었다.
헤어지는 플로라와 시몬, 두 사람의 모습을 마치 금단의 사랑을 하는 통속 소설 속 주인공처럼 바라보던 이젤은 플로라가 겨우 숙소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어둠 속에 몸을 감췄다.
“……플로라 님?”
그렇게 다다른 숙소 근처에서 누군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플로라가 뒤를 돌아보니, 루가르가 있었다.
“루가르 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갑작스레 만난 것이 신기한 듯 웃는 얼굴로 뛰어온 루가르가 플로라의 손에 들린 검은색 로브를 보았다.
“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근데 루가르 님은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아, 그, 그게…….”
루가르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곤란한 듯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저는 근무 중이었어요.”
“…….”
“요새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근무 시간대가 야간으로 바뀌어서 시간이 잘 나질 않네요.”
“괜찮아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안 그래도 플로라 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딱 만나니 신기해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루가르는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게 있는 듯 좀체 플로라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몸은 이제 괜찮으신 거죠? 제가…… 제가 플로라 님을 맡았어야 하는데!”
입술을 삐죽이는 루가르를 바라보며 플로라는 옅게 웃었다.
어떤 임무인지 말해주지 않았어도 루가르가 뭘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것도 그렇고, 저를 맡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봐도 훤했다. 플로라의 방 반대편 숙소인, 폴이 누워있는 병실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네. 저는 이제 다 나았어요. 내일이면 기사단으로 복귀도 해요.”
“벌써요?”
“네! 정말 괜찮아졌습니다.”
플로라가 씩씩하게 말해도 루가르는 믿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지금 상황에 대해 자세히는 몰라도 플로라 님이 위험하다는 건 알아요. 그러니 몸 꼭 조심하셔야 해요.”
루가르는 내내 진지하게 하고 싶었던 말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야 했다.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젤 경 덕분이었다.
‘이쯤 되면 나타날 텐데…….’ 하고 생각했던 그와 딱 눈이 마주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쳤다. 살짝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그의 눈빛이 형형히 빛나는 것 같았다.
빨리 구역으로 복귀해. 그렇지 않으면…… 대장에게 이른다. 딱 그런 분위기가 폴폴 풍겼다. 플로라에게 의문의 습격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루가르는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럼 나중에 뵐게요! 자주 찾아가진 못해도, 소식은 계속 듣고 있어요. 회복이 빨리 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음에 봬요. 감사해요. 루가르 님.”
폴을 잘 지켜달라는 말은 대놓고 하지 못했지만, 플로라가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자 루가르가 눈을 접어 웃어 주었다.
여전히 쾌활한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덩달아 좋아지는 것 같았다. 루가르는 금세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플로라 역시 숙소로 향했다.
플로라는 잠시 방에 들렀다가, 폴의 방으로 향했다.
내일은 기사단으로 복귀하는 날인데, 폴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의 방에는 이든과 신관들이 있었다.
먼저 플로라를 발견한 이든이 맑게 웃어 주며 그녀를 반겼다. 플로라도 이든과 인사를 나누고, 아르제카 신관들에게도 예우를 갖춰 인사했다.
“폴은 좀 괜찮아진 건가 해서요.”
침대로 가까이 가자, 폴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그를 이곳에서 마주했을 때보다는 얼굴에 혈색이 도는 걸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전에는 죽은 시체처럼 보였다면, 그래도 지금은 잠자는 사람처럼 보였다.
혹여 폴의 치유를 돕는 신관들에게 방해라도 될까, 플로라는 상태만 보곤 도로 방을 나섰다. 그런 그녀의 뒤를 이든이 따랐다.
“아. 이든.”
자신을 쫓는 인기척에 살짝 뒤를 돌아보았던 플로라가 반색했다.
“아까 레이디께 들렀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외출을 다녀오셨나요?”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일이 있는 건 아니고…….”
플로라는 이든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이미 방은 거의 정리된 상태였다.
“그저 늦은 시간에 안 계시니 걱정이 되어서요.”
정돈된 방을 훑어보며 이든이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기쁘다가도, 이제 다시 그녀를 보기가 힘들어질 것 같아 울적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제대로 통감되는 불편한 마음이었다.
“아…… 볼 일이 있어 성 밖에 다녀왔어요.”
“폐하와 함께 다녀오신 건가요?”
콕 집어 묻는 말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어, 플로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은 어쩐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도 폐하와 함께 가셨다니 다행입니다. 두 분 다, 참 제 말을 안 듣는 분들이시죠.”
플로라는 이든의 부드러운 일침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 그저 ‘이든이 고생이 많아요.’ 하고 대답하며 멋쩍게 웃었다.
아니라고 하기엔…… 전적들이 화려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일 기사단으로 복귀하시죠?”
“네. 신세 많이 졌어요. 이든.”
“이번에는…….”
“저, 다치더라도 많이 다치지 않을게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지레짐작이 갔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켜내고,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기사가 완전히 다치지 않기란 어려웠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겠단 심정으로 많이 다치지 않겠다고 말하자, 잠시 그런 플로라를 바라보던 이든이 눈을 접어 곱게 웃었다.
“몸조심해요. 레이디.”
이든이 한발 다가왔다.
“예전에 했던 말, 진심이에요. 레이디가 다치면 마음이 아프다는 거.”
그리고 그녀의 어깨 위로 머뭇거리던 이든의 손이 닿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듯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플로라는 묻지 않았다. 그저 심각하게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이리라 생각해 마음이 따뜻해졌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이든.”
이든은 그녀를 조금 더 욕심내었다. 한 발 더 다가선 그가 천천히 플로라를 가볍게 안아 등을 다독여주었다.
“내일은 아침부터 점심까지 쭉 기도가 있어, 지난번처럼 배웅해드리지 못할 거예요.”
“…….”
“내일 인사 대신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레이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이든의 행동에 플로라는 잠시 숨을 멈췄다.
무언가 미묘한 감정이 가슴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무슨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 * *
“단장, 저랑 오찬 같이 해요.”
서류를 살피던 카신이 고개를 힐끗 들어 눈앞에 선 이를 보았다. 부관도, 문을 지키고 서 있는 기사도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바빠.”
“이번에 임무에서 돌아오면 저와 함께 식사하기로 하셨잖아요. 다른 시간을 내달라고 조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밥은 먹어가며 일해야 하잖아요.”
“…….”
“안 그래요? 멜키르 경.”
카신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것 같자 이브니에가 부관 멜키르를 바라보았다. 멜키르는 왜 불씨가 자신에게 튀냐는 듯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 대답 대신 그저 서류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서류가 읽고 싶어지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브니에 경.”
카신은 일에 집중하던 것을 방해받아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도 이브니에는 주눅 들지 않았다.
“며칠 점심 거르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다 몸 상해요.”
걱정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단장을 향한 걱정이 아니란 걸 알기에 곱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어쨌든 마음을 써준다는 것인데, 화를 내거나 혼을 내기도 뭐한 상황이라 카신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