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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48)화 (48/154)

48.

사실 황제를 직접 호위하는 상급 기사가 타 기사단의 일개 신입 기사를 지켜야 한다는 건 굉장한 수치였다.

폐하께서 플로라를 성으로 데려오시던 날, 다른 일로 함께 임무에 나서지 못했던 이젤은 그날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웬 여자가 적에게 쫓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폐하께서 결국 그녀를 성으로 데려오셨다, 여자를 쫓던 적은 마법 결계를 불법으로 드나드는 자여서 조사가 필요하다, 정도만 간략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젤은 플로라가 궁금한 것과는 별개로, 이 임무에 불만이 많았다.

아무리 괴한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해도, 폐하께서 너무 유난을 부리시는 건 아닌가…… 싶은 불순한 생각이 불쑥 들 정도였다.

그러나 좋든 싫든 이젤은 같은 여명 기사단 소속 루가르 경과 함께 임무를 나와야 했다.

대장이 직접 지시를 내린 일이니 따라야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다.

그래도 플로라만 유달리 챙기는 게 아니라, 그날 다친 다른 신입 기사의 호위 또한 명령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폐하와 대장께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성까지 들어와 일개 신입 기사를 위협할 간 큰 놈이 있겠거니.

하지만 효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 사실은 좌천당한 거 아닌가.’

큰 나무에 걸터앉아 그림자 속에 모습을 숨긴 이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짙은 남색 빛의 하늘에 휘영청 떠 있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참 밝기만 하지.

이젤의 우울은 깊어져 갔지만 오늘도 평화로운 밤이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낯선 그림자가 숙소 주변을 배회하기 전까지는.

달빛에 비춰 건물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이젤은 눈을 빛냈다.

예민한 감각이 바짝 곤두섰다.

계속 주변을 돌아보고 발소리를 죽이는 괴한의 행동거지와 단도를 들고 있는 모양새가 몹시 수상했다.

그는 플로라가 누워있는 방을 정확하게 알고 움직였다. 동시에 이젤도 움직였다.

“……누구지?”

신원을 묻는다고 해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은 예상했다.

그래도 대답 대신 예의 없게 흉기부터 휘두르는 건 혼을 좀 내줘야 마땅했다.

느껴지는 살기와 움직임을 보니 실력이 상당한 듯했지만, 단도만 들고 있어 이 싸움에선 이젤이 우위였다.

이젤은 재빠르게 공격을 피하고, 단숨에 검으로 괴한을 베었다.

뺨 위로 질척한 피가 튀었다.

순간 며칠 내리 골머리를 앓던 생각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다른 의문이 생겼다.

‘성에서 하고많은 사람 중에 왜…… 신입 기사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거지?’

설마하니 정말 성까지 들어와 습격할 간 큰 놈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개 신입 기사를 죽여서 얻을 게 뭐라고.

이젤은 남자가 쓴 가면을 벗기고, 그의 숨이 끊겼는지 확인했다.

그때 머리 위로 또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이젤이 곧장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은발 머리와 검은 눈동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 들켜 버렸네…….’

다행히 괴한은 아니었다. 그가 호위하고 있는 상대, 플로라였다.

호위 대상의 몸 상태가 아직 많이 좋지 않으니, 괜히 불안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당부는 이제 틀려 버렸다.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느끼지만 반짝거리는 머리칼이 아름다웠다.

‘놀란 건가?’

크게 뜨인 눈을 보자 당황한 이젤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어둠을 품은 눈동자가 죽은 괴한에게 닿았다가, 이젤에게로 옮겨가길 몇 번.

상황을 파악한 건지 플로라가 살짝 눈짓으로 이젤을 향해 인사했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옅게 웃는 모습이 해사했다.

불시에 이젤의 볼이 달아올랐다.

‘……설마 내게 반한 건 아니겠지. 폐하와 라이벌이 되면 곤란한데.’

한동안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플로라의 모습을 보며 이젤은 그런 착각을 했더랬다.

그는 착각을 좋아했고, 그게 맞아떨어질 때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전부 헛다리였다.

* * *

이 불합리하고도 엿 같은 세상.

이젤은 속으로 분을 삭였다. 괴한을 상대한 건 저인데, 저 눈빛은 뭐냐고. 뭐야.

<루가르. 네 구역에는 별다른 낌새가 없었나?>

“아…… 네. 없었습니다.”

깊은 밤이 지나 새벽빛이 어슴푸레해질 때쯤 대장에게 임무 보고를 했더니, 걱정 어린 눈빛은 고스란히 루가르에게 향했다. 그 꼴을 본 이젤의 입이 절로 세모가 되었다.

짝 없는 사람은 억울해서 살질 못해.

대장의 저런 눈빛은 꼭 루가르에게만 향하곤 했다.

