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86)


 

108

몇 번이나 연속으로 불을 쳐 내며 누군가를 간절히 찾듯이 둘러보던 그의 눈길이 마침내 위로 올라왔다. 매운 연기에 기침을 콜록대면서도 태리는 천을 살짝 내려 눈 코 입을 보여 주었다. 

“나 여기!”

너무너무 반가워서 웃은 건데 클로드는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니, 검을 거두고 난간 아래에서 두 팔을 넓게 벌렸다.

받아 줄 테니까 뛰어내리라는 신호인가. 그래, 그게 좋겠다. 태리는 그걸 보자마자 고민도 없이 난간의 길고 높은 손잡이를 밟고 올라가선 수직으로 뛰어내렸다.

감싸듯이 두 팔로 안전하게 받아 낸 클로드가 그대로 제 몸을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커다란 어깨가 떨고 있었다.

‘뜨거워.’

불 속에 들어와 있어서 그런가. 그의 몸조차도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클로드는 그대로 말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뜨려서 뜯어 낸 건지, 가까이에서 본 출입구는 한가운데를 드릴로 파 버린 것처럼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두 사람과 자리를 교체하며 안으로 들어오는 성기사들이 바닥에 물을 뿌리는 진화 작업을 시작한다.

반대로 태리는 깨끗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겨우 젖은 천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연기에 흐려졌던 시야도 차츰 밝아져서 자신을 받치고 있는 클로드의 소매에서 불에 그을린 단추를 보았고, 약간 타 버린 어깨 위의 견장과 선이 굵은 턱도 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이 굳어 있는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열기에 바짝 마른 입술을 조그맣게 벌렸다.

“저기…….”

괜찮았으니까. 별일 없었으니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고 했는데 불 속에 갇혀 있던 목소리가 형편없이 쉬어 버린 채로 흘러나와 버렸다.

클로드가 신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다친 데는 없어?”

“없는데……. 근데 어디 데진 않았어? 괜찮은 거야?”

“누가 누굴 걱정해. 진짜 속 좀 썩이지 마…….”

다친 곳이 없다는 말에 안심이 됐는지 클로드는 태리의 이마 위로 머리를 숙이며 다시 한번 꽉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뜨거운 입술이 관자놀이를 스치며 귀 옆으로 묻혔다.

비껴 가는 듯한 감촉이었지만 태리는 깜짝 놀라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그렇게나 잊으려고 애썼던 빗속에서의 입맞춤을 떠올리고 말았다.

며칠이나 아랫입술에 은근한 부기를 남겼던 그 감촉.

하루 종일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날 그 순간의 밀침과 접촉이 잊히질 않았다.

깔아뭉개듯 덮쳐 들던 어깨라든가, 촘촘한 속눈썹이 보일 정도로 길고 가늘게 내리깔렸던 눈이라든가, 숨결 사이사이에 섞여 들었던 거친 숨소리 같은 것들. 그리고 큰 키만큼이나 커다란 손으로 허리를 이렇게 당겼던 것…….

어설프게 시작한 건 자신이 맞았지만 헤어 나올 수 없도록 몰입하게 만든 건 그였다.

‘우씨, 또 전부 다 떠오르려고 하잖아.’

이런 상황에서 그런 낯부끄러운 회상이라니. 기분이 점점 더 이상해진다. 머릿속을 털어 내려고 버둥거리던 태리는 때마침 제게로 허겁지겁 뛰어오는 다급한 얼굴을 발견했다.

“안시!”

“공주님!”

구원자처럼 등장한 안시의 뒤로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살려 보냈던 의리 넘치는 근위 기사도 함께 있었다.

클로드의 팔에서 내려온 태리에게 안시가 달려와서 울먹이며 부둥켜안았다.

“제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무사하실 거라 공주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오는 내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십니까!”

에헷. 그게 사실 조금 고생할 뻔도 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그런 건 말하지 말아야지. 태리가 머쓱한 태도로 안시를 진정시키며 궁으로 달려가느라 애썼을 기사의 노고를 치하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정말 빨리 왔네요.”

“아닙니다, 공주님.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다. 여기 계신 단장님께서 날 듯한 속도로 달려오신 덕분이지요.”

“그래도요.”

“누구의 소행인지 알아내기 위해 달아나는 이들을 추격했습니다만…… 붙잡히자마자 놈들이 자결을 했습니다. 소지품에서 종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나온 것으로 봐선 아무래도 광신도 집단의 소행인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흠, 결국 그렇게 마무리가 되려나. 마법사를 혐오하는 극단주의 성향의 광신도들의 습격으로? 뭐, 배후가 더 있다고 해도 상관없고 없다고 해도 중요한 문제는 아니긴 하다.

어차피 마법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나라에 차고 넘치게 깔렸다. 태리는 기사의 보고를 들으면서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드의 인상은 험악하게 변했고 그 심정을 대변하듯 숲속의 별장 같았던 저택이 불이 펑 하고 크게 터지면서 완전히 화마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불길을 잡으려던 성기사들은 일찍부터 대피해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현장 보존에 실패한 것을 다들 크게 아쉬워했다.

“마법을 좀 쓸 걸 그랬나?”

다들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곤 태리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저렇게까지는 되지 않도록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그 말에 클로드의 눈빛이 확 변했다.

“……마법을 안 썼어?”

뭔가를 눈치챈 것처럼. 날카롭고 뾰족하게.

“어어…… 그게 내가 생각이…… 있어서…….”

“한 번도?”

“으, 으응, 그러니까 그게 다…… 생각이 있어서…….”

