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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7)화 (7/154)

7.

‘아파…….’

불현듯 정신을 차린 플로라는 자신이 센칸의 기사와 대치하다 부상을 당했고, 결국 정신을 잃었단 사실을 상기했다.

‘그럼 여긴 메린 성이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눈을 뜨면 아이든이 어떤 미친 짓을 해댈지 뻔했다.

실험을 빙자해 배라도 가르려나. 아니면 마수의 소굴에 던져 넣으려나. 그것도 아니면…….

온갖 고문을 당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두려워 몸이 떨렸다.

‘정말 그곳이라면……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게 해주세요.’

플로라는 간절함을 담아 신께 기도했다. 웬만한 기도 따윈 들어주는 법 없는 야속한 신이지만, 인간들은 매번 같은 기대를 하지 않나.

플로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다르길 바랐다.

그때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꽃향기 또한 풍겨왔다.

‘메린 성이 아니야……?’

기도가 통한 것일까. 플로라는 이곳이 센칸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살던 메린 성과는 느껴지는 공기의 질부터 달랐다.

용기내 눈을 뜬 플로라는 안도했다. 매일 지옥처럼 마주했던 낡은 천장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 달린 분홍색 실크 캐노피가 인상적인 쾌적하고 화려한 방이었다.

‘여긴 어디지.’

저런 분홍 레이스 따위가 이리 예뻐 보일 줄이야.

이곳이 어디냐는 궁금증은 뒤로한 채 플로라는 한참 캐노피를 바라봤다. 이런 건 첩자 활동을 할 때 귀족의 저택에서나 보던 것이다.

‘지금은 메린 성이 아닌 것만으로도 충분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자, 바짝 경직되었던 근육들이 차츰 느슨해졌다.

“깼어?”

그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플로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은 뒤로한 채였다. 예민한 반사 신경이 당장에라도 낯선 이를 공격할 것처럼 팔딱거렸다.

하지만 정작 플로라의 눈에 들어온 건 다른 의미의 위협적인 광경이었다.

햇살이 담뿍 들이치는 창가에 걸터앉은 남자의 미모는 청량했다.

정돈된 검은 머리칼, 하얀 피부, 그리고…… 태양처럼 영롱한 주황색 동공.

그를 알아본 플로라의 시선이 흔들렸다.

“……시몬?”

“이름은 기억하고 있네. 똘똘해.”

그는 읽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플로라에게 다가왔다.

‘시몬이 왜 여기에?’

그는 숲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말끔한 모습이었다. 얼굴에 피가 튀고, 옷이 구겨지거나 찢어지고, 머리칼이 흐트러진 몰골일 때도 충분히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미모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것 같았다.

금색 휘장이 달린 검은색 제복은 몸에 꼭 맞아 그의 탄탄하고 굴곡진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사실 여긴 천국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나…… 남자에 관심 없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눈이 엄청 높았던 건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넋 놓고 시몬의 얼굴을 보던 플로라가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했다.

이런 시답지도 않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여긴 어디죠?”

“우리 집.”

집이라면? 그는 하네칸의 황제니, 성이 곧 그의 집이 아닌가.

“제가 왜…… 여기 있나요?”

“곤경에 처한 것 같기에 구했어.”

“……네?”

“이번에는 어쭙잖은 짓이 아니었겠지? 일부러 잡혀가려고 했다거나…….”

구했다, 라는 말에 심장 한구석이 쿵쿵 뛰었다.

이 돌 같은 심장이 이렇게 뛰기도 하는구나. 기분이 묘했다. 법칙을 거스르고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것 같았다.

‘구하다니? 왜?’

그러나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시몬은 자신을 구하려 했다. 처음엔 제국민이 나쁜 일을 당하는 줄 알고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쥐새끼처럼 몰래 숨어든 이방인에 도망자라는 걸 안 뒤로도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성까지 데려와 치료해주다니.

플로라의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왜죠?”

“뭐가 왜야?”

시몬은 되려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물었다.

“왜 하네칸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저를 구하셨냐고 물은 겁니다. 저는 도망자일 뿐이고, 신원도 확실치 않은걸요.”

“너도 날 구해줬으니까. 난 뭐든 잘 갚는 편이거든.”

플로라도 시몬을 구하고자 했지만, 그건 다른 문제였다.

시몬은 한 제국의 황제였으니까. 그것도 하네칸의 황제.

하네칸이 쇠퇴하는 것은 센칸의 소원이었다. 현 황제가 죽는다고 제국이 망할 것까진 아니지만, 차기 황제 후보가 없는 상태에선 여러모로 약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플로라는 그 어떤 빌미도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살리려 한 것뿐이었다.

“몸은 좀 괜찮나? 당분간 움직이기 힘들 거라는데, 편하게 누워 있어.”

“……괜찮습니다.”

침대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황제가 눈앞에 있는데 마음 편하게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시몬이 걱정 어린 눈으로 플로라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을 나서면 다시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되겠지?”

“…….”

“완전히 회복된 후에 나간다고 해도 며칠 못 버틸 것 같고.”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는데……. 암울한 현실에 숨이 턱 막혔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들어볼래?”

“제안이요?”

