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플로라는 여기가 꿈속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꿈이 아니고서야 자신이 센칸에 있을 리도, 르네가 살아 있을 리도 없으니까.
에메랄드색의 싱그러운 머리칼에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프릴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메린 성 정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플로라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르네. 뭐 하고 있어?”
“아, 책을 읽고 있었어.”
“동화네.”
“응…… 아이에게 좋다고 해서.”
르네는 생글 웃으며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동그랗게 부른 배를 쓰다듬는 손길은 퍽 다정하고 섬세했다.
“몇 달이나 됐지?”
“일곱 달.”
웃고 있는 르네와 달리, 플로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 일이 벌어진 지 벌써 반년도 훌쩍 넘게 지났단 소리이기 때문이다.
메린 성에서는 많은 기사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루엘, 그리고 실험을 돕는 학자와 연구원이 함께 살았다.
성의 환경은 열악했다. 센칸의 영지지만,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외딴섬이었기에 생필품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그래서 음식도 항상 부족했다.
하물며 방조차 모자라서 기사들은 조를 엮어 여러 명이 함께 합숙했다.
개인 방을 배정받을 수 있는 건 공훈을 세운 기사 또는 병 걸린 기사뿐이었다.
르네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살았다. 다만 숙소를 성별로 나누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침대를 같이 쓰지 않아도 남녀가 방을 같이 쓰면 언제든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센칸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습성이 만연한 곳이다. 그 나라의 기사가 자신보다 약한 것을 돌보는 배려나 도덕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겨우 턱걸이로 기사단에 들어온 르네는 언제나 많은 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플로라가 르네를 지켜줄 때도 있었지만, 개인 방이 생긴 뒤로는 매번 그녀를 챙길 수 없게 됐다.
그렇게 사건은 터졌다. 같은 방을 쓰는 기사 중 한 명이 술에 취해 르네에게 몹쓸 짓을 했다.
제정신이었다면 플로라가 무서워서라도 건드리지 못했을 텐데,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는 꽤나 대담해진 탓이었다.
플로라는 일단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남자부터 죽였다.
성의 주인인 아이든은 미친놈이긴 하지만, 플로라에게는 꽤나 관대한 사람이었다. 동료 기사를 죽였지만 6개월 감봉이라는 솜방망이 처벌만 받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를 죽였다고 해서 일어난 사건이 없던 게 되진 않았다.
르네는 플로라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밝고 씩씩한 여자였다.
희고 고운 피부와 뺨에 난 주근깨, 웃을 때 왼쪽 볼이 쏙 들어가는 보조개는 그녀를 한층 더 여성스럽게 보이게끔 했다.
그런 르네가 사건 이후 죽은 듯이 지냈다. 웃지 않았고, 울지 않았다.
센칸의 기사라면 감정조절 훈련을 받아 쉬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지만, 르네에겐 결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랑스럽고,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또 제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르네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봐 플로라는 조급했다.
시간은 다행히 그녀를 회복시켰다.
르네가 다시 웃을 수 있게 됐을 때, 플로라는 감히 괜찮냐는 질문을 했다. 르네는 언젠간 일어났을 일이니 각오하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렇듯 이미 기사들끼리의 강간은 성 내에서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르네가 처음이 아니었다.
아무튼 앞선 많은 이들이 자살하거나, 미치거나, 혹은 르네처럼 담담하게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아이든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규칙을 개선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범법행위가 만연히 일어나는 이 성의 세계를 재밌게 여겼다.
심지어 아이를 낳아주면 공훈을 세운 것으로 인정해 개인 방을 주겠다고 설득하기도 했다.
르네는 임신을 했고, 아이를 낳겠다고 했다. 그리고 벌써 배가 볼록하게 불러 있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아이를 플로라가 달가워할 리 없었다.
르네도 그래야 마땅한 건데 오히려 행복해했다.
플로라는 그런 르네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행복해하고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여태 봐온 그 어느 때보다, 르네는 행복해 보였다.
* * *
장면이 전환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역시 꿈이었으며 익숙한 공간이었다.
꿈에서 깨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거대한 드래곤의 앞발에 짓밟힌 것처럼 숨을 쉬는 것도 벅찼다.
침대와 옷장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방의 환경은 열악했다.
벽에는 거무스레한 곰팡이가 피어 있고, 침대는 다 낡아빠져 움직일 때마다 삐거덕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플로라는 그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앉아 창밖을 보고 있던 르네가 말했다.
“플로라. 나…… 이제 그만두고 싶어.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
르네의 말은 충격이었다.
메린 성의 기사들은 자의로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평생 아이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니 르네의 말은, 플로라에게는 죽고 싶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르네. 그게 무슨 말이야?”
이 외딴섬에서 탈출이 성공할 리도 없었지만, 임무를 나갔다가 몰래 탈출하는 경우도 많았으니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소문으로도 듣지 못했다.