아아앗, 큰일 났네. 태리는 눈동자를 옆으로 빼며 지지부진하게 대답을 미루곤 잽싸게 안시의 팔을 잡았다.

구조 요청을 받은 안시는 즉시 태리를 보호하며 한 발을 앞으로 나섰지만 이어서 정면으로 들이받는 클로드의 살벌한 시선에 치이곤 움찔해 버리고 말했다.

그 정도로 매서운 눈빛이었다.

“비켜라.”

“못, 못 비킵니다.”

“그럼 지배인이 대답해 보든가.”

“그, 그럼요, 제가 답하죠. 쓰려고 했는데 지팡이를 내려놓, 아니, 분실. 네, 분실했었습니다. 그래서 쓰지 못한 거죠.”

변명 같은 사실을 둘러댔지만 클로드는 짧은 헛웃음을 쳤다.

그래,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상했지. 공주님을 그리도 애지중지 감싸고돌며 보호하는 호텔지배인이 그녀를 홀로 내버리고 온 것 말이다.

수상하진 않았지만 그건 이상한 행동이었다.

둘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면 누구라도 오류라고 지적할 만한.

보통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치부하겠지만 저 지배인은 그럴 수 없었다. 제 한 몸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곁에 남아서 지켰을 터였다. 그런 인물이고 그런 관계였다.

“설마 일부러 의도했…….”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 태리의 고의성이 일부 포함되어 있음을 눈치챈 클로드는 불덩이 같은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다가 중간에 황급히 끊어서 삼켜 냈다.

혹시나 듣는 귀가 있을까 봐였다. 다른 누군가가 듣고 눈치채면 그녀의 입장이 위태로웠다.

“하!”

“미안해…….”

왠지 사과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태리는 얼른 미안하다고 내지르곤 눈치를 봤다. 다른 때는 굼뜨더니 이런 건 또 왜 이렇게 빨리 알아채는 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박을 하려면 손안에 가진 것을 어느 정도는 꺼내 놓고 베팅을 해야 했는걸.

결과적으로 성공했고 내일이면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아주 큰 이슈가 나라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다. 듀폰 경이 아주 멍청하지 않다면 이 기회를 이용해 황제를 충분히 골치 아프게 만들 수 있었다.

클로드에게만 들리도록 태리가 소리를 작게 죽여서 항변했다.

“필요한 일이었어. 저지를 만한 가치가 있었단 말이야.”

“하아…… 미치겠네, 진짜. 그럼 마법은 왜 안 쓴 거야.”

“그거는 자꾸 나보고 막 마녀라고 그러니까……. 마법이 문제가 아니란 걸 증명하고 싶었다, 뭐.”

“뭐?”

뚱하게 대꾸했더니 클로드는 돌겠다는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짚고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했다.

마른세수를 하고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태리의 어깨를 잡으며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다고 마법사를 다르게 보지 않아. 앞으로도 이런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날 수 있다고! 그때마다 매번 이렇게 목숨을 걸 거야?”

벙긋거리기만 할 뿐 이번에도 답하지 못하자 그가 무너지듯이 그녀의 이마 위로 머리를 숙였다. 높아졌던 언성이 확 사그러들고 남은 자리에 선명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데. 뭐 때문에 그러는지 몰라도 이런 짓은 하지 마. 제발 부탁이니까 이렇게는 하지 말라고.”

클로드는 요즘 들어 수시로 태리와의 계약을 불안한 마음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와선 나는 영토도 왕좌도 다 필요 없으니 드래곤만 잡아 달라고 요구하던 분명했던 제안.

그녀는 처음부터 그렇게 일의 시작과 끝을 확고하게 짚고 있었다.

꼭…… 스스로 퇴장해야 할 시점을 정해 둔 사람처럼.

책임져야 할 것들을 책임지고, 수습해야 할 것들을 다 수습하고 하고 나면 그 후 어느 때를 자신이 사라져야 할 적당한 순간으로 맡아 둔 사람같이.

그래서 불안했다. 그녀가 뭔가를 하나씩 해 나갈 때마다 그 순간이 점점 더 빠르게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아서.

클로드의 손이 태리의 어깨를 떠나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질문에 단 한 마디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태리는 그제야 왜 자신이 사과를 해야 했던 건지를 깨달았다.

“정말 미안해…….”

한껏 풀이 죽은 동그란 정수리를 클로드는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방금까지 다그쳤던 어투를 내던지고 깍듯한 목소리로 뒤바꾸어 말했다.

“앞으로 공주님은 지금보다 더욱 철저한 보호가 필요할 겁니다. 별궁은 안 됩니다. 폐하께서 계시는 본궁으로 가거나 제가 있는 공작저로 모시려고 하는데, 어느 쪽이 더 편하십니까.”

“앗, 그렇다면 난 당연히 황제 폐하 옆으로……”

“알겠습니다. 공작저로 갑니다.”

으으응???? 둘 중에 선택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당황한 태리의 손길이 그을린 단추가 있는 옷소매를 항의하듯이 꾹꾹 잡아당겼다.

기사들을 소집하던 클로드가 지그시 미간이 좁혀진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요.”

“아니, 나는 분명히 다른 데로 간다고 골랐는데?!”

“그래, 그런데.”

“근데 왜 자기 맘대로 바꾸는 거야!”

“내가 왜 당신이 고른 대로 해 줘야 되는데.”

“그럴 거면 왜 물어봤어?”

“미안하다며. 미안하면 당장 내 집으로 들어와. 이제 안 보이는 데다가 못 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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