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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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본인 입으로 폭로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신성력이 없으니 성기사가 아니라고.” 

“그보다 더 전에 말했잖아요. 당신은 못하는 게 아니라고.”

이것만큼은 정직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심정으로 태리는 올곧고 확정적인 말투로 선을 그었다.

평생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한 인생을 바꿀 수 없었다던 남자의 눈빛은 그 즉시 흔들렸다.

이 바보. 멍청이.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기쁘지도 않다. 자신의 깔아 누른 남자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제게 뒤통수를 맞아 놓고도 그는 또다시 자신의 말 한마디에 휩쓸리려 하고 있었다. 그저 말뿐인 주장을 믿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게 진심인지를 생각하며.

진짜…… 너무 한심해. 너무 바보야.

더는 믿을 가치도 없는 여자로 전락했다 해도 부당한 대우라 여기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든 자신을 믿어 보려는 그의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파서 시려 왔다.

“나한테는 이 계약, 꼭 필요한 일이에요. 당신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요.”

계약을 종용하는 목소리에 클로드는 이를 악물었다.

망국의 공주 같은 건 그만 때려치우고 다 관두라고 소리치고 싶기도 했지만 그는 그녀가 지닌 공주다움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다. 어째서 선택한 게 이런 방법이냐고 화를 내고 싶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화를 내는 법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수긍하는 것.

자신을 구석에 몰아붙이고 울 것 같은 얼굴에 바들바들 떠는 작은 손으로 제 목덜미에 칼을 댄 여자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잔인한 계약을.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어 클로드는 소파에 흩어져 있는 공주의 머리칼을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머리칼에도 체온이 있는 것처럼 그녀의 몸을 안았을 때와 똑같은 온기가 느껴졌다.

이런 와중에도 이딴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미친놈같이 여겨졌지만 그렇기에 그는 이 한 올까지도 그녀가 다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주고, 도저히 밀어낼 수 없는 나만의 자리를 만들고,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독차지하면서…….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로 준다고 했던 말. 약혼.”

“…….”

“사실은 놀랐습니다, 너무 정확해서. 애초부터 내 바람은 그거 하나였거든요. 당신 옆에 내 자리를 만드는 거.”

그가 원하는 것은 약혼.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약혼 뒤의 파혼.

계약이 무사히 성립되어 끝까지 마쳐지면 공주는 기사에게 성검을 사용하는 법에 대해 알려 준다.

누군가에게는 잔인하다는 점만 빼면 완벽한 거래였다. 유혹을 떨쳐 내기 어려울 만큼 완벽하다.

지금 여기서 알겠다는 말 한 마디면 쉽게 그녀의 약혼자가 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비록 그녀의 남편은 될 수 없지만 가장 원하던 것을 지금 당장 이 손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녀가 여기가 끝이에요, 라고 말하게 되는 그 직전까지.

그런데 내가 할 수 있을까. 널 품에 안아 보고 이만하면 됐다고 정해진 때에 헤어져 줄 수 있을까.

착잡한 목소리가 폭우처럼 공주의 슬픈 얼굴 위로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정말 내 약혼녀가 될 겁니까.”

“……그래요.”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정복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아서 잡아당긴다. 그녀가 놀라서 물러나려는 것을 목덜미 뒤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두 남녀의 거친 움직임에 허름한 의자 다리가 삐걱거리며 울었다.

“끝이 정해진 약혼자는 어디까지 할 수 있습니까.”

그토록 갖지 말자고 애썼던 그 쉽고 나쁜 마음.

그걸 이런 방식으로 줍는 것이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알면서도 클로드는 자신이 내버렸던 그 마음을 제 손으로 다시 줍기로 했다.

이런 걸 생각하지 못했던 게 아닌데. 야비한 놈이 되지 않으려고 참았던 건데. 그런데 사랑이란 게 이리도 비열한 거라면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로 모질게 당했는데도 포기가 안 돼서 미치겠으니 비열하게라도 굴어야 했다.

“말해 봐요.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건지.”

파혼이 전제된 관계였다. 그 아슬아슬한 줄을 타고 나는 그녀의 영역을 어디까지 침범할 수 있나. 클로드가 몸을 더 아래로 파묻으면서, 강직한 어깨가 태리를 짓눌렀다.

그녀는 두 팔을 짚어 그의 가슴을 밀어 내듯이 버텼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점차 표정이 흐려지다가 서서히 힘을 풀어 갔다.

무언가에 대한 허락처럼. 그래, 여기까지도 다 할 수 있어, 하고 고요히 읊조리고 문을 열어 주는 사람처럼.

가로막고 있던 팔이 사라지자 스르르 더 아래로 내려가게 된 클로드는 이제는 단단한 팔뚝으로 그녀의 허리를 마음껏 조일 수도 있게 되었다. 목 뒤를 건드렸던 손으로 어깨를 만질 수도 있었고, 손가락을 접어 그녀의 동그란 귓불을 건드려 볼 수도 있게 되었다.

밀착해서 몸을 겹친 거리에서 달콤한 살 내음이 자극적으로 향기를 풍겼다.

제 몸에 배게 하듯 그대로 향기를 맡다가, 순간의 사고처럼 입술 끝이 톡 스친다.

깃털처럼 가벼운 접촉이었다. 의도한 것도 아니고 서로 너무 가깝게 붙어서 생긴 일이다. 애초에 접촉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만큼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행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미 온몸이 예민해져 있는 둘은 뜨거움에 덴 것처럼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랐고 클로드는 그 길로 다리 기둥이 무너지듯 태리의 상체 위로 무너져 내렸다.

속이 녹아내린다. 녹아서 미칠 것 같다.

스스로를 고문하듯이 어렵게 참아 왔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쉬웠다. 너무 쉽고 , 미친 듯이 좋았다. 이래도 되는 건지 무서울 정도로.

