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186)

177

“모두 두려움을 버리고 마음을 담대히 하라!” 

미리엘은 다시 한번 신성력을 끌어모아 축복을 유도했다.

여신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고 이번에도 역시나 힘을 허용한다. 빛이 퍼지면서 누군가가 아가사의 이름 아래에 이곳에서 큰 존재와 맞서 싸우고 있음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바벨의 명령과 아가사의 가호가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한 신의 자애와 보호, 또 다른 신의 집착과 미련은 그 본질이 같다. 그렇기에 두 힘은 서로를 몹시 증오하는 것처럼 짧게 맞붙어 물어뜯다가 동시에 소멸했다.

그 사이에 정신을 차린 이들이 서둘러 귓구멍으로 솜뭉치를 밀어 넣어 막았다.

“모두 귀를 막아라! 여기서 물러나선 안 된다! 우리는 반격을 준비한다!”

만일을 대비해 돌격을 대기하고 있던 기수들은 드래곤의 음성에 휘말리지 않도록 자신들이 올라타고 있는 말의 귀까지도 모조리 막아 버렸다.

“목표는 건물이다! 저것을 방어하도록 놔두지 마라!”

부수면 끝낼 수 있다. 드래곤의 방해를 무시하고 무조건 도서관을 부수는 데에 총력을 쏟아부어야만 이 전투의 승기를 붙잡을 수 있었다.

“돌격!”

제드의 돌격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육중한 창을 한 손에 움켜쥐고 일제히 진군했다.

월광을 받은 것처럼 찬란한 흰빛이 어린 갑옷을 입은 그들은 중심으로 모여 한 몸처럼 뭉치더니, 거기에서부터 터질 듯한 속도를 발휘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하나의 군대, 하나의 공격, 하나의 목표다. 오로지 한곳으로만 집중도가 폭발할 것처럼 모이면서 인간 이상의 힘과 속도를 지닌 창들이 일제히 공기를 찢으며 날아갔다.

“그래…… 저걸 부숴야 돼. 이게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우리 공주가 몸 바쳐 이루어 낸 기회야. 이자리스의 사활이 걸렸다고! 다들 정신 안 차릴 거야?!”

주먹으로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내려친 브리짓이 주변 사람들에게 기합을 넣자, 손을 떨던 마법사들이 다시 지팡이를 움켜잡고 가세했다.

그들은 여전히 두렵고 무서웠다.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하여 상황에 무뎌진 것도 겁을 상실한 것도 아니다. 드래곤에게 맞선다는 것은 정상적인 머리에서 판단한다면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언제는 우리가 안 그랬던가. 무너진 나라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광기가 있어야만 했다는 걸 마법사들은 이미 오랜 폐허의 생활로 익히고 있었다.

“알잖아. 우리,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잖아.”

더는 망국의 그늘에 숨어 살고 싶지 않았다. 더는 타국의 지배에 짓눌려 신음하고 싶지도 않다. 여기는 우리 땅이다. 가난해도 좋으니 그들은 다시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삶을 원했다. 그러므로 기꺼이 광기에 제 몸을 싣기로 했다.

“다들 가시덩굴을 만들어. 드래곤을 저 벽에서 뜯어 내!”

땅이 갈리면서 넝쿨처럼 생긴 굵은 나무줄기 같은 것들이 빠르게 자라 도서관의 외벽을 기어 올라갔다. 거침없이 퍼져 나가 드래곤을 그 자리로부터 떼어 내려는 것처럼 굵은 가지로 튼튼한 다리를 조여 당겼다.

“이런 건방진……!”

마법사들의 나무줄기와 기사들의 창칼이 동시에 날아오는 것을 포착한 드래곤의 심장 한쪽에 분노가 안착했다.

지글지글 끓는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처럼 분출하지 못한 억울함이 내장을 뒤틀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 내가 무엇을! 그저 추억만을 간직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저 그리움만을, 그저 외로움만을, 그것만을 달래고자 했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간절함인지 저 인간들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 모두 용서하지 않겠다!”

오열에 가까운 절규가 사방으로 널리 떨쳐지자 투척기의 포탄과 창, 마법이 도중에 아래로 픽 꺾여 힘을 잃고 휘어진다.

그것들은 금세 다시 의지를 담고 회수되어 포기하지 않고 한 점으로 몰려 쏟아졌지만 상대는 드래곤이요, 자아를 잃었다 해도 신. 만신창이 상태로도 지독한 힘을 지녀 몇 번이고 집중 공세를 떨쳐 내며 사람들의 공격을 봉쇄했다.

“무력화되어라. 거듭해서 무력화되어라!”

바닥을 후려치는 사나운 꼬리 짓에 마법사들이 나뒹굴고, 웅장한 날개가 일으킨 폭풍에 기사들이 탄 말이 주춤했다.

연속해서 화살을 쏘던 이즈는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무너지지 않은 저 도서관이나 다수를 상대로도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저 드래곤이나. 이건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전투였다.

“으아아악!”

날개가 일으킨 이상한 기류에 휘말려 결국 몇몇이 허공으로 날아 거칠게 떨어졌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이거, 애초에 가능성이 있는 싸움이기는 했던 거야?”

이즈는 어떻게든 화살을 맞혀 격추시켜 보려 했지만 관통은커녕 비늘 하나조차 깨트리지 못한다. 채워지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동이 나는 화살 통을 확인하는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좋지 않은 쪽으로 굳어졌다.

일전에 성안에서 처음 붙었을 때에도 그는 저 존재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드래곤의 본체도 아닌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패를 당했었다.

“빌어먹을.”

그때 그는 생애 처음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두 녀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 순간, 그의 마음속을 짙은 패배감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사기가 떨어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만 무너뜨리면 평생의 숙원을 달성하는 인간들과 달리, 그에게는 이 전투의 목적이 희미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없다면.

