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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5일 차째, 그날 태리는 수도에서 했던 일 중 가장 손님다운 일정들을 거쳤다.
제국의 우월함을 자랑하기에 바쁜 행정관들을 따라 수도 방위군의 정규 훈련 모습을 시찰하고, 금과 보석으로 덕지덕지 발린 예배석에 앉아 천사의 목소리 같은 소년 합창단의 성가를 감상한 뒤, 볼모의 처지로 제국에 머무르고 있는 다른 나라의 왕족들과 한낮의 홍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아주 자연스럽게 수도 근교에 자리한 ‘고래의 눈’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호수 관광지에 대해 전해 들은 후, 황제에게 행선지를 알리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채 오후의 석양을 지고 궁 밖으로 나섰다.
대동한 인원은 셋. 마찬가지로 평복으로 위장한 안시와 근위 기사 한 명, 그리고 마차를 운전할 마부까지.
거창하지 않은 행렬 탓에 마차는 왕족이 타고 있기보다는 그저 그런 집안의 평범한 나들이 인원 정도로 비쳤다.
관광은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암석 사이에 자리한 호수는 끝내주는 경관을 뽐냈고 태리는 그곳에서 동그란 알사탕을 사 먹으며 안시와 시원한 바람을 쐬었다. 이자리스보다 찬 바람이었지만 춥거나 쌀쌀하진 않았다.
그리고 환한 달밤에 다시 돌아오는 마차에 올라탔다.
쿵!
달리는 도중에 뒷덜미를 콱 잡힌 것처럼 마차가 컴컴한 길 한복판에서 거칠게 땅을 긁으며 섰다. 한가롭게 넋을 빼고 있었으면 쏠려서 넘어졌을 세기의 급정거였다. 하지만 마차 안의 누구도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기민하게 청각에 집중하자 언쟁과 고함, 곧이어 날붙이가 엇갈리는 격투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안시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자 태리는 고요히 머리를 끄덕였다.
“준비하자.”
“후우, 알겠습니다.”
마차가 습격을 당했다. 얼마만큼의 실력자들이 몇 명이나 왔는지 모르겠으나 이쪽의 조촐한 인원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기사와 마부를 정리하고 나면 최종 목표인 공주 납치이든, 공주 살해이든 뭐라도 벌일 게 분명했다.
“우리는 모르고 당한 거야. 최대한 당황스러운 표정 잊지 마.”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공식적으로 피습이다.
황제의 귀빈으로 온 이자리스의 공주는 21일 저녁, 조촐한 호위로 외출에 나섰다가 복면을 쓴 광신도 무리에 의해 피습을 당했다……라고 기사화될 제목과 내용까지도 미리 뽑아 놓았다.
마법사를 마녀로 취급하며, 끔찍이도 멀리하는 독실한 신자들이 널린 나라.
그리고 그들은 가뜩이나 마음에 안 드는 그 마녀가 며칠 전 광장에서 마법을 쓰며 듀폰 경을 잡으려던 치안대를 방해했다는 비밀 아닌 비밀을 접했을 것이다.
거기에 때마침 충분한 호위도 없이 나가는 공주의 외출 소식을 듣고는 엉덩이를 그냥 놔두지 못했을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참지 못해서 습격하고 킬(kill).
이게 공식적인 스토리였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이것은 유인이다. 그렇게 스토리가 굴러가도록 열심히 판을 짜고 미끼를 뿌리고 연기에 공을 들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알면 뭐라도 저지를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역시는 역시잖아. 듀폰 경과 만났다는 사실을 열심히 흘리고 다니길 잘했지.”
“광신도란 그런 것이니까요. 이제 아시겠죠? 제국은 그런 놈들의 나라입니다. 썰어 버려도 시원찮을 것들.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세요. 마녀를 사냥하러 온 대가가 무엇인지는 가르쳐야지요.”
화가 많이 났네. 태리가 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조금은 아니길 바랐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습격이라니, 암살이라니. 너무 극단적이다. 저쪽의 방식이 극단적일수록 그녀가 공식적인 석상에 나설 수 있게 될 명분은 강력해지기야 하겠지만 마법사의 처지가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확인하게 되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너무해. 지난 5일 동안 내가 얼마나 착하고 온순하게 잘 있었는데.”
“맞습니다. 공주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감히. 괘씸하지요. 하지만 차라리 잘됐습니다. 아니면 내일 또 구실을 만들어서 나와야 했잖아요? 핑곗거리를 짜내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지요. 매번 황제 앞에서 연기를 할 순 없어요.”
그거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덕분에 여러 날 수고해야 할 일감을 덜었다.
황제가 친히 초대한 황실 귀빈에 대한 피습. 이건 어마어마한 일었다.
비록 그 귀빈이 자신들이 깔아뭉개고 있는 허수아비 국가의 후계자라고 해도 만약 여기서 그녀가 살아 나간다면 한바탕 제대로 따질 수 있는 구실이 생긴다. 정확히는 그런 자리를 마련해서 설 수 있다.
저들이야 그녀가 살아서 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고 왔겠지만 그거야말로 제대로 된 착각. 태리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래, 빗길에 쫓기면서까지 던진 미끼인데 저쪽에서 덥석 물어 줄 때 기회를 만들어야 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다 자랑했지?”
“그럼요, 공주님.”
안시에게는 극장가에 있었던 술래잡기에 대해 이미 여러 번이나 신나게 떠든 참이다.
심증만 남기고 물증을 제거하는 야비한 마법 사용,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미꾸라지식 도주. 똑같은 말을 벌써 몇 번이나 들었으면서도 안시는 처음 듣는 자랑인 마냥 몇 번이고 자상한 미소로 들어 주었다.