“빌어먹을……. 뭐가 이렇게 좋아.”

붙잡아 가두어만 놓고 버티던 그는 더는 참지 못했다. 억지로 묶어 두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놔 버린다.

뺨을 당겨 와 입을 맞췄다. 내내 탐내고 있던 입술을 한 번에 집어삼킨 뒤에는 깨물어서 벌려 낸다. 깊이 파헤쳐 들어가며 뜨거운 혀를 얽었다.

태리가 도망치려고 하면 도로 끌어오듯이 얼굴을 붙잡고 몸을 밀어붙였다. 두 팔 안에 포로가 되어 갇힌 그녀는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었다. 놔주지도 않았고.

힘겨워 흘리는 신음 소리조차 남김없이 먹어 치워 댈 만큼 그의 움직임은 집요했다. 집요하고 지독하고 몹시 집착적이다.

이러다간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릴 것 같다고. 맞닿은 사이로 오가는 뜨거운 숨에 어질어질한 머리통이 폭발해 버리기 직전 클로드는 흥분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떨어지기만 했을 뿐 떠나지는 않는다. 그렇게나 헤집어 놓고도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지나치게 깊고 노골적이었던 입맞춤 때문에 숨을 몰아쉬는 태리의 눈앞으로 애끓는 회색 눈동자가 덮쳐 왔다.

콧날이 엇갈리는 거리에서 그는 또다시 젖은 입술을 거의 맞댄 채로 한계까지 치달아 있는 자신의 마음을 그녀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약혼 얘길 꺼냈을 때부터…… 당신은 내가 그 계약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 안 했어. 거절 못 할 걸 알고 있었겠지. 그래, 당신은 늘 옳아. 내가 어떻게 그걸 거절하겠어. 내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 너를.

이미 만지고 있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만지려고 클로드는 태리의 가는 목덜미를 쓸고 감싸며 문질렀다. 부드러운 살결이 그의 피부 아래에 있었다.

그뿐이었는데도 발정 난 미친놈처럼 입 안이 타오르면서 갈증이 일었다. 터질 것 같은 욕구를 삼켜 가며 그는 새 계약의 시작을, 그리고 자신의 패배를 괴로운 얼굴로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얻을 수 있다면……. 그럼 기한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나는 당연히 가질 겁니다. 병신같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어디 한번 내 약혼녀로 살아 봐요.”

그리고 다시 틈 없이 젖은 입술을 붙이고 삼킨다.

“클로드…….”

태리는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봐주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속살을 핥아 대는 움직임에 숨이 가쁘게 차오른다. 그녀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고 겨우 입 밖으로 낸 음성들도 흥분한 남자의 소유욕에 의해 탐욕스럽게 빼앗겼다.

제대로 터져 버린 둑처럼 그의 기갈은 어떻게 해도 좀체 채워지질 않았다.

그녀가 달싹거리지 못하도록 커다란 손이 긴 망토 속까지 파헤쳐 들어와 등을 쓸어내리고, 옆구리를 바쁘게 오르내리며 얇은 허리를 계속해서 꽉 끌어안는다.

벗어 버리고 온 두꺼운 겉옷 대신 걸치고 있는 얇은 실내용 드레스는 그의 손이 어디로든 파고들 수 있을 만큼 얇고 무방비해서 맞닿은 대로 서로의 윤곽이 고스란히 다 느껴졌다.

‘……뜨거워.’

헐떡임이 또다시 가파르게 짧아진다.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체온이 올라서 태리는 이대로 가다간 제 몸 전체가 이 자리에서 타오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그 정도로 그는 쉴 새 없이 자신을 매만지고 있었다. 이미 더 들어올 수 없을 만큼 깊이 파고들었으면서도 더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고개를 꺾어 가며 날카로운 콧날로 뺨을 찔러 댄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가져 보겠다고 포학하게 구는 것이다.

무너질 것 같은 마음으로 태리는 내려앉은 속눈썹 사이로 흐트러진 그를 느꼈다.

어둠에 잠긴 머리칼과 이목구비가 제 피부에 닿아 부서지고, 잠기지 않은 셔츠의 목깃 사이로 도드라진 목젖이 거칠게 움직이고 있다. 허리를 움켜쥔 팔뚝 위에는 성난 핏줄이 불거져선 그 힘으로 자꾸만 제 몸을 강제로 자신의 밑에 가두고 싶어 했다.

헌신적이고 순수했던 남자는 이제 무자비한 욕망만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으로 인해 망가진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태리는 두 팔을 뻗어 근육이 오르내리는 그의 등을 용기 내어 마주 안았다. 퍽이나 야한 소리가 났고, 숨이 막힐 것 같아 두려웠지만 밀어 내지도, 만류하지도 않는다. 이것으로 그가 제게 했던 물음에 대한 답을 하고자 했다.

끝을 정해 둔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던가.

그라면 무엇이든 해도 되었다.

실은 무엇이라도 해 줬으면 했다.

그와는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로 들려주고 싶었다.

그녀가 저항하지 않고 마주 안자 점점이 타오르던 불길이 금세 전신으로 옮겨 붙었다. 처음 해 보는 일에 겁이 나는데도 이것보다 더, 지금보다 더 강렬한 것을 바라게 된다.

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사랑받는 동안에는 미래를 알고 왔다는 이 알량한 두 눈도 잠시 앞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불이 꺼지면 누구도 지금이 몇 시인지 알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태리는 팔에 힘을 실어 스스로 으스러지듯이 클로드의 품 안에 파묻혔다.

그로써 둘 사이에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그 순간 그도, 그녀도 모두 깨달았다.

입맞춤은 무엇보다 정확한 도장이었고 서로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바야흐로 두 번째 계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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