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꼭 쥐고 있던 이불을 놓자, 이든이 가볍게 그것을 걷어내고 상처를 살폈다.
“아직은 상처가 깊어요. 밥은 거르지 마시고, 약도 꼭 챙겨 드시고, 틈날 때마다 주무세요. 푹 쉬셔야 빨리 회복될 테니까요.”
플로라는 다친 어깨를 들여다보느라 지척까지 다가온 이든의 얼굴을 가만 보았다.
무언가 새싹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의 말 때문이었다.
센칸에서는 임무를 수행하다 부상을 당해도, 누구 하나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 예의로도 그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다치거나 아프면, 언제쯤 낫는 거냐고 치유사를 재촉하거나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하고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플로라는 고통을 숨기는 것에 익숙해졌고, 점차 심한 부상이 아니면 치유사를 찾지도 않게 됐다.
이리 누워서 대화를 하는 것도, 그래서 익숙하지 않았다. 예의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픈 자신이 쓸모없고 나약해 보였다.
“그럴게요. 치유사 님.”
플로라는 좀 감동했다. 틈날 때마다 자고, 밥도 꼬박 먹으며 푹 쉬라니.
그냥 예의로 건넨 말일지 모르지만…… 그저 말뿐일지도 모른다고 해도 좋았다. 어색하면서 또 따뜻했다.
“편하게 이름을 불러주세요. 레이디.”
평소라면 낯간지럽다고 몸서리쳤을 호칭도 이든을 통해 들으니, 기분 좋은 노랫소리 같았다.
이렇게 타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것은 하네칸 사람들의 특징인 건가. 문득 시몬이 떠올랐다.
“……알았어요. 이든.”
진짜 사람다운 따뜻한 온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플로라는 그 제안을 거부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힘 빼고 편안히 계세요.”
마법의 힘은 실로 신기했다. 이든의 치유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만큼이나 다정하고 따뜻했다.
처음 그의 손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을 때는 놀라서 심장이 뛰었지만, 갑자기 졸음이 밀려들어 치유 도중에 잠에 빠졌다.
얼마나 깊이 잤는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센칸에서는 하루에 많이 자봐야 5시간 정도밖에 잘 수 없었다. 자정이 넘을 때까지 훈련하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다시 훈련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임무로 타국에 발령 나거나 센칸의 왕명으로 불려갈 때면 한껏 예민해져서 허락된 수면시간마저도 편하지 못했다.
당연히 메린 성을 탈출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고.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에 제대로 잠들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녀의 삶에서 어제처럼 편하게 자본 기억은 없었다. 심지어 곁에 누가 있었는데도.
덕분에 몸이 가볍고, 정신이 개운했다.
플로라는 루가르가 챙겨주는 식사와 디저트, 그리고 약까지 꼬박 챙겨 먹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그 이외엔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지만, 갑갑하기는 해도 처음으로 느껴보는 아늑함에 기분만큼은 최고였다.
그렇게 굼뜬 생활을 한 지 3일 정도가 지났다. 시몬은 첫날 이후 줄곧 모습을 비추지 않았지만, 반대로 이든은 아침과 저녁, 정해진 시간에 꼬박 플로라를 찾아왔다.
그 덕분에 깊었던 상처도 점점 아물었고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찢기는 것 같던 통증도 잦아들었다.
이든의 치유력이 참 대단하긴 했다. 직접 몸으로 체감했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는데 단 며칠 만에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의 신성한 마력 때문인지,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저 아름다운 외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디께서는 치유 마법을 처음 보시는 건가요?”
“네?”
“항상 제 손을 신기하게 바라보셔서요.”
“아, 네. 사실 처음이에요. 혹시 부,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봤나. 플로라는 자신이 이든을 방해한 건가 싶어 눈치를 살폈다. 그가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과하실 것 없어요. 그냥 귀여우셔서요.”
뭔가 부끄러웠다. 앞으론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남은 치유는 얌전히 받았다.
“고마워요. 이든.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치유는 금방 끝났다. 이든이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아직은 무리해서 움직이시면 안 돼요. 레이디.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 다시 벌어질 수도 있어요.”
“네. 조심할게요. 이든의 고생을 허투루 만들 순 없죠.”
플로라는 평생 타인을 경계하고 의심하며 살아왔다.
아무리 따뜻함을 내비치고, 호의를 베풀어도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의심했다.
그녀가 지금껏 살아온 세계에서는 믿음을 주면 배신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허다했으니까.
하지만 이든은 조금 달랐다. 그의 무한한 따뜻함 앞에선 어떤 경계도 무장해제가 됐다.
남을 쉽게 가까이 두거나 믿어선 안 된다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다가도, 그가 걱정 한 자락만 내어줘도 마음이 푸딩처럼 사르르 녹았다.
말 몇 마디 나누는 것만으로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긴 쉽지 않은데. 이든이 참 대단해 보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플로라는 될 수 없는 부류의 신성한 존재 같았다.
“저, 나중에 상처가 다 나으면 신전에 놀러 가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환영입니다. 레이디. 제가 직접 에스코트해드릴게요.”
“정말요?”
“네. 정말요.”