다만 ‘어떻게 빠져나오신 건가요?’라고 물었을 때, 태리가 ‘총독이 도와줬어…….’라며 눈가를 연하게 물들이고 얼버무리기에 그 부분에 관해서만 그저 모른 척하며 더는 파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총독이 유달리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지.’
공주님에게 목줄이 묶여 있는 개처럼 온종일 주변을 맴돌며 어슬렁거리던 총독의 등장이 요 며칠 동안은 상당히 뜸했다.
말없이 찾아와서 먹을 거나 쓱 놓고 갈 때도 많았고, 몰래 창문에 붙어 있다가 제게 걸려서 호다닥 도망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방문의 빈도수가 확실히 줄어든 편이다.
저놈이 어디가 고장 났나, 또 왜 저러나 싶은데 어째선지 공주님도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는 것 같아서 안시는 한 번도 그 변화에 대해 제대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분위기로 보면 싸운 것은 아닌데.’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둘 사이가 데면데면하다. 서로 만나지 못할 정도로 큰 부끄러움을 타고 있는 것처럼.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큰 문제라도 있나? 안시가 의문스러운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쿵!
외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란의 강도를 전하듯 마차 바닥으로 둔탁한 진동이 전해졌다.
안시는 즉시 하고 있던 생각을 끊고 이쯤에서 등장하는 게 좋겠다며 정확한 시점을 짚었다. 그 말에 태리가 곧장 앉아 있던 소파를 들어 올려 주먹만 한 연막탄을 숨겨 넣더니, 긴 심지에 불을 붙이곤 문을 박차고 나온다.
예상대로 바깥은 한바탕 일이 종료되고 난 직후였다. 마부는 일찍부터 제압당해 있었고, 홀로 오래 시간 저항했었던 기사는 방금 막 굵직한 몽둥이에 뒤통수를 가격당하고 기절했다.
아이고, 저런. 태리는 그쪽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가 멈칫했다. 제자리에 붙들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서늘한 감촉의 금속이 목에 들이밀어졌기 때문이다.
“움직이면 베일 것이다.”
세상에, 공주에게 이렇게 무례할 데가 다 있나.
“끝났으니 저항할 생각 마라.”
또 무엄하고.
태리는 세상 어디 이런 도덕도 예의도 모르는 자들이 있는가 하는 멸시의 눈빛을 착장하곤―
“그러지.”
얌전히 그들의 제재에 따랐다.
그녀의 고분고분함에 본인들의 유리한 위치를 느꼈는지 괴한들은 한껏 자만을 과시하며 그녀를 또 한 번 무엄한 방식으로 지칭했다.
“너희같이 무지한 부류를 뭐라고 부르더라. 그렇지, 마법사였지?”
“그럴 리가. 인간이라고 부르지.”
“시끄러워! 이미 상황은 끝났다!”
“뭘 노리고 이런 짓을 저지르지.”
“여신께서 너희를 벌하고자 하신다.”
“저런.”
“배우지 못한 이단자들 같으니. 목숨이 아깝다면 시킨 대로 움직여라.”
“요구 사항이 있군?”
꼴에? 요구 사항까지 있어? 태리의 입장에선 그런 뜻이었지만 놈들은 여전히 꺼덕거리는 태도였다.
“무기를 버려라.”
“무기?”
“지팡이! 숨기고 있다는 것 다 안다.”
“아아, 그런 거.”
기껏 잡아 놓고는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이 지팡이를 내놓으라는 것이라니. 비식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그리고 순순히 포박당해라. 손을 쓰지 못하도록 묶을 거다. 어떤 마녀들은 지팡이 없이도 팔만 휘둘러 수작을 부리기도 한다는데 묶인 채로는 어쩌지 못하겠지. 한다고 해도 제약이 있을 거고.”
“마법사에 대해 보고 들은 게 아주 많군그래.”
하지만 겨우 그런 걸로 될까. 마법사에게서 지팡이를 빼앗고 동작을 금하면 물론 능력의 상당 부분을 제약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렇게 되면 언어로 뱉는 주문(spell)과 머릿속의 사고만으로 마법을 써야만 하기 때문에, 애송이 마법사라면 저항하기가 힘들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이런 뜻이기도 해서.
‘마법사가 정말 무섭구나, 너희.’
놈들이 저런 요구를 하는 것은 결국 마법사가 두렵기 때문이었다. 너무 두려워서 이렇게까지 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고방식을 깨 줘 볼까나. 마법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줘서?
태리는 망설이는 것처럼 뜸을 들이다가 곧 상심한 음성으로 그들의 조건을 승낙했다.
“받아들이지. 기사와 마부를 죽이지 않는다면.”
마녀가 기사와 마부의 목숨을 걱정한다는 것에 괴한들은 당황한 것 같았으나, 이것은 주고받는 거래 같은 게 아니다. 습격인 것 같아도 본질은 유인. 그녀가 의도한 쪽으로 굴러가게 만드는 일직선의 스토리.
태리는 대꾸도 듣지 않은 채 먼저 행동했다.
“뭐라고 했지. 아, 무기를 버리라고 했었지?”
그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 드레스 위의 묵직한 겉옷을 벗으며 허벅지에 찬 도끼부터 뺐다. 그다음에는 손목에 늘 시계처럼 끼고 있던 로프 런처를 꺼내 놓고, 마지막으로 언데드 전투에서 부서져 최근에 수리한 총을 반납하며 약실을 열어 탄환까지 모두 꺼내 분리시켜 보였다.
“끝.”