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정신이 나가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클로드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건 어떤 때의 어느 감촉 때문이었다.
제게로 파고드는 자그마한 얼굴을 쥐었을 때, 사랑스러움을 느낀 손으로 그 뺨을 주무르고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렸을 때, 어디선가 흘러내린 물기가 손끝에 닿아 그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바로 그렇게 너무 늦은 후에 말이다.
눈물이라는 걸 인지한 즉시 그는 튕겨져 나가는 것처럼 태리의 몸에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는 걸로도 모자라서 손을 떼고 완전히 뒤로 물러난다. 경황도 없이 물러서다가 반대편 의자 모서리와 충돌해 비틀거리기도 했다.
건장한 체격에 비해 강한 충격이 아니었음에도 팔걸이를 붙잡고 겨우 넘어지는 것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머리는 이미 모든 것이 난장판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화가 나는데 그것보다도 더 그녀가 미치도록 좋아서 오기로 시작했던 일이었다. 그로선 도저히 어떻게 해도 그녀에게 화를 내는 법 같은 건 몰랐으니까. 차라리 내 뺨이라도 치고 욕이라고 퍼부어서 나 대신 화라도 내 줬으면 해서.
그런데 어느 순간 부드러운 손이 펄펄 끓는 몸에 닿았고 그다음부터는 사고가 완전히 나가 버렸다.
‘내가 울렸어. 내가, 내가……’
스스로를 저주하는 표정으로 휘청이던 그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너져서 태리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입맞춤이 끝났을 때 그녀는 울고 있었다.
옆으로 돌아눕는 치마의 스침, 힘겨워하며 일어나 앉는 가쁜 숨소리. 모두 죄책감을 짙게 만드는 것들이다. 열기와 충동으로 시작했던 입맞춤은 이제 아릿함만이 남아 있었다.
고개를 떨어트린 클로드의 입에서 사과인지 애원인지 모를 말들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머리가 어떻게 됐었는지 안고 나니까 도저히 못 참겠어서…….”
끝없는 사죄가 이어졌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그는 죄인처럼 무릎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눈물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기에 그가 다시 헌신적인 바보로 돌아온 것에 태리는 쏟아지는 울음을 터트렸다.
흐느끼던 울음소리가 점차 커져 엉엉거림으로 번져 나간다.
그녀의 몸에 또 손을 댈 수는 없으니 눈앞에서 울고 있어도 클로드는 꼼짝없이 보고만 있어야 했다.
저대로 놔두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아서 달래 주지도 못 하는데 한번 터트린 울음을 태리는 쉽사리 그치질 못했다.
결국 손으로 만지지는 못하고 클로드는 제 소매를 접어서 흘러내리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훔쳐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 내도 마르지 않는 눈물샘 때문에 소매조차 흠뻑 젖고 만다. 젖은 소매로는 젖은 뺨을 문질러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도 못 쓰게 된 축축한 소매를 내려다보며 그는 스스로에 대한 착잡함과 절망감으로 가슴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너무 괴로워서 벌어진 실수였다. 마음이 너무 가파르게 베여서 그만 절벽에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그녀가 그 절벽 끝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 끝에서 제게 혹독한 결심을 품고 계약을 제안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걸 다 봤으면서도…… 화가 난다고 거칠게 달려가서 그만 그녀를 껴안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구른 것이다.
흠뻑 젖은 자신의 소매를 클로드는 반대편 손으로 구겨 잡았다. 단순히 잡는 것이 아니라 손목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움켜잡고, 그대로 뽑아 버릴 것처럼 힘을 실었다. 보는 사람이 무서울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 자해에 가까운 행위를 태리는 손등을 덮는 가벼운 동작으로 멈춰 세웠다. 새어 나오는 그녀의 고달픈 목소리가 축 늘어져 버린 지친 새의 날개 같았다.
“그러지 마요. 나한테 사과하지도 말고……. 내가 더 잘못한 거니까…….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상처가 되는 얘기인 줄 알면서도 내뱉은 것은, 도저히 미움받지 않고서는 파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미움을 받아야만 꺼낼 수 있는 말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렇게나 지독했던 그녀조차도 물이 엎어지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제 손으로 망가뜨린 그를 보는 것이 억지스러운 미움을 견디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그런 식으로 망가트려서 이용하기엔…… 자신은 눈앞의 이 사람을 너무나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나랑 약혼하는 거, 싫죠……?”
누가 그런 약혼을 하고 싶겠어, 대체 누가. 태리는 눈물을 닦아 내며 제 발치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행여나 자신이 위협을 느낄까 물러난 채로 다가오지 않는 그는 좀 전의 일이 꿈이었던 것처럼 제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망가트렸는데도…….
시간이 돌아간 것도 아니고, 이미 줘 버린 상처가 없어져 버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은 맞았다.
벼랑 끝에서 요구했던 계약을 태리는 결국 제 손으로 엎었다.
“싫으면 그렇게 해요. 원하는 대로 해요. 그냥 거절해요.”
“아니. 말했잖습니까. 나는 그거 절대 거절 못 한다고.”
