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카신 단장에게 내려오라는 기별이 왔다.
몇 벌 없는 옷과 물품 정리는 진작 끝났고 단복도 갈아입은 상태였으니 가기만 하면 됐다.
플로라는 본부 건물로 옮겨가 단장실에 들어섰다.
단장실에는 여전히 문을 지키는 기사, 그리고 단장의 부관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플로라가 다시 경례하며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섰다.
서류에 집중하고 있던 모양인지, 카신이 미간을 찡그린 그대로 눈만 들어 플로라를 봤다.
“거기 잠시 앉아 있어.”
“예.”
플로라는 카신의 손짓에 따라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다른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공간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던 플로라는 겨우 작게 숨을 내뱉었다.
카신의 눈짓에 문을 지키던 기사가 움직였다.
문이 열리고, 상황 파악을 하듯 누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와. 멜리아.”
에메랄드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자였다. 플로라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카신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부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닮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플로라는 본체만체하던 부관이 멜리아라는 여자에게는 눈을 접어 웃어주기까지 했다. 멜리아도 그에게 인사했다.
사이좋은 남매라든가, 쌍둥이라든가…… 뭐, 그런 건가.
풍기는 뉘앙스만 봐도 관계를 알 것 같았다.
“자, 멜키르. 이건 어쩔 수 없이 네가 좀 봐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신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서류 뭉치를 부관의 책상에 턱, 올렸다.
멜리아와 같은 머리 색을 한 남자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카신을 올려다봤다.
“……신입들은 제가 대신 데리고 다닐 테니, 단장님이 여기 계시면 안 될까요?”
“멜키르, 혹시 될 거라고 생각해서 물은 건가?”
“아니요.”
“다행이야.”
카신이 얄밉게 히죽 웃으며 부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느새 플로라와 멜리아에게 다가온 카신이 무척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의 첫날은 특별히 내가 안내한다. 한 명은 정규시험 수석이고, 한 명은 황실 아카데미 차석 졸업생이니.”
공교롭게도 올해 카신이 꼽는 유망주는 둘 다 여자였다.
매해 신입 기사를 친히 끼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었지만, 올해는 없는 시간이라도 내서 가야겠다고 진작 마음먹었던 참이다.
한 명은 두뇌가 뛰어나고, 한 명은 검술이 뛰어났다.
플로라는 두 번째 시험에서 3급 마수를 불러낼 정도의 실력자였고, 심지어 마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애물단지인 것 같지만 그걸 사용할 수 있을 때의 미래가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유망주였다.
멜리아는 황실 아카데미의 차석 졸업생이었다.
매해 황실 아카데미의 졸업생 수석과 차석은 별다른 시험 없이도 기사단에 입단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속을 결정하는 건 단장의 몫이었다.
플로라를 백기사단에 빼앗긴 하키라는 이번 수석 졸업생은 자신이 키우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카신은 자신의 직속 부관 멜키르의 동생인 멜리아가 이번 연도 황실 아카데미의 차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올해는 수석 욕심은 버리려 마음먹었던 참이라 흔쾌히 알겠다고 했더니 하키라는 또 얼굴이 울긋불긋해져선 길길이 날뛰었다.
매번 내가 수석을 데려가네, 네가 데려가네, 하면서 투덕거렸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카신이 반기를 들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키라는 망연자실했지만 곧 순순히 인정했다. 플로라를 데려간 양심이 있으면 수석을 양보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런 것에 양심을 따질 생각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힘 빼지 않고 서로 원하는 이를 잘 데려온 게 되었다.
“가지.”
카신이 두 햇병아리들을 내려다보다가 단장실을 나섰고, 그 뒤를 두 신입 기사가 따랐다.
단장실의 반대편 끝에는 식당이 있었다. 안에서는 이미 많은 기사들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카신이 들어서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거수경례했다.
“편하게 식사해.”
카신이 손짓하며 기사들을 앉히곤, 음식을 챙겼다.
플로라도, 멜리아도 카신을 따라 했다. 플로라는 한동안 성기사단의 식당을 이용했으니 익숙한 방식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플로라의 접시를 본 카신이 옅게 웃었다. 맛있어 보이는 걸 이것저것 다 담고 보니 어느새 음식이 수북했다.
매일 훈련을 하는 기사라면 다들 이 정도는 먹는 줄 알았는데, 멜리아의 접시를 보니 아닌 모양이었다.
괜히 멋쩍어진 플로라가 카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문득, 시험 당일 그에게 배곯는 소리를 들켰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얼른 먹어. 오늘 할 게 많으니.”