할 수 있다면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이든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 언제나 평등하게 대해줄 것만 같았다.
* * *
“……귀찮아. 나가.”
“귀찮아도 어쩔 수 없는데요.”
“내일 하자. 오늘은 쉬어. 너 농땡이 좋아하잖아.”
“그건 폐하죠. 성실한 제게 죄를 덮어씌우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은 진짜 피곤해. 건드리지 마.”
“그럼 일찍 좀 주무세요.”
“……한 마디를 안 져. 재수 없어.”
“하루 이틀인가요.”
실랑이를 끝낸 이든은 생긋 웃으며 시몬의 이불을 걷어냈다.
곧 얇은 가운만 걸친 황제의 몸이 훤히 드러났다. 갑작스레 밀려든 한기에 시몬은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든은 황제의 치유사로서 제 할 일을 시작했다.
이든이 가장 먼저 살핀 것은 황제의 다리였다. 상처는 이제 완전히 아물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번 더 자신의 치유력으로 황제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피로가 누적된 것 빼고는 아주 건강한 몸이었다. 이든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은 없어 보이는데……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없어. 매일 물어보면서 지겹지도 않냐.”
“폐하께선 제 생각을 매일 하시는 모양입니다. 저는 고작 일주일에 한 번 폐하의 몸 상태를 체크하는 것뿐인데요. 혹 그리 원하신다면, 저도 조금 귀찮긴 하지만 매일 아침 들를 수도…….”
“끔찍한 소리 하지 말고, 나가.”
시몬이 이든의 반대쪽으로 몸을 홱 틀며 이불을 끌어 덮었다. 등 뒤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뭘 데려온 거야?”
“……뭐가?”
시몬이 다시 고개를 돌려 이든을 봤다. 이든이 누군가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보기 드문 은발 머리에 강아지처럼 작고 귀여운 레이디 말이야.”
“아.”
시몬은 이든이 누굴 말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챘다.
“상태는 어때?”
“많이 호전됐어. 여전히 팔 쓰는 건 불편해 보이지만.”
“그래?”
시몬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잠깐 플로라를 잊고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그 심각했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니, 벌써 며칠이 지난 모양이었다.
밤에 일하고, 낮엔 자거나 농땡이 피우는 삶을 살다 보면 이따금 시간 감각이 사라지곤 한다.
“볼 때마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니까. 도대체 어떤 무도한 놈들이 톡 하면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한 레이디를…….”
쓸데없는 소리에 시몬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든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근데 마법사들 중에 요새도 인간 실험을 하는 새끼들이 있나?”
“……무슨 말이야?”
“처음 데려왔을 땐 경황이 없어서 말 못 했는데, 레이디 피부가 엉망이야. 그냥 칼에 베인 자국이 아니야. 그건 찢긴 자국이지.”
“…….”
“그리고 너도 느꼈지? 마력이 있다는 거.”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라에게 흥미를 느꼈던 점에는 그 이유도 있었다.
체내에 흩어진 방대한 양의 마력. 게다가 그 정도 전투 능력이면 마스터 급이란 소린데…….
“마력을 전혀 쓰지 못하던데.”
“각성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마법을 아예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지. 근데 어느 쪽인지 모르겠네. 일단 보기엔 마법을 신기해하는 것 같았어. 내가 치유할 때마다 신기하다고 항상 내 손을 빤히 쳐다보는데…….”
“…….”
“아,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토끼 같아.”
“그렇군.”
시몬은 건성으로 대답하곤 눈을 감아 버렸다.
“다 떠들었으면 이만 나가봐.”
“뭐야. 어디서 데려온 레이디인지 말 안 해 줄 거야? 설마 마탑에 리비에르 님의 빈자리라도 채우려고…….”
적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면 대마법사 자리는 아깝다고 생각할 텐데.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었기에 그냥 이든에게서 등을 돌려 버리는 것으로 대화를 차단했다.
“나가. 에르네 부르기 전에.”
이든은 시몬의 강경한 목소리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푹 쉬십시오. 폐하. 요새 많이 피곤하신 듯하니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언제나 아르제카 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다음엔 좀 더 괴롭히겠단 다짐을 하며.
* * *
오른쪽 어깨 부상은 심했다. 플로라가 체감하기에도 그랬다. 처음엔 손가락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한결 수월해졌다. 오늘 아침 식사 때는 포크도 쥘 수 있었다.
‘이만하면 다 나았지.’
여전히 과하게 움직일 땐 어깨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 정도 통증은 별거 아니었다.
“저…… 이든.”
“네, 레이디.”
어깨에 닿는 이든의 마력은 통증을 잊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기분도 좋게 했다. 꼭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여유롭게 산책하는 것 같달까.
그녀는 치유에 집중하고 있는 이든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오른손으로 포크도 쥐었어요.”
“잘하셨어요. 반복적으로 움직일 때 아프진 않으셨나요?”
“……네. 괜찮았어요.”
“다행이에요. 처음보다 훨씬 상태가 호전됐어요.”
이든이 생긋 웃었다. 기특해하는 저 표정을 보니, 눈은 호강하지만 기분은 묘했다.
칭찬받으려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졸지에 애가 되어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