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50)화 (50/154)

50.

스벤타 남작가에서 일하는 고용인 브라움의 휴가는 불시에 주어졌다.

주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니 군말 없이 일정을 받아들였다.

제 주인은 저택을 떠나기 직전 아량이 넓은 사람처럼 금화 주머니를 그에게 던져 주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스벤타 남작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브라움은 마음이 바뀔세라 재빨리 주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하루하루 예산이 빠듯해서 구두쇠처럼 굴던 초창기와는 달리, 재산이 불어난 이후 주인의 씀씀이가 커졌다.

덕분에 전에 없던 못 볼 꼴을 많이 보기도 했지만 이리 콩고물이 떨어지니 그것도 나름대로 참을 만했다. 그렇게 버틴 것이 벌써 이십여 년이었다.

그는 이 가문의 추레한 모습부터 호화로운 지금까지의 모습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 호사를 어떻게 누리게 되었는지도 똑똑히 기억했다.

그 역사는 추악하고 지저분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떠올리지 않고, 잊은 사람처럼 사는 편이 나았다.

“많이도 넣으셨네.”

브라움은 주머니 속 금화를 힐끗 열어보았다가 휘파람을 불며 저택을 나섰다.

본가에 내려가기 전에 먼저 들른 곳은 광장이었다.

그는 주인이 준 돈으로 자신의 부모와 어린 딸에게 줄 선물을 샀다.

선물을 끌어안고 말간 웃음을 지을 아이의 모습을 생각하니 지난 고생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광장에서 선물을 고르느라 지체한 까닭에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그의 본가까지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남작은 볼 일이 있다는 이유로 제도에 있는 저택에 머물고 있었고, 브라움도 그를 따라왔다.

본가로 내려가는 것은 약 반년 만이었다.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어도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어두운 밤이리라. 더 늦어지기 전에 가야 했다. 브라움은 힘든 줄도 모르고 걸었다.

제국에는 편리한 이용 수단인 텔레포트가 있었지만 브라움은 마법석을 살 여유가 없었다.

오랜 정복 전쟁으로 넓은 영토가 되면서 현 황제는 이런 이용 수단을 고안해 냈지만, 아직 대륙 각지에 전부 세워지지도 않았을뿐더러 값이 비싸 결국 텔레포트는 고명하신 분들의 전용 이용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어차피 기대도 한 적 없기에 실망도 없었다. 마법은 가진 자들이 누리는 사치니까.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릴 무렵에서야 걸음을 멈춘 브라움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산을 깎아 만든 길까지 야생동물이 내려오는 법은 없었지만, 어두운 분위기 탓에 어쩐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한 삼십여 분만 더 힘내서 걸으면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여관에서 하룻밤 묵고 아침 일찍 움직여야겠다.

물주머니를 꺼내 목을 축이며 일정을 정리한 그가 다시 걸음을 떼었을 무렵이었다.

사삭.

강한 바람이 분 것처럼 풀들이 이리저리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움은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훑어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분명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들짐승인가? 아니면…… 설마 마수인가!

도망쳐야 된다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브라움은 삐걱거리는 몸을 겨우 움직여 고개만 돌렸다.

그가 서 있는 길옆에는 야생의 풀들과 나무들이 아무렇게나 뒤엉켜 자라 있었다.

바람도 한 점 불지 않는데, 그 잎사귀들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브라움은 숨을 참았다. 본능이 그리하라고 시켰다.

살면서 느껴본 공포는 얼마 없지만, 이건 그중 제일이었다.

그는 곧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똑똑히 보았다.

마수였다. 아니, 짐승인가? 아니다…….

“……사, 사람이.”

모든 것이 지나간 고요한 자리에 브라움은 텅 빈 눈을 한 채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먹다 버려진 음식물들의 썩은 냄새와 오래 빛이 들지 않아 곰팡이가 낀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사위는 고요하고 음습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제도의 골목길은 무척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플로라는 불안한 듯 계속 눈을 굴렸다.

그때 곁에 있는 이가 그녀의 로브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플로라가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주홍색 눈동자가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었다.

