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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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닥쳐라, 미리엘. 네가 분수에 맞지 않게 신의 총애를 너무 많이 받았구나. 하지만 너는 인간이란다. 나는 그 인간들의 꼭대기에 서 있고.”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간다면 핏줄이건 뭐건, 교단의 성하이건 뭐건 간에 상관없이 처벌하겠다는 황제로서의 일갈이었다.

가장 뼈아픈 곳을 찔렸기에 황제의 화는 정수리까지 다다라 있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그 말에 미리엘의 눈꺼풀이 떨어졌다.

“그렇죠. 동생과 나누어 가졌어야 할 힘을 제가 독식하게 됐죠. 그래서 저는 늘 그 아이에게 부채감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클로드가 평생 마음 졸이며 살 일도, 폐하에게 뒷덜미를 잡혀 백정처럼 이용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너희는 언제나 그렇게 날 원망하지만 그건 내 방식의 보호였다. 내 자식보다도 아꼈는데!”

“그런가요. 하지만 사람에게 그렇게 족쇄 채워 제 입맛대로 부리고 다니면 누구라도 어디 한 군데가 망가지게 됩니다. 착한 아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비난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놔줄 거란다.”

“그 전에 스스로 끊고 떠날 모양인데요.”

“너!”

“아, 그건 고모님이 정한 결말이 아닌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살면서 못된 짓, 나쁜 짓 많이 하셨잖습니까. 여신께선 죄의 무게대로 사람을 처벌하진 않으시지만 분명한 건 죄인에게 너그럽지도 않으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정의의 아가사로 칭송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결코 원하시는 대로 결말이 나진 않을 겁니다. 차갑게 다물린 표정을 면전에 대고 미리엘이 싸늘하게 말했다.

“클로드를 그냥 내버려 두시죠. 그 애가 지금 당장 어딜 가든, 누구에게 가든.”

* * *

“섣불리 올라가지 마! 벌써 둘이나 당했다고!”

계단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대치가 벌어졌다. 괴한들은 어떻게든 그곳을 타고 올라가 태리를 공격하려고 했고, 태리는 놈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철벽같이 수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해 위에서 야금야금 그들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아예 더 뒤로 물러나는 방법도 있었지만 집의 구조를 모르는데 무작정 밀려 줬다간 어떻게 될지 몰라, 그냥 여기서 시간을 끌거나 전부 다 잡고 가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또 한 번의 돌파를 시도하는 놈의 가슴을 강한 발길질로 걷어찼고, 그가 기우뚱 꺾이는 것을 보고 상체를 숙여 도끼날로 정강이를 파고들었다.

다른 놈들이 막아 준다고 서둘러 그쪽으로 칼을 뻗으면서 요란한 금속음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도끼가 이미 옷을 찢고 슬쩍 살을 긁었다. 강한 공격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죽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더라도 일단 피가 나면 고통스러울 테니까. 그리고 그런 자잘한 피해들이 모이고 모여 상대를 공격 불능 상태로 만든다.

작은 상처를 가볍게 여기고 꾸준히 달려들었던 저놈은 결국 가시밭에서 뒹군 것처럼 팔다리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물러나야만 했다.

‘고수는 평타를 잘 쓰는 사람이지. 스킬 중심의 전투는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자, 보았느냐.

입을 뿟, 하고 내밀며 가소로운 표정을 지어 주자 놈들이 아래에서 광광거리며 날뛰었다.

“제기랄! 살다 살다 저런 잡종은 또 처음 보네! 마법사라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법사가 도끼를 들고 날뛰어?”

그랬다. 태리는 지금까지 마법을 단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날 때까지 쭉 그렇게 할 작정이다.

마법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마법을 쓰기 때문에 누군가를 괴물로 모는 사고방식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살 떨리게 새겨 줄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이런 식의 불리한 구도는 그만둬야 돼. 계속 우리만 피해 보고 있다고! 아직도 모르겠어?”