갑작스러운 소리였지만, 황제의 제안이라니 호기심은 생겼다. 플로라가 눈을 깜빡이며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쫓기는 이유는 네가 직접 말해주기 전까진 묻지 않을게. 그러니 이곳에서 사는 게 어떻겠어?”

“……네?”

“너 어차피 갈 데 없잖아.”

정말 예상치도 못한 제안이었다. 플로라는 시몬을 멍하니 바라봤다.

‘성에서 살라니.’

그 말은 플로라에게 새로운 삶을 주겠다는 소리였다.

‘왜?’

살면서 이유 없는 호의란 없다고 배워왔다. 살다 보니 그것만큼 현실적인 말도 없었다.

목숨도 살린 건 그렇다 치고, 감옥에 가두어도 모자랄 판에 치료까지 해줬다.

게다가 도망치는 이유도 묻지 않고, 이곳에 숨겨주겠다니. 지금 시몬이 한 말들은 온통 이유 없는 호의들뿐이었다.

그의 배려가 감동적이기보다는 무슨 꿍꿍이가 있을까,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의 제국민이 되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 거야.”

이 잘난 얼굴을 가진 군주를 모시는 것만큼 복지 좋은 일이 또 있겠냐마는…… 그런 허접한 이유로 이 제안을 넙죽 받아들여선 안 됐다.

생각을 정리한 플로라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목숨을 구해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이유 없는 호의는 불편합니다.”

“역시 그런가.”

시몬은 잠깐 당황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금세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유가 있다면?”

“……네?”

하지만 순순히 포기하진 않으려는지, 꼬리를 물어 되물었다. 플로라가 도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허리를 굽혀 지척까지 다가와 있던 시몬이 그녀를 향해 생긋 웃었다.

거리가 가까운 것은 둘째 치고,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또다시 저 영롱한 눈빛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 눈에는 사술이 담긴 게 분명해…….’

“난 네 능력이 아까워. 그러니 제국의 힘이 되어주었으면 해.”

“…….”

“설마 쫓기며 사는 걸 좋아하는 독특한 취향은 아니겠지?”

그의 질문에 문득 잊고 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땐 내가 널 죽일 거야. 반드시.’

아이든을 향해 당돌하게 선포했다. 그러나 플로라는 여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무기력하게 도망치는 것밖에는.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절벽에서 떨어져 간신히 살아남았을 때는 야심 찬 복수를 계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무지 실현 가능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사는 걸 좋아할 리가 없지요.”

복수를 할 수 없다면 사람들 사이에 섞여 평범하고 정의롭게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나. 악의 없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도움을 주었던 평범한 사람들은 모두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그녀를 도와줬단 그 이유만으로.

플로라는 자신을 지키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르네와 그녀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던 것처럼.

그녀가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살았던 것도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은 도망자에겐 사치였다.

하루하루 절망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럼 내 제안이 마음에 들 텐데. 플로라.”

하네칸에 센칸의 첩자가 많을 걸 알면서도 숨어들었던 건 오기였다.

센칸은 무슨 이유에선지 한 번도 그녀에게 하네칸에 관한 임무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어떻게 생겨 먹은 나라인지 궁금했었다. 왜 센칸이 따라잡지 못해 혈안이 되어 있는지.

잘하면 이 제국에서 조력자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기대마저도 완전히 체념했다. 고단한 삶이 결국 그녀를 굴복시켰다.

“설마 내가 못 미더운 건가?”

그 기회가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애써 잊고 살았던 ‘분노’와 평범해지길 바랐던 ‘꿈’이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시몬은 왜 이런 제안을 한 것일까. 하네칸 제국에는 위대한 기사들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이 능력 따위가 뭐가 아쉬워서?

역시 다른 속내가 있을 터였다.

‘설마 센칸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나?’

그 진짜 속내는 플로라에게 해로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거부할 수 없었다. 독약인 줄 알면서도 마시고 싶었다.

“……시몬은 저를 믿나요?”

“아니. 우리가 얼마나 봤다고?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니야.”

“근데 왜 그런 제안을 해요? 제가 첩자면 어쩌시려고요. 시몬을 죽일 수도 있어요.”

플로라의 말에 시몬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날 죽일 계획이 있었다면 기회가 많았을 텐데. 우리 꽤 오랫동안 단둘이 있었잖아. 지금도 둘 뿐이고?”

둘 뿐이라는 말의 억양이 왜 이리 묘하게 들리는 걸까. 순간 동굴에서 시몬이 자신의 위에 올라탔던 때가 떠올랐다.

‘갑자기 여기서 그 생각이 왜……!’

혼자 떠올린 생각에 화르르 열이 올라, 눈을 꾹 감아 버리자 시몬이 미간을 좁혔다.

“얼굴이 붉은데. 혹시 방이 더운가?”

플로라는 대답 대신 도리질을 쳤다.

“그, 그럼 제가 제국의 기밀을 빼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요?”

화제를 바꾸기 위해 급하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창문이 제대로 열려 있는 건지 확인하던 시몬이 다시 플로라를 보았다.

“제국의 기밀을 알아내 빼돌릴 정도면 나의 최측근은 되어야 할 텐데? 그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겠어? 플로라.”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플로라가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의 말은 마치 도발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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