별달리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눈빛이 괜찮으니 긴장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불안함으로 굽이치던 마음은 기다렸다는 듯 조금씩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함께 갈 데가 있다며 갑작스레 찾아온 시몬을 따르다 보니, 벌써 성 밖이었다.

비밀통로를 같이 빠져나온 황제의 호위 인원은 총 넷이었지만 이제 주변에 남은 것은 에르네 뿐이다.

모두 어두운 그림자 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을 테지만, 곁에 시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안과 긴장은 가시질 않았다.

골목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시몬은 그 빛을 향해 걸었다.

거리 하나의 차이일 뿐인데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중앙 거리는 등불이 켜져 있어 밝았고, 오고 다니는 사람들 또한 여전히 많았다.

광장 사거리를 지나고 나니 3층으로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 안팎으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지난번 시몬과 제도 구경을 나왔을 때 언뜻 보았던 건물이었다.

낮에는 평범하고 수수한 건물처럼 보였는데, 어둠이 내려앉고 보니 온갖 현란한 등불로 건물 외관을 밝혀 화려하게 느껴졌다. 카지노 또는 주점, 둘 중 하나일 듯했다.

그리고 시몬은 설마 했던 것을 진짜로 해냈다.

걸음이 그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로브를 입고 얼굴을 가렸다고 한들 이리 대놓고 사람 많은 곳을 다니는 건 너무 위험한 일 아닌가.

플로라가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돌아보자, 옆에서 시몬이 쿡쿡 웃으며 손을 꼭 잡아 왔다.

플로라는 눈을 크게 뜨고 황제를 올려다봤다.

“가만히 좀 있어. 네 행동이 엄청 수상해 보이니까.”

알고 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일행이 무리 지어 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까지 경계하는 모습이 얼마나 수상쩍어 보일지.

그래도 시몬의 일이라 그런지 좀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이러다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플로라는 애써 마음을 꾹 누르며 손을 놓아달라는 듯 꼼지락거렸다. 씨알도 안 먹히는 행동이었다.

다행히 그는 정문이 아닌 담을 돌아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화려한 정문과는 달리, 뒷문은 어둡고 지저분했다. 또한 오고 가는 사람도 없었다.

황제와 기사들이 성에서 나오면서부터 오래 지나온 음습한 골목길과 이어진 것 같았다.

이리로 쭉 왔어도 됐을 텐데 일부러 밝은 거리를 돌아온 것 같은 낌새였다.

골목길을 돌아보고, 시몬을 한번 올려다보자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는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뒷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늙은 노파였다.

노파는 익숙한 듯 놀라는 기색 없이 시몬에게 점잖게 인사를 하고, 길을 안내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따로 마련된 계단은 역시나 고요했다. 복도에 들어선 시몬이 방문을 열었다.

방금까지 지나온 허름한 복도와는 완전히 상반된, 고급 샹들리에가 번쩍거리는 넓은 방이었다.

성의 분위기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방의 중앙에는 사각형의 넓은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술병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자, 이제 아무도 없으니…….”

시몬이 뒤집어쓴 모자를 벗고 로브까지 완전히 벗어 던졌다.

에르네도 모자를 벗는 것을 보고, 플로라도 눈치를 살피다 슬금슬금 그들을 따라 했다.

로브를 완전히 벗어 정리하는 사이, 플로라가 들어온 문 말고 다른 쪽으로 난 문이 예고 없이 덜컥 열렸다.

‘어떤 무례한 인간이…….’

플로라가 이를 아득 물고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하늘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플로라를 보고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표정을 돌변했다.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여인은 성큼성큼 시몬에게로 향했다.

“아, 어…… 어머. 폐하. 왜 이제야 오신 거예요. 제가 얼마나…….”

“라벤더. 잠깐…….”

그 광경을 보고 플로라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에르네가 앞으로 손을 뻗어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저 여인은 벌써 제압당해 바닥을 뒹굴고 있을 것이었다.

에르네가 나서서 막는 것을 보니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플로라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에르네를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초인적인 힘으로 인내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한다는 것은 팔이 꿰뚫린 아픔을 참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여자는 시몬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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