카신은 플로라의 표정이 변하는 걸 봤다.
음식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귀여운 마음에 미소가 지어졌는데, 그녀는 다른 뜻으로 오해를 한 것처럼 보였다.
보는 눈도 많고 듣는 귀도 많아 오해를 바로잡아줄 순 없었다.
카신은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그와 마주 앉은 멜리아와 플로라도 그제야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마구간과 황실 대장간에 다녀왔고, 다시 기사단 본부로 돌아와 훈련장으로 향했다.
원거리 무기 훈련을 할 수 있는 훈련장은 기사단 본부 근처 정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가장 먼저 그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나무로 만들어진 표적이 세워져 있었다.
뭔가 내기나 놀이를 하기 딱 좋게 생긴 훈련장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웬만해서 활은 잘 쓰지 않으니, 연습장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넌 활을 잘 다루더군. 검술보다 훨씬 뛰어나서 좀 놀랐어.”
“활을 더 많이 만지며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익숙한 모양입니다.”
플로라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내기를 해보겠나?”
“어떤 내기 말씀이십니까?”
검은 몰라도 활이라면 좀 자신 있었다. 내기란 말에 플로라가 눈을 반짝였다.
“음. 선물을 주는 거야. 무엇이든 상관없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꽃 같은 것만 뽑아오지 않는다면…….”
“그럼 제가 지면 월급 받고 난 뒤에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가진 돈이 없어서요.”
“좋아.”
“점수가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같이 선물을 교환하지.”
간단명료한 말이었다. 플로라는 내기를 승낙했다.
자신에 찬 그녀의 모습에 카신이 옅게 웃었다.
카신이 먼저 훈련장에 구비된 보급용 활을 들었다.
플로라도 같은 활을 사용했다.
멜리아는 활을 다루지 못하는 관계로 내기의 증인이자 심판이 되기로 했다.
점수가 적힌 표적에 화살을 세 발씩 쏴서 합이 높은 사람이 승리하는 간단한 규칙이었다.
“먼저 할 텐가?”
카신의 물음에 플로라는 잠시 고민했다.
내기에서의 우선권은 기선제압을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처음이라는 부담감이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손에 맞지 않는 활이라도 정확하게 쏠 자신은 있었으니, 우선권을 가져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플로라가 눈을 빛내며 과녁 앞에 섰다.
활을 쏠 때는 많은 것에 집중해야 했다. 눈은 표적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온 감각은 사방을 면밀하게 훑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까지 가늠해 팽팽하게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정확하게 가운데에 꽂혔다.
그녀는 한껏 당겼던 줄을 놓을 때의 쾌감이 좋아서 활을 좋아했다.
곧 화살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간 멜리아가 플로라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정확하게 가운데에 꽂혔어요!”
다음은 카신의 차례였다.
한 발 물러서자 카신이 방금 플로라가 서 있던 자리에 섰다.
그새 소식이 전달된 모양인지 훈련장에 많은 기사들이 와있었다.
카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뒤에서 지켜보기에 그의 자세는 완벽했다.
한껏 당겼다가 팽, 하고 놓은 화살이 표적으로 날아갔다.
자세도 완벽한 데다 바람의 방향까지 읽고 있는 걸 보니 단장 역시 활을 다루는 실력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다시 쪼르르 안으로 들어가 표적을 확인한 멜리아가 이번에도 엄지를 올렸다.
결국 내기는 동점이었다.
카신과 플로라 둘 다 서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운데를 맞췄다.
마지막 화살을 빼 오는 멜리아의 눈빛이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플로라를 약간 존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물은 네 월급이 나오고 교환해야겠군.”
카신은 무심하게 말하고는 보급용 활을 놓고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주변에 있던 기사들 또한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기사단 본부 옆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총 3층으로 되어 있는 건물은 대부분 훈련장과 연무장으로 쓰인다고 했다.
큼지막한 철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는 곳도 있었는데, 멜리아가 궁금해하니 그곳은 서류를 보관하거나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인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플로라와 멜리아 모두 짧게 카신과 대련했는데, 활은 몰라도 검은 확실히 카신과 격차가 벌어졌다.
자세며 호흡,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까지.
에르네와 대련하며 느꼈던 어떤 벽 같은 것이 단장에게서도 느껴졌다.
에르네의 검술은 정확하고 날렵했지만, 카신의 검술은 정확하며 묵직했다.
에르네에게는 급소를 베여 죽는다고 치면 카신은 몸이 두 동강 나거나 과다 출혈로 죽을 것 같은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