그러나 일그러진 표정의 클로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리는 그에게 거절해도 된다고 했지만 물이 엎질러진 순간 절망스러운 무언가를 깨달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도 바꿀 수 없는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계약 상대를 사랑하게 되는 순진한 우를 범한 순간부터 그에게서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이미 사라졌었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에겐 그녀를 거절할 수 있는 자유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을 이제껏 숨기고 감추다가 지금에서야 그녀에게 고해하는 것뿐이었다.
눈가에 남아 있는 물기를 엄지손가락으로 쓱 훔쳐 주며 그가 자신의 오래된 패배를 고백했다.
“난…… 당신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게 될 거야.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못 떠날 거라고.”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그깟 계약 같은 걸 내밀기도 전에 이미 여러 번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하고도 남았을 테다. 그런데 욕구대로 날뛰지 않고 그는 지금껏 그녀 앞에서 내내 성실한 척을 해 왔다.
여유로운 척, 흑심 따윈 없는 척, 손대지 않고 바라만 볼 수 있는 착한 남자인 것처럼 애써 왔다.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데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다. 실수 한 번에 모든 게 다 날아갔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니 누굴 탓하지도 못하고 찡그리듯이 쓰게 웃은 그가 머리를 숙여 태리의 손등에 경건하게 이마를 댔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경배를 올리듯이.
“나를 잠시라도 당신의 약혼자로 남겨 주신다면 나는 오로지 당신을 위해 검을 들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 서약은 나의 죽음 이후에도 유효하며 시간이 흘러도 불변하고 불멸할 것임을 맹세하겠습니다.”
그건 분명히 기사의 맹세였다. 주인을 고를 때 단 한 번 하게 되는 절대 서약.
신의 기사로서 일찍이 여신에게 한 번 맹세를 바쳤던 그이지만, 지금 태리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그 신의 기사가 아니다.
‘나의 기사.’
그는 공주의 기사가 되려 하고 있었다.
“……진짜 바보 같애. 이런 데에 맹세 같은 거 낭비하지 마.”
“허락해.”
“몰라.”
“울려서 미안해.”
“그것 때문에 운 거 아니었단 말이야.”
“그럼 나쁜 짓 해서 미안해.”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어른에게 말대꾸하는 꼬마 애처럼 태리는 클로드가 말하는 족족 받아쳤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똘망똘망한 발음에 같이 섞여 나왔다.
“하아, 그건 나쁜 짓이 맞아. 왜 고집을 피우는 거야.”
“화 안 났다고 했잖아.”
“나는 나 자신한테 화가 많이 났어.”
“그럼 나한테 대신 화내.”
“내가 어떻게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클로드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내가 좀 전에 여기서 무슨 짓 했는지 잊어버렸어?”
“하나도 안 잊어버렸어.”
“그럼―”
“그러니까…… 해도 돼.”
자신이 없었는지 말하기 전 침을 꿀꺽 삼킨 태리는 클로드의 옷을 구겨 잡긴 했지만 그를 똑바로 보지는 못한 채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해도 돼, 라고.
훌쩍이긴 해도 발음만큼은 여전히 또렷해서 조금의 헷갈림도 남기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러므로 들었다면 결코 알아듣지 못할 수도 없었다.
“……뭐?”
클로드는 벽에 머리통을 쾅 갖다 박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봇물이 터진 것처럼 태리가 재차 강조해서 반복했다.
“해. 해도 된다고.”
“안 해.”
“해도 된다니까?”
“안 한다니까.”
하지만 연거푸 거절당한 것이 충격이었는지 커다랗고 예쁜 눈이 그 자리에서 크게 벌어졌다가, 다시 스멀스멀 물기가 차올라서 클로드에게 날아가 꽂혔다.
“왜…… 왜 안 하는데? 내가 해도 된다고 하잖아.”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제발! 진짜 큰일 난다고!”
“싫어, 해!”
“싫어, 안 해!”
“하라구!”
“안 한다고 했잖아!”
기를 쓰고 거절하는 클로드의 단호함에 급기야 태리의 눈동자에는 더는 담을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이 차올라서 그렁그렁 맺히기에 이르렀다.
속상함, 안타까움, 오기. 그 모든 것들이 점철되어 있었는데 그런 얼굴로도 용케 앙칼지게 잘 따지는가 싶더니 더 가지 못하고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콱 찍었다.
“해도 된다니까 왜 고집이야? 진짜 바보야? 진짜 바보냐고.”
“내가 잘못했어. 이젠 안 그럴게. 정말 약속할게.”
이 바보가 내 마음도 하나도 모르고. 그런 게 아닌데 정말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
더 때리라고 요령 있게 어깨를 들이미는 남자를 태리는 마구 난타하다가 그의 목깃을 두 손으로 움켜쥐어서 당겨 왔다. 그러곤 바보 같은 남자에게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제 할 말을 꾹꾹 다 하고야 말았다.
“잘 들어. 여긴 더는 벌 받고 혼났던 장소가 아니야. 내가 당신 기억 속에 이곳을 그런 식으로 남겨 두지 않을 거라고. 아까부터 진짜 그게 제일 싫었단 말이야…….”
그러곤 미풍이 일며 태리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찰나였지만 입술 새로 숨결이 섞였다. 입술을 꾹 밀듯이 힘 줘서 붙였다가 떼며 그녀가 말했다.
“앞으로 이곳에 오면 이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랐으면 좋겠어. 그리고 몇 번을 말하지만 난 화 안 났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