보는 사람이 다 간질간질할 정도로 걱정에 찬 표정.

금방이라도 멀리 떠나버릴 사람처럼 애틋하고 절절해 보여서, 가끔 속이 문드러질 것도 같았으나 대장의 연애 문제니 섣불리 끼어들지 못했다.

아마 ‘대장님, 혹시 루가르 경을 좋아하십니까?’ 하고 물었다간 쓸데없는 소릴 한다고 훈련의 강도를 높이거나 직접 대련해서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을 것이 뻔했다. 아님 소리 소문 없이 어디 묻혀 버릴 수도……!

루가르야 근위대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동안 대장을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고 다녔으니, 근위대 기사들이라면 다 아는 그녀의 마음을 정작 본인이 모를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대장이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고, 저리 벽만 세우는 건 역시…….

‘대장이 반마족이기 때문인가?’

단지 짐작일 뿐이었지만, 그 이유 밖에는 대장의 행동이 설명되지 않았다.

이젤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미묘한 눈빛을 바라보다가,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제가 플로라 경의 구역을 맡겠습니다! 변경해주십시오. 대장!”

<안 돼. 배정된 그대로 진행한다.>

“대장! 제발요.”

<번복은 없다. 명령에 불복종하면 정원 백 바퀴다.>

“……백 바퀴는 좀 너무하잖아요! 이 넓은 데를.”

처음 이 호위 임무를 배정받았을 때, 두 사람이 주고받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젤은 눈만 가느다랗게 떴다.

‘대장, 일부러 배정을 그렇게 하신 거죠. 제 구역이 더 위험하니까.’

대장은 플로라가 습격당할 것을 예견한 모양이었다. 이건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며칠만 더 고생해. 이젤, 수고했다. 그럼 둘 다 숙소로 돌아가서 쉬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루가르와 이젤은 폐하의 침소 옆에 마련된 단장실을 빠져나왔다.

“이젤 경, 정말 다행이에요. 플로라 님이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사실 플로라 님은 제가 많이 아끼는 분이거든요. 사적인 감정이 들어갈까 봐 대장이 구역 변경을 안 해주시는 모양이에요.”

이 두 사람, 누가 안 도와줘도 정말 괜찮은 걸까.

루가르도 그녀 나름대로 헛다리를 짚는 모양새가 아주 현란했다.

“내 구역이 훨씬 위험하니까 변경 안 해주시는 거지.”

“……아. 아, 하긴요. 저는 이젤 경보다 아직 실력이 한참 모자라니까요. 좀 더 수련에 정진할게요!”

아, 그게 그렇게 간다고? 답답해.

고구마를 백 개 삼킨 것 같은 기분에 결국 이젤은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직구로 던져 주어도 알아먹지 못할 기세였다.

남의 연애사를 보는 건 재미있지만, 직접 끼는 건 역시 골치만 아파진다.

알아서 하라지.

이젤은 주먹을 불끈 쥔 채 결의를 다지는 루가르를 뒤로하고, 성을 빠져나갔다.

 * * *

“시몬…… 안 가세요? 밤이 늦었습니다.”

저녁에 치유를 받은 뒤 한숨 자고 나서도 시몬이 곁에 있었다.

심지어는 서류까지 들고 와서 읽는 자태에 머리가 어질했다.

저녁에는 방문객이 거의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신경 쓰지 말고 쉬어.”

“시몬이 불편하게 앉아만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차라리 책상에서 보세요.”

방 안에는 분명 책상도 있고, 테이블도 있는데 시몬은 침대 옆에만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제야 그걸 깨달았다는 듯 시몬이 아, 하고 작은 탄식을 내뱉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아.”

보는 제가 불편해요.

울컥하고 치솟는 말을 내리누르자, 시몬이 옅게 웃었다.

“걱정해주는 건가? 고맙군.”

황제를 걱정하는 건 그의 기사로서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괜히 마음이 들킨 것처럼 수줍어졌다.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잊은 플로라가 입술을 움찔거리다 이내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돌려 버렸다.

고요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은 네가 뭐라 해도 여기 있을 거야. 그러니 신경 쓰여도 푹 자도록 해. 어제 많이 놀랐을 것 아냐. 잠이 안 오면 이든을 다시 불러줄까?”

어제 괴한이 습격하려 했던 일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돌아가라고 만류해도 고집을 부릴 것 같아 플로라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괜찮습니다. 잘게요.”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어댔다.

그의 이런 호의 때문에 쓸데없는 마음만 깊어지는 거겠지…….

하지만 호의는 딱 호의일 뿐이다.

착각은 자유지만, 그 이상의 선을 넘어선 안 된다는 걸 플로라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겨우 감정을 추스르자 몸도 다시 노곤해졌다.

오늘 밤은 아무 일도 없길 바라며 플로라는 다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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