그나마 머리가 좀 있는 녀석이 뒤늦게라도 동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패잔병 같은 자신들의 처지를 보고 느낀 게 많았는지 괴한들은 한동안은 덤벼들지 않았다.

그 잠시의 소강상태가 결코 휴전을 의미하지는 않다는 걸 알았기에 태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그 틈을 타 얼른 허덕이는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애썼다.

불현듯 나무 의자가 머리 위로 날아든 것은 그때였다. 1층에서부터 위협적으로 날아든 의자를 몸을 굴려 피하고 나니 액자에 부딪혀서 다리 네 개가 몽땅 부러졌다.

그리고 이어서 이번에는 그보다 더 큰 대리석 탁자가 날아왔다. 아래에서 장정 넷이서 잡고 함께 던진 것이라 날아오는 압력 자체가 달랐다.

‘저건 피할 수가 없겠네.’

태리는 과감하게 가슴 앞에서 양팔을 교차시켜 방어 동작을 취했다. 격투기 선수들이 피하지 못하는 공격에 가드를 올려 얼굴을 보호하는 것처럼 이렇게 하면 세게 얻어맞을 것을 살살 맞기로 지나갈 수 있다.

대리석 상판이 깔아 짓뭉개듯이 손등과 팔뚝으로 떨어졌다가 미끄러지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아야…… 아파라.”

경감된 대미지로 피해를 크게 줄였음에도 기본적으로 체력이 너무 없어서 적잖이 아팠다. 순식간에 여러 방을 두들겨진 기분이다.

진짜 인정사정없네. 탁자 밑에서 얼른 빠져나오며 태리는 이 기회를 틈타 계단으로 올라오려는 놈들의 시도를 서둘러 차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예측과 달리 괴한들은 계단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올라올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올라오기보단 거꾸로 그녀가 ‘내려오지 못하도록’ 1층에 있던 커다란 가구란 가구들을 몽땅 옮기고 던져 통로를 막아 버리기 시작했다.

피아노, 소파, 장식장 같은 가구들이 장벽처럼 설치되는 것을 보고 아연해진 태리를 보며 놈들이 히죽거렸다.

“발악도 여기까지일 거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는데, 두고 봐라. 거길 네 묫자리로 만들어 줄 테니.”

그러더니 신속하게 물러나기 시작한다. 끌어 내리려고 하이에나처럼 둘러싸던 게 무색하게도 2층 점령을 깔끔히 포기하고 물러나더니 심지어는 아예 대문 밖으로 모두 나가 버렸다.

퇴장하기 바로 직전, 기름진 바닥에 불붙은 성냥개비 하나를 툭 던진 채.

작은 성냥불은 떨어짐과 동시에 화르륵 타올라 큰불이 되더니 1층 전체로 번졌다. 화산 폭발하듯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열기에 태리는 코와 입을 가리며 가장자리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서 통째로 한번 타 죽어 보라고!”

악마 같은 깔깔거림과 쇠사슬로 문고리를 칭칭 두르는 행동. 이어서 대문에 못질을 박는 쾅쾅거림이 모조리 느껴졌다.

직접 손으로 처단하기 힘들 것 같으니 놈들은 집 전체에 불을 지르곤 태리를 그 안에 가둬 버렸다. 절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밖에서 출구를 봉쇄하는 철저함까지 돋보였다.

연기 속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태리는 사태를 파악했다.

“이거는 예상 못 했는데.”

하는 짓들을 보니 꽤나 자존심을 부리는 성격들 같길래 약을 살살 올리면 분통이 터져서라도 이런 수법은 쓰지 않을 줄 알았다. 무리해서라도 자신을 잡으려 할 줄 알았건만.

“하긴 아까 전에도 불을 지른다고 했었나. 어떡하지.”