지옥이라도 쫓아갈 기세로 구는 이유야 뻔했다. 이 성에서 일어나는 비도덕적인 일이 이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될 테니까.
지금 센칸은 발톱을 감추고 있는 호랑이였다. 강대국들은 센칸을 별 볼 일 없는 불쌍한 소국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섬에서 살인 병기를 만들어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직 아이든의 연금술은 완벽하지 않았다.
신체를 일부 강화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마력이 없는 이에게 마력을 심고,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마스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센칸의 목적이었다.
그것은 분명한 신의 영역이거늘, 아이든은 감히 신에게 도전했다.
이 연구가 완벽해질 때까지 센칸은 발톱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각 제국에 첩자들을 파견해 정세를 살피고, 기밀을 빼내 협박할 거리를 저장해두며 배를 채워 가겠지.
그러니 집요한 아이든과 라비우가 도망친 자들을 가만히 둘 리 있을까?
백에 하나 자비를 베푼다면 말하지 못하게 혀를 자르고, 글을 남길 수 없도록 팔을 자른 뒤에야 보내줄 것이다.
“……처음엔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르네는 그 힘든 길을 가겠다고 말하는 거였다. 다 알면서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 아이는 내가 겪었던 일을 똑같이 당해야 할 거야.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아.”
“르네.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다니? 그건 큰 영광이야. 센칸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그 애가 모든 것을 견디고, 영웅이 되는 상상을 해봐!”
르네는 모든 것에 해탈한 표정이었다.
“나도 지금껏 그런 상상을 하면서 살았어. 플로라. 난 널 보면서 견뎠어. 지금은 네 등을 쫓지만, 언젠가는 나란히 서고 싶단 생각을 했어.”
“…….”
“하지만 지금 내 꼴을 봐. 내 몸 하나 지키지 못해서, 사랑 없는 관계에 임신까지 해버렸잖아. 몸이 점점 둔해지는 게 느껴져. 나, 아이를 낳고 난 뒤에도 검을 잡지 못할 것 같아.”
르네는 한껏 부른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내가 꿨던 꿈은 헛된 거였어. 난 아무리 노력해도 너처럼 될 수 없을 거야.”
플로라는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르네가 영영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그런 불길한 예감.
“르네! 그런 나약한 소리 하지 마. 넌 할 수 있어.”
“아이든 님의 연구는 점점 나아질 거야. 어쩌면 내 아이가 강력한 마스터가 될 수도 있겠지.”
“…….”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헛된 꿈이라면? 나, 내 아이를 그런 도박판에 던져두고 싶지 않아.”
플로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내 손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없었어. 하지만 이 아이만큼은 꼭 지켜주고 싶어…….”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르네에게서 도망치고 싶단 말을 듣기 전까지 플로라는 이곳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상상으로도 하지 않았다.
플로라는 뼛속까지 센칸 사람이었다. 이 성은 플로라가 집처럼 여기는 곳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마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든이 오고, 다른 아이들이 늘고, 이상한 연구가 시작된 이후에도 그녀는 다른 이들보다 특별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불만을 가져본 것도 없었다.
계속 이 편의를 누리기 위해서는 높이 올라가야 하고, 그래서 짓밟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노력했다.
플로라는 정말 독하게 살았다. 때로는 마음을 준 동료를 제 손으로 죽여야 할 때도 있을 정도였다.
르네는 그런 플로라의 곁에 끝까지 남았다. 그녀는 플로라가 잘못된 생각을 하면 올바른 선택을 하게끔 도와주었다.
플로라의 마음에 일말의 인간성이 남아 있던 이유는 르네 때문일지 몰랐다.
르네는 가족이자 동료였다. 플로라가 유일하게 인정한.
그런 르네의 입에서 탈출을 들었을 때, 플로라는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다.
르네에게 화가 났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변해버린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도와줘. 플로라.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아이든 님도, 연구원들도 모두 너와는 친하잖아. 네 부탁은 대부분 들어주시잖아. 날 이곳에서 내보내 줘.”
“못 들은 걸로 할게. 르네.”
“아니면 잠깐 시간이라도 끌어줘. 내가 알아서 도망칠게.”
“르네!”
플로라는 그날 처음으로 르네의 뺨을 때렸다.
반쯤 돌아간 그녀의 고개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상태로 흐느낄 뿐이었다.
“……플로라, 너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니?”
행복?
행복하던가. 행복이란 게 뭔데?
플로라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플로라는 르네를 평소처럼 자주 만나지 않았다. 르네도 플로라를 찾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이는 점차 서먹해졌다. 하지만 플로라는 그때까지도 화가 나 있었다.
이번 일은 무조건 르네가 잘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먼저 사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마음을 바꾸기 전까지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깟 애 하나 때문에 미련하게 구는 것이 한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