그녀가 이미 죽었다면.

자신이 대체 왜 싸워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거품들이 급격하게 빠져나가면서 내면에서부터 좌절감이 생겨나려 했을 때였다.

불현듯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 근처에서 종잇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허공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예상했던 공주과 기사가 훌쩍 뛰어나왔다.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을 치르고 왔음을 역력히 드러내는 차림새였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얼굴은 땀투성이다. 안색도 창백했으며 흔들리는 호흡에서부터 현저하게 떨어져 있는 체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틀거리는 다리로 땅을 디디자마자 곧장 전투 속으로 뛰어들며 몸을 던지듯 질주했다.

돌이 떨어지는 건물 아래로 거침없이 파고들어 간다.

어떠한 의논도, 눈빛 교환 같은 것도 없었다. 달려 나가는 행동에는 사소한 망설임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태리가 도끼와 총을 양손에 각각 끼었고, 클로드는 원래 가지고 있던 칼은 어디에서 깨 먹은 건지 뛰어가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기를 보이는 대로 주워 들었다. 왼손에는 철퇴를 오른쪽 어깨에는 무거운 대검을 걸친 클로드가 겁도 없이 흔들거리는 도서관의 외벽을 차고 훌쩍 위로 올라갔다.

“저런 미친. 정신 나간 녀석들이…….”

살아 돌아왔잖아.

하하하, 살아 돌아왔어!

죽은 줄 알았다.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 돌아왔다. 돌아와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을 하고는 곧바로 전장 속으로 쳐들어가는 천하의 독종들이었다.

“아, 잠깐만. 이러면 얘기가 또 달라지지.”

이즈가 의기소침해졌던 어깨를 다시 유연하게 펴 내며 내렸던 활을 도로 들었다.

참 신기하다. 그냥 독종 두 명이 아군 진영으로 복귀한 것뿐인데.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는데. 방금 전만 해도 그렇게나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던 싸움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거기에 갑자기 근거도 없는 자신감이 솟는 것처럼 머릿속이 무모해졌다. 바윗덩어리가 떨어지는 벽을 타고 오르는 저런 또라이 놈도 있는데 뭘, 같은 객기로 꽉 차오른단 말이다.

“하긴 그동안 저 녀석들 따라다니면서 워낙 별의별 일을 다 겪어서 말이지.”

그것들과 특별히 다를 것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괴이한 의욕으로 두근거리는 맥박에 맞춰 이즈는 다시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활시위를 끝까지 당겨 잡고 있자 피잉 하는 예리하고 맑은 소리가 울리면서 화살촉 끝에 투명한 고드름이 맺혔다. 화살촉의 경도가 단단해진다. 조금 버겁더라도 이제부터는 한 발마다 그 위력을 최대치로 늘려서 출력해 볼 작정이었다.

그 의도를 눈치 빠르게 알아챈 브리짓이 허겁지겁 뛰어오더니 자신의 비약이라며 심상치 않아 보이는 독주머니를 건넸다.

“이걸 써. 화살촉에 묻혀 쏘면 아주 끝내주는 광경을 보게 될 거야.”

하, 그래, 맞다. 독종 녀석이 여기에도 하나 더 있었지. 이즈가 헛바람을 터트리듯 웃었다.

“야, 엘프가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독화살을…… 할 것 같았냐? 이걸 왜 이제야 내놔?! 진작에 줬으면 헛수고 안 했을 거 아냐!”

“내가 미쳤다고 내 필살기를 처음부터 너한테 턱턱 맡기냐?!”

역병의 집합소 같은 퀘퀘한 냄새가 나는 병 속에 화살촉을 담갔다가 빼자 피멍이 든 것 같은 액체가 묻어 나왔다.

“좋아, 한 번 해 보자고. 지금부터 활시위가 끊어질 정도로 날려 줄 테니까.”

화살촉의 무게가 전보다 확연하게 무거워진 탓에 사거리가 짧아졌지만 고드름에 독까지 묻어서 위력은 대폭 상승했다.

이즈는 그길로 태리와 클로드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난리 통 속으로 질주해 나가며 드래곤의 목덜미를 향해 초점을 잡았다.

앞으로 달려 나가서 활을 쏘는 저격수라니.

활잡이답지 않았지만 뭐 어떤가 싶었다. 어떤 기사는 전사처럼 양손으로 아무 무기나 잡고 뛰어오르고 또 어떤 마법사는 전면에서 도끼를 찍고 총질을 하는데.

엘프다운 날렵한 움직임이 좌측으로 빠르게 우회해서 파고들며 드래곤의 측면으로 접근한다. 도서관에서부터 떨어져 나온 크고 작은 잔해들이 굴러다녀 속도를 내기가 원활하기 않았음에도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정확히 이쯤이지!’

활을 조준한 채로 달리며 사거리를 좁힌 그가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라고 판단한 지점에서였다. 뒤로 끝까지 당겨져 있던 시위가 알맞은 순간에 정확하게 맞춰 놓아졌다.

퉁!

묵직하게 뻗어 간 화살이 마침내 드래곤의 몸에 박히는 데 성공한다. 비늘 위에서 미끄러지려 했던 화살촉을 독이 끈끈하게 녹이고 들어가면서 통로를 터 주었다.

그 뒤로 두 대, 세 대, 네 대, 다섯 대. 울퉁불퉁한 잔해 더미를 뛰면서 쏘는데도 조준은 정교했고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연속으로 꿰뚫은 화살이 적중할 때마다 드래곤의 자세가 출렁거린다. 그때마다 생긴 허점을 놓치지 않고 태리와 클로드는 더욱 가깝게 위로 붙었다. 뒤에서 이즈가 지원해 주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기에 둘 모두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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