임시방편으로 마스크를 만들기 위해 아무 커튼이나 잡아서 대충 찢은 다음 근처의 꽃병에서 꽃은 빼서 던져 버리고 남아 있던 물을 천에 적셔서 코와 입을 가렸다.

그런 다음엔 벽에 기대앉아서 조용히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어느 시대에나 통했었던 고릿적 방식인지를.

‘뭐지. 날 무시하는 건가? 마녀 화형이라니.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렇게 맞고도 정신들을 못 차렸네.’

이성과 지성이 상당히 많이 모자랐던 아주 옛 시대에 이와 같은 무식한 범죄가 가능했던 건 그 가여운 희생자들이 진짜 마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무 죄도 없는 평범한 여성들을 잡아 와 불을 질렀으니까 그게 통했지.

하지만.

‘진짜 마녀는 불에 지진다고 죽지 않아.’

아니, 상식적으로 이깟 불에 타 죽으면 그게 마법사겠냐고. 태리는 실소를 머금으며 입으로 주문을 읊으면서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주변으로 서리가 스멀스멀 끼면서 온도를 낮추더니 갑자기 훅 하고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다. 캐스팅하던 빙결 마법을 그녀가 도중에 중지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마법 하나도 없이 지금까지 잘 싸워 왔는데. 이제 와서 고작 이런 걸로 쓰기에는 좀 아까워.”

퍼펙트로 끝낼 수 있는 게임에 왠지 오점이 생기는 기분이랄까. 사소한 장애물을 해치워 버리겠다고 마나를 쉽게 꺼내 쓰기엔 뭔가 아쉬운 면이 있었다.

마법 없이 물리적 힘만으로 격파하고 살아남아야 더욱 값진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싸움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회색 연기는 멈추지 않고 천장에서부터 쌓여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숨쉬기는 그만큼 더 갑갑해졌고 철통같이 방어하던 2층 계단조차 불길에 잡아먹혀서 일부가 우지끈하고 무너져 내렸다.

조금 더 고민해 보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상황. 태리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마법 없이 창문을 뚫어서 빠져나가기로.

연기를 피하기 위해 몸을 낮춰 기어가며 복도 벽을 손으로 쓸자 곧바로 손가락에 창틀이 걸린다. 얼른 잡아당겨 봤지만 덜컹거리기만 하고 열리지 않는 게, 거기에도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쓸데없이 철두철미하네.”

하지만 이쯤이야 그냥 부숴 버리면 된다. 총을 되찾아 놨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파괴력을 키우기 위해 탄약을 불길에 지글지글 달군 뒤 자물쇠를 정조준한다. 한쪽 눈을 감고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콰쾅!

단단하게 잠겨 있던 것이 산산조각이 나서 파괴되는 소음이 귀청을 때렸다.

찡긋 감고 있던 태리의 한쪽 눈이 오잉? 하고 번쩍 커졌다.

“나 아직 안 쐈는데?”

총알은 아직 발사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이 막강한 파괴음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찾았더니, 불현듯 열기만으로 가득했던 공간에 찬바람이 섞여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것을 피부가 먼저 깨닫는다.

자물쇠를 쏘는 대신 태리는 얼른 계단의 난간으로 기어가서 기둥 사이에 얼굴을 껴 넣었다.

1층의 출입구가 부서져 있었다. 불길이 여전히 내부를 뒤덮고 있었지만 밖에서 몰아쳐 들어오는 찬 바람에 요동치며 기세가 주춤해진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태리는 곧 누군가를 발견했다.

겁도 없이 불길을 뚫고 들어와선 옷에 달라붙는 불덩이들을 무심하게 칼로 잘라 내 버리는 사람.

그가 하얀 검을 강하게 내리그으며 허공을 크게, 크게 벨 때마다 날뛰던 불길들이 풍압에 움츠러들어 작아졌다.

그것을 본 태리의 입가가 반가움으로 활짝 폈다.

저렇게 무모하고 대단한 남자라면 딱 한 사람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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