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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1)화 (11/154)

11.

“플로라. 잠깐!”

갑자기 시몬이 언성을 높이며 플로라의 팔을 잡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화들짝 놀란 플로라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시몬의 표정은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시몬은 아예 대놓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넌 옷 갈아입을 테니 나가란 말도 안 해?”

“아, 네!”

소리치는 그의 귀 끝이 살짝 빨개진 것이 보였다.

‘설마…… 부끄러운가?’

주색에 빠져 산다는 황제치고는 너무 순수한 모습이었다.

“설마 진짜 미인계라도 쓰려고 한 거야? 내가 눈치 없이 굴었어?”

“아닙니다. 그저 오랜만에 외출할 생각에 들떠서…….”

“아니라면 조심해.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나, 남자라고.”

“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다음에는 제대로 오해할 거야. 그땐 아니라고 변명해도 소용없어.”

“네…….”

뭐가 어찌 되었든 플로라는 자신이 부주의를 인정했다.

그녀가 살아온 환경이 부끄러움 같은 걸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얼굴을 붉힌 시몬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난날 센칸에서 무수한 오해와 추문을 만들었던 건 자신의 부주의 때문일지도 몰랐다.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그 말들이 이명처럼 귓가에 맴도는 걸 보면…… 사실 상처 받았던 것이 아닐까.

“……그럼 나가주시겠습니까?”

플로라의 목소리에 어딘가 힘이 빠졌다는 것을 느낀 시몬이 미간을 좁혔다. 혼이 나서 주눅 들어있는 건가 싶어 마음이 쓰였다.

‘심하게 말한 건 없었는데.’

그래도 마음이 쓰였다.

“시녀를 들여보낼게. 기다려.”

“네.”

시몬은 뻣뻣하게 굳어 서 있는 플로라를 뒤로한 채, 방을 빠져나갔다.

* * *

뭔가 기분이 굉장히 불쾌했다.

플로라는 모든 면에서 시몬이 처음 보는 부류에 속하는 여자였다. 그래서 신기하고 재미있는 면도 있었지만, 이렇게 불쑥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도 했다.

시몬은 곁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에르네와 눈이 마주쳤다.

“플로라는 날 남자로 생각 안 하는 게 분명해. 눈곱만큼도!”

속이 답답해서 푸념을 놓았더니, 에르네가 눈을 깜빡 거렸다.

<주군을 남자로 생각해야 합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조심성이 없잖아.”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에르네로서는 황제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에르네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곧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시몬이 말했다.

“글쎄, 내 앞에서 옷을 훌러덩 벗으려고 하더라니까. 근데 내가 황당한 건 그 행동에 악의가 없다는 거야. 차라리 유혹이라도 하려고 했으면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라고 눈치라도 채지. 저건 뭐 하자는 거야?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아.”

<…….>

보아하니 주군께서 퍽 자존심이 상하신 모양이었다.

“어디 나가서도 저럴까 봐 걱정이 된다니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에르네가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

<……성에 대해 무지한 자라면 따로 선생을 붙여 교육을 시키시는 것이 어떨까요.>

“교육? 진짜 그래야 하나?”

시몬이 진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곧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방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몬이 골라준 파란색 드레스는 흰 피부의 플로라에게 잘 어울렸다. 또한 별을 수놓은 듯한 그녀의 은빛 머리칼과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시몬과 눈이 마주치자, 플로라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애꿎은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귀족 영애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산속에서 보았던 야생의 새끼 맹수 같은 모습과는 천지 차이다.

시몬은 방금 하고 있던 고민 따위는 완전히 잊은 채였다.

<……폐하?>

머릿속에 에르네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시몬이 헛기침을 했다.

“내가 안목 하나는 좋군. 가지.”

시몬이 먼저 등을 돌렸다. 플로라는 시몬을 놓칠세라 그 뒤를 따랐다.

* * *

걷다 보니 어느새 둘 뿐이었다. 황제의 뒤를 따르며 살기를 내뿜던 남자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걷기 불편하진 않아?”

“불편해요.”

플로라는 걷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잘못하다 발목이라도 나갈까 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가뜩이나 오랜만에 땅을 밟는데 구두까지 신어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

“그래도 곧잘 걷는걸.”

“이런 것도 훈련을…….”

플로라가 대답하다 말고 말을 멈췄다. 시몬이 “응?”하고 되물었지만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그저 고개를 저었다.

……하마터면 이런 것도 훈련받았다고 말해버릴 뻔했다.

다행히 시몬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 그럼 조금은 편할 테니.”

“아, 괜찮습니다.”

“어서. 그리 엉성하게 걷다 발목이라도 나가면, 내가 이든에게 어떤 괴롭힘을 당할지 몰라서 그래.”

“이든이 시몬을 괴롭혀요? 말도 안 돼.”

‘네가 괴롭혔으면 괴롭혔겠지. 어떻게 그 아름다운 이든이……!’

플로라는 의심하는 눈초리로 시몬을 보았다가, 마지못해 그의 손 위에 살포시 제 손을 얹었다.

시몬은 만족한 듯 다시 걸었다.

플로라도 발맞춰 그 곁을 따랐다.

확실히 혼자 걸을 때보다는 곁에서 누군가 잡아주는 편이 안정적이었다.

“이든과 많이 친해졌나 봐?”

“방에 있는 동안 매일 만난 건 루가르 님과 이든뿐이니…… 그동안 대화를 많이 나누긴 했어요.”

“그럼 친해졌겠네.”

“……글쎄요.”

“뭐야. 그 애매한 대답은?”

“친해진 건지는 모르겠어요. 대화만 나눴을 뿐인걸요.”

친한 건가. 상대의 뜻도 묻지 않고, 혼자 관계를 정하고 착각하는 건 옳지 않았다.

플로라는 죽음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곁에 두길 원했던 사람은 모두 죽어 나갔으니…….

‘난 너 같은 괴물이랑 친구가 되겠다고 한 적 없어! 불쌍해서 도와줬더니, 무슨 소릴 지껄이고 다닌 거야? 내가 너랑 친구 했다가 단명할 일 있니?’

‘앞으로 몇 명을 더 죽이려고 저럴까. 정말. 괴물 주제에.’

그런 이유로 아무도 그녀의 곁에 있길 원하지 않았다.

남은 건 온통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뿐이었다. 한때는 그런 교활한 인간들에게도 속아 마음을 내어줬던 때가 있었지만 결과는 모두 배신으로 돌아왔다.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플로라는 이든과 친구가 되길 바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친구가 된 건 아니었다.

이든은 질색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환한 빛을 가진 사람이 어둠에 물든 사람과 교화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매일 안부를 주고받고, 일상적인 대화를 자연스레 하게 됐다는 건 친구가 된 거 아냐?”

“아니에요. 이든은 저와 친구가 되겠다고 한 적 없어요.”

“뭐야. 그럼 오늘부터 우린 친구야! 라고 선언해야 관계가 맺어질 수 있나?”

“……혼자 관계를 착각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시몬이 걸음을 멈췄다.

“아. 그럼 난 친구가 하나도 없는 거였군. 허를 찌르는 말이었어. 좀 아파.”

“아니, 시몬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여전히 손은 꽉 쥔 채였다. 시몬은 반대쪽 손으로 플로라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플로라. 넌 이상한 데서 자신감이 없군.”

‘이거 혹시 혼나는 건가.’

단호한 목소리에 플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남을 구하겠다고 혼자 뛰쳐나가면서, 드레스 몇 벌에는 제 분수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

“지금도 그래. 친하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널 싫어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고 있어. 매일 안부를 주고받고 마음을 연 입장이라면, 네 지금 대답이 무척 서운할 것 같은데.”

플로라는 시몬의 말에 살짝 눈을 내리깔며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제 가벼운 말 한마디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서운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시몬이 미간을 좁혔다.

“말 그대로예요.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거든요.”

플로라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이 제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친구를 사귀지 않는단 건 알아요. 하지만 제가 남들과 같은 방법으로 친구를 사귀기엔,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요. 저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경우가 허다했죠. 그때마다 원망의 말을 들어야 했어요.”

“…….”

“이해는 해요. 목숨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제 옆에 있고 싶진 않을 테니까. 제가 뭐라고요. 어차피 지켜주지도 못할 텐데…….”

머리로는 그만해야 한다는 걸 인지했으면서도, 어쩐지 흘러나오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별거 아닌 일에 너무 많은 감정을 드러낸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이렇게까지 할 말은 아니었다.

‘바보 같아 보였겠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플로라가 시몬을 봤다.

한참 침묵 속에서 플로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시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짐이 많은 듯하군. 플로라. 나도 그런 기분 잘 알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전부 짓밟히는 것. 내 것을 지킬 수 없을 때의 무력함.”

말 속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던 어떤 동질감이 다시금 마음을 건드렸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만 사로잡혀 자책밖에 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남는 건 없어. 이제는 조금 그 짐을 내려놓고 편안해졌으면 좋겠어.”

“…….”

“네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고? 단언하지 마. 전부 그렇진 않을 거야.”

맞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그것이 왜 이리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지. 석양을 품은 듯 일렁이는 그의 눈빛 또한.

시몬에게선 이든과 다른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 묘한 기분을 좀 더 느끼고 싶어서 하네칸에 남기로 결정했었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찌르르 울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보여줄게. 네 곁에 있어도 죽지 않는다는 거.”

“시몬…….”

“이미 우린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친근한 사이잖아.”

“…….”

“내가 네 친구가 되어줄게.”

그 따뜻함과 해맑음 때문에 심란함은 사라지고, 어느새 플로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자리했다.

“저와 친구가 되고 싶으세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시면서.”

“그래도 너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까만 밤하늘을 품은 플로라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시몬은 절 믿지 못하잖아요. 저도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게 있고.”

“그래서…… 지금 설마 거절하겠단 건가? 황제인 나랑 친구가 되는 건 엄청난 영광이라고.”

발끈하는 시몬의 모습이 귀여웠다. 플로라가 쿡쿡 웃었다.

“알아요. 저한테 과분한 영광이라는 거. 그러니까…… 시몬과 제 가면이 벗겨지는 날, 그때도 제안이 유효하다면 진짜 친구 해요. 우리.”

결국 시몬도 웃었다. 그리고 정말 특이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가 덥석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해준 것만으로도 족했다.

‘너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진 채 남아있는 무언가가 조금씩은